"이번 사태를 겪은 이후 생각이 좀 바뀌었습니다. 국방장관은 합참의장이나 각 군 참모총장, 사령관들에게 과감하게 권한을 위임하고, 국무위원으로서 군의 정치적 중립과 군사적 전문성을 존중하는 가운데 문민통제의 가교 역할, 타 부처와의 업무 협조, 국회에서 군의 대변 또는 국민의 목소리 청취 등 다양한 정무적 활동에 더 비중을 둬서 업무를 해야 합니다. 이에 걸맞은 전문가가 국방장관으로 적합하다고 봅니다."
지난달 초 '12·3 계엄 이후 국방 개혁 방안'을 논의하는 공적 자리에서 나온 주장입니다. 국방장관은 군사적 업무를 현역 장군들에게 대폭 위임하고, 군의 정치 중립과 전문성을 보장하는 가운데 정무적 업무에 집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군무보다 정무", 달리 말하면 문민 국방장관을 염두에 둔 접근입니다.
누가 이런 말을 했을까요? 민간 전문가가 했을 것 같지만 아닙니다. 국방장관을 역임한 예비역 장성의 발언입니다. 장군과 국방장관의 경험을 바탕으로 12·3 비상계엄 사태를 통찰한 결과 이제는 문민 국방장관을 세워야 한다는 결론에 다다른 것으로 보입니다. 계엄의 늪에 빠진 군을 추스르는 막중한 임무를 띤 차기 51대 국방장관의 자격에 대해 여러 가지 의견이 나오는 가운데 국방부에 정통한 예비역 장성이 펼친 문민 장관론이라 그 울림이 작지 않습니다.
국방장관 출신 예비역 장성의 문민 장관론국방장관 출신 예비역 장성은 그날 모임에서 "현역 때만 하더라도 남북이 대치하는 상황에서 야전을 정확히 파악하고 군령·군정권을 제대로 이해하는 장성 출신이 국방장관이 돼야 한다고 생각했다", "상황이 발생했을 때 합참 전투통제실에서 몇 가지 보고를 받고 바로 지침을 내릴 수 있는 장점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라고 운을 뗐습니다.
하지만 12·3 계엄 이후 달리 생각하게 됐다고 했습니다. 그는 "국방부는 한 해 60조 원이 넘는 예산을 쓰고 군인 50만 명 외에 공무원, 국방과학자, 방위산업 종사자들도 관할한다", "국방 생태계가 워낙 방대해 내부의 이해관계를 합리적으로 조정하는 일이 만만치 않다"고 토로했습니다. 그러면서 "급격한 인구 구조의 변화, AI와 같은 첨단 과학기술의 도전 등에 대응하며 국방 생태계를 다시 설계하고 개혁할 필요성이 크다"고 지적했습니다.
계엄으로 군의 신뢰가 붕괴된 데다 국방 환경이 예전과 상당히 다른 만큼 처방도 전과 같아서는 안 되는 법. 국방장관 출신 예비역 장성은 국방장관이라는 자리를 선출된 문민 권력과 전문직업군 사이의 교량이라고 비유했습니다. 민간 전문가의 국방장관 기용이 원칙인 미국의 사례를 들며 "국방장관을 어떤 기준으로 인선해야 하는지 본격적으로 논의할 때"라고 정리했습니다.
차기 국방장관의 자격은?국방장관 출신 예비역의 차기 국방장관론은 군 주변에서 은근하게 회자됐습니다. 급격한 인구 구조의 변화, AI와 같은 첨단 과학기술의 도전, 거대한 국방부 관련 조직, 군의 신뢰 붕괴 등 국방부를 둘러싼 환경을 냉정하게 고려해야 한다는 그의 진단은 설득력을 얻었습니다. 예비역 장군 출신의 장관을 지지할 줄 알았는데 민간 전문가에게 힘을 싣는 주장을 펴서 신선한 반향을 일으켰습니다.
국방장관은 국민에 의해 선출된 권력을 대리해 군을 지휘하는 직위입니다. 즉, 국방장관은 문민정부를 대표합니다. 군을 대표하는 것이 아닙니다. 문민 장관론을 편 전 국방장관 말마따나 문민정부와 군의 가교 같은 존재인데 문민정부의 대표이다 보니까 군보다 문민의 색깔이 더 짙은 존재여야 합니다. 그래서 민주주의 문민통제가 굳건한 선진국들의 국방장관 자리는 주로 문민 정치인들의 몫입니다. 여성 국방장관도 곧잘 나옵니다. 군은 정치를 버리는 대신 전문직업적 자율성을 얻음으로써 싸워서 이기는 방법에 몰두합니다.
반면에 군부와 독재의 역사를 경험한 국가들은 예비역 군인에게 국방장관을 맡깁니다. 대한민국도 그렇습니다. 최근 몇 년 동안은 대선 캠프 출신 정치적 예비역들이 국방장관 직위를 독식했습니다. 민주당에 벌떼처럼 모여들어 대선판을 준비하는 예비역 군인들의 구상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예비역 실세가 상왕처럼 군의 인사, 예산, 조직을 장악하고, 휘하의 예비역들은 국방부와 군, 그리고 관련 기관의 권력을 독차지하는 청사진을 그리는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김용현의 폐쇄적이고 구태의연한 국방 상왕 체제와 무엇이 다른지 모르겠다"는 반발이 군 내부에서 나오고 있습니다.
계엄까지 정통으로 맞았으니 이제는 달라질 필요가 있습니다. 강건작 예비역 육군 중장은 신간 『강군의 조건』에서 "문재인 정부는 국방장관을 군 자체로 보고 견제하느라 애를 먹었다", "정권 창출에 기여한 민간의 국방 전문가들 중에서 국방장관을 임명하면 엉뚱한 걱정, 노력의 낭비, 부작용이 사라질 것"이라고 역설했습니다. 뜻있는 예비역 장군들로부터 변화는 시작된 것 같습니다.
(사진=국방부 제공,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