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현 SBS 문화예술전문기자가 전해드리는 문화예술과 사람 이야기.
처음엔 코미디언 김준현의 뮤지컬 데뷔작이라고 해서 관심을 가졌습니다. 창작 뮤지컬 '이상한 나라의 춘자 씨' 얘깁니다. 이 뮤지컬의 '타이틀 롤' 춘자 씨는 치매 증상이 시작된 70대 노인입니다. 노인을 주인공으로 내세우는 뮤지컬은 흔치 않죠. 공연 시작 전 안내방송부터 김준현의 목소리가 나왔습니다. '전자레인지, 전기밥솥 등 모든 전자기기의 전원을 꺼 달라'고 하니 객석에서 웃음이 터져 나왔습니다.
이 뮤지컬은 '소, 원하는 대로 다 돼지'라는 간판을 내건 고기 뷔페에서 시작됩니다. 경쾌하고 리듬감 넘치는 첫 뮤지컬 넘버는 바로 로고송 '소, 원하는 대로 다 돼지'입니다. 백종원을 모델로 한 듯한 외식업계 대부 '백정언'이 운영하는 식당이죠. 소고기 돼지고기 양껏 먹을 수 있는 고기 뷔페다운 이름이면서, '소원하는 대로 다 된다'는 중의적인 이름으로 읽히기도 합니다.
소원 찾아 떠나는 '이상한 나라의 춘자씨'
이 식당에 고춘자 가족이 가족 모임을 위해 찾아옵니다. 치매 증상이 막 시작된 춘자 씨의 70번째 생일, '소원하는 대로 다 돼지' 노래를 들으면서 춘자 씨는 자신의 소원을 떠올려 보려 하지만 암만해도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백정언 사장은 춘자 씨가 자신이 어린 시절 좋아했던 '진수성찬' 떡볶이 가게를 운영했다는 것을 알고 밀키트 사업을 제안합니다. 뜻밖의 제안에 가족들이 '대박의 꿈'에 부풀어 흥분하는 동안, 화장실에 간 줄 알았던 춘자 씨가 감쪽같이 사라집니다.
이후 뮤지컬은 춘자 씨의 시점과 춘자 씨를 찾아 나선 가족들의 시점, 그리고 환상 세계와 현실 세계를 오가며 진행됩니다. 춘자 씨는 횟집에서 자신의 '정신줄'에서 빠져나온 '영혼의 물고기'와 마주치고, 물고기가 건네준 '코딱지'를 먹고 70에서 0이 빠진 7살 아이가 되어버립니다. 그리고 잃어버린 '소원'을 찾아 떠나죠. '어른들만 갈 수 있는 은빛 가루 나라'에서는 100살이 되어, 이미 세상을 떠난 춘자 씨의 남편과 엄마, 그리고 일찍 죽은 어린 딸 수정과 재회하며 위로받기도 합니다.
치매 환자의 환각, 연극적 환상의 세계로
치매 노인의 망가져 가는 뇌 속의 상상이 마치 동심이 만들어낸 동화 속 세계처럼 펼쳐집니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를 연상시키는 춘자 씨의 '모험'은 사실 길을 잃고 헤매는 춘자 씨가 보는 환각이죠. 극을 쓰고 연출한 오미영 씨 이야기 직접 들어볼까요.
"치매 환자들이 무엇을 보고 있을까, 그 환각의 정체가 뭘까, 알고 싶었고 이걸 어떻게 무대에서 표현할 수 있을까 궁금했어요. 그래서 치매에 대한 공부를 많이 했어요. 얼마 전에 노인 요양병원에 계시는 치매 전문 의사 한 분이 공연을 보러 왔는데, 치매의 본질을 잘 이해하고 쓴 작품이라고 평가해 주시고, 이 공연을 교재로 사용하고 싶다는 말씀도 해주셨어요"
"치매의 본질이 뭘까요?"
"많은 사람들이 치매 환자는 다 이상하다고 생각하는데, '이상한 나라의 춘자씨'는 이상하지 않게, 인물을 이해할 수 있게 표현한 것 같다고 말씀하셨어요. 우리가 '나쁜 치매' '착한 치매', 뭐 이런 이야기들 하잖아요. 그런데 그건 밖에서 보는 사람들 입장인 거고, 치매를 겪고 있는 사람들 입장에서는 각자 다 이유가 있는 행동들이거든요. 그걸 이해할 수 있도록 표현했다는 거죠."
웃기고 울리는 가족 이야기
현실 세계에서는 엄마를 찾아다니는 가족들의 이야기가 펼쳐집니다. 춘자 씨가 일찍 죽은 딸 수정이한테 미안해하는 것처럼, 큰아들 진수는 동생이 자기 때문에 죽었다는 죄책감을 안고 살아왔습니다. 진수와 성찬은 엄마를 사랑하면서도 각자의 삶에 찌들어 마음만큼 효도하지 못했다고 후회도 하고, 서로 탓하며 갈등을 빚기도 합니다. 모두 현실에 있을 법한 가족의 모습입니다.
이 뮤지컬에는 웃음이 빵빵 터지는 장면이 많습니다. 일인다역을 맡은 배우들의 능청맞은 연기는 보는 재미를 더합니다. 춘자 씨가 만나는 영혼의 물고기, 파리 떼들 같은 환상 세계의 존재들은 마치 애니메이션에서 튀어나온 듯한 느낌입니다. 7살 아이로 돌아간 춘자 씨가 유치원생을 따라다니고, 깡충깡충 뛰며 노래하는 장면에선 폭소가 터집니다.
이 뮤지컬에는 눈물 나는 장면이 많습니다. 길을 잃고 헤매다가 정신이 돌아온 춘자 씨가 늙는다는 것과 죽음에 대해 노래할 때 관객도 함께 눈시울을 붉힙니다. 소원을 잊어버렸다고 답답해하던 춘자 씨가 드디어 소원을 기억해 내고 십자가 앞에 108배를 하며 비는 장면에서는 그야말로 눈물샘이 터져버립니다.
뮤지컬 '빨래' 원조 서나영, 70세 7세 넘나드는 춘자 씨로
고춘자 역할을 맡은 배우 서나영 씨는 70세 노인과 7세 아이, 100세의 영혼까지 넘나드는 변화무쌍한 연기로 관객을 단번에 상황에 몰입하게 합니다.
"저희 아버지가 치매를 오래 앓으시다가 2023년에 돌아가셨거든요. 그래서 아버지 생각도 많이 나네요. 저희 고모도, 이모도 약간 치매가 있으시고, 그래서 많이 관찰하고, 김혜자 선생님, 나문희 선생님이 치매 연기 하신 영화나 드라마도 열심히 봤어요. 그런데 참 쉽지 않더라고요. 영화와는 달리 이 작품에서는 계속 변화해야 하고, 공연예술이다 보니 힘도 있어야 되고, 아무래도 그냥 힘 빼고 계속 있을 수가 없고, 에너지가 전달이 되어야 하거든요. 그런 걸 결정할 때 쉽지 않았던 것 같아요."
서나영 씨는 늙는다는 것은 인생에서 누구나 겪는 일이고, '어느 순간 이게 나의 얘기가 되고, 꼭 캐릭터의 말이 아니라 나의 말이 된다'면서, 진심이 스며든 연기의 무게를 드러냈습니다. 또 친구인 오미영 씨가 이 작품을 어떤 심정으로 얼마나 소중하게 썼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에 잘해야 된다는 부담도 더 컸다고 했습니다.
(알고 보니 두 사람은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을 함께 다녔고, 졸업 작품 '빨래'에 각각 서나영과 희정 엄마 역으로 출연했던 인연이 있습니다. 지금도 사랑받는 뮤지컬 '빨래'의 주인공 서나영이 배우의 이름을 따서 만들어진 캐릭터였다는 것도 처음 알았네요.)
특수효과 없이도 된다... 무대의 매력
오미영 씨는 어린아이와 노인을 넘나든다는 점에서 춘자 씨가 굉장히 도전적인 역할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이상한 나라를 오고 가는 판타지를 배우 한 명의 연기로 다 해결해야 한다는 게 큰 부담이었던 것 같아요. 물고기 코딱지를 먹고 7살이 되고, 파리똥을 먹고 100살이 되고, 이런 장면들이 장치적으로는 코딱지나 파리똥이 있지만, 그걸 먹고 어떻게 변화했다는 건 배우가 몸으로, 연기로 다 해결해야 하는 거잖아요."
"그러네요. 영화였다면 뭔가 특수 효과를 썼을 수도 있는데, 그걸 순전히 다 배우의 연기로써만 표현해야 하는 거니까요."
그러고 보니 이게 무대에서만 느낄 수 있는 재미요 매력이라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무대 위에서 좀 전에는 70살이었던 배우가 아무런 분장이나 의상 변화 없이도 금방 7살이 되어버린다는 설정을 위화감 없이 받아들이게 되는 거잖아요. 배우의 연기에 관객의 상상력이 더해지면 뭐든 가능한 '놀이'와도 같습니다.
개그맨 김준현, 가장 진지한 역할입니다
자신의 뮤지컬 데뷔작으로 이 작품을 택한 김준현 씨의 연기도 정말 인상적입니다. 큰아들 진수 역을 맡은 그는 노래 실력도 좋지만 삶에 찌든 중년 가장의 모습을 정말 잘 표현하더라고요. 코믹한 장면도 물론 잘 소화하지만, 그가 가족의 아픈 사연을 노래할 때 관객도 함께 진한 슬픔에 잠기게 되죠. 김준현 씨가 이 뮤지컬에 얼마나 '진심'인지 느껴져요.
저는 '유명인'인 김준현 씨가 150석 소극장의 창작 뮤지컬 신작에 기꺼이 출연하게 된 사연이 궁금했습니다. 원래부터 인연이 있었을까요? 아니라고 합니다. 전혀 모르는 사이였지만 오미영 씨는 '개그맨 김준현이 뮤지컬에 관심 있다'는 얘기를 듣고 무작정 이메일을 보냈다고 했습니다.
"뮤지컬을 만약에 하신다면 개그맨이니까 재미있는 역할들을 제안받으시겠지만, 제가 제안드리고 싶은 역할은 저희 작품에서 가장 진지한 K-장남 역할입니다. 이렇게 연기 변신하시는 게 어떨까 제안을 드리고 싶습니다. 저희는 스타 캐스팅을 할 수 있을 만한 큰 단체는 아니고, 기금 받아서 공연 준비하고 있는 극단 '오징어'일 뿐이지만, 팬으로서 대본이 닿을 수 있게 된 건 영광이니 대본이랑 음악 좀 들어봐 주세요, 이렇게 간곡히 부탁드렸죠."
김준현 씨는 대본을 다 보기도 전에 이 뮤지컬의 첫 넘버인 '소, 원하는 대로 다 돼지'에 딱 꽂혔다고 합니다. 이 곡이 그가 딱 좋아하는 스타일이었다고 하죠. 이 뮤지컬의 음악은 오미영 씨와 오래 협업해 온 작곡가 노선락 씨가 맡았습니다. 처음엔 음악에 꽂혀 이 뮤지컬에 합류한 김준현 씨는 곧 진지한 'K-장남' 진수 역할에 푹 빠져들었습니다. 김준현 씨는 이 공연이 끝나는 6월 1일까지, 매주 2회 계속 출연합니다.
몰랐어, 늙는다는 게 이렇게 슬픈 일인지
김준현 씨가 녹음한 이 뮤지컬 넘버 '몰랐어'를 들어보시면 좋겠습니다. 원래는 고춘자가 부르는 곡인데, 그가 맡은 캐릭터인 진수의 대표곡에는 '스포일러'가 있어서 대신 이 곡을 녹음했다고 합니다. 앞서 말씀드렸던 늙어간다는 것과 죽음에 관한 곡입니다. 공연 다 보고 나와서도 오래오래 기억에 남는 가사와 멜로디였어요.
몰랐어. 늙는다는 게 이렇게 슬픈 일인지.
몰랐어. 늙는다는 게 이렇게 아픈 일인지.
밥보다 약이 많고 약보다 한숨이 많아.
낮에는 꾸벅꾸벅 밤에는 말똥말똥.
울 때는 눈물이 안 나고 웃을 때 눈물이 나
음식은 들어가는 것보다 끼는 게 더 많아.
겁이 나 너무 오래 살까 봐.
무서워 죽는다는 게
두려워 애들 고생할까 봐
외로워 혼자 살아남은 게.
허무해 이렇게 끝나는 것이.
지루해 매일 매일 매일이
아쉬워 마지막 달력 한 장처럼
쓸쓸해 음 소거한 TV처럼.
서나영 씨가 극 중에서 부른 '몰랐어'도 뭉클했는데, 김준현 씨 노래도 좋네요. 오미영 씨가 부모님을 보면서 일상 속에서 길어낸 대사들이 마음에 콕콕 박힙니다. 섬세한 관찰력과 언어 감각, 톡톡 튀는 유머가 탁월한 작가입니다. 이전 작품인 '식구를 찾아서' '한밤의 세레나데'에서도 그랬지만, 젊은 여성들이 주관객인 뮤지컬은 남성 배우들이 중심이 되는 경우가 많은데, 오미영 씨는 여자배우들이 중심 역할을 맡는 가족 이야기에 천착해 왔습니다.
이 작가의 세계에는 빌런이 없다
오미영 씨의 작품에는 '빌런'이 없는 것도 특징인데요, 때로 찌질하고 욕심도 부리지만 결코 악당은 아닌 보통 사람들이 나옵니다.
"누가 그러더라고요. 빌런이 작가의 세계에 없는데, 굳이 쓰려고 애쓰지 않는 게 좋을 것 같다고요. 사실 빌런이 있어야 갈등도 있고 이야기가 더 다이내믹해지니까 노력을 안 했던 건 아닌데 잘 안되더라고요. 그런데 빌런 없어도 재미있으면 되지, 현실에도 빌런이 많은데 극장까지 와서 꼭 빌런을 봐야 하나? 그런 생각이 어느 날 들더라고요."
빌런이 없어도 흥미진진한 '이상한 나라의 춘자 씨'는 관객을 웃기고, 울리고, 눈물 흘리며 웃게 만들다가, 드디어 춘자 씨와 가족이 다시 만나면서 막이 내립니다. 그런데 공연이 끝나고 나서 보너스가 더 있더라고요. 무대 후면에 에필로그 영상이 펼쳐지는데, 마치 영화 엔딩 타이틀 올라가고 나서 상영되는 쿠키 영상 같은 느낌입니다. 그러고 보니 '소, 원하는 대로 다 돼지'에서 시작된 이 뮤지컬은 '춘자 씨와 그 가족들이 소원하는 대로 다 되는' 이야기였습니다.
시간이 얼마 안 남았다, 더 열심히 사랑하자
오미영 씨는 이 작품이 치매를 소재로 하고 있지만 결국 '늙어가는 것'에 대한 이야기라고 했습니다. 뮤지컬 주 관객층인 20-30대 여성뿐 아니라 다양한 관객들이 보기를 바라면서 공연을 만들었다고 했는데요, 실제로 제가 공연을 본 날 객석에는 남성과 중장년층 관객들도 꽤 많았습니다. 관객들이 어떤 메시지를 마음에 담고 돌아가기를 바라는지 물었습니다.
(남은 이야기는 스프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