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24일 헌법재판소의 탄핵심판 기각 결정으로 직무에 복귀한 한덕수 대통령 권한대행은 곧장 정부서울청사로 들어서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오후에는 정말 큰 산불로 인해서 고통을 받고 계신 분들을 뵙고… 제가 직접 손으로 위로의 편지를 전해드릴 것입니다."
- 지난달 24일, '헌재 탄핵 기각 결정 후 정부서울청사 출근길 발언' 중
한 권한대행은 복귀 당일 오후에 곧바로 경북 의성 산불 피해 현장을 찾아, 이러한 손편지를 전달했다고 국무총리실은 밝혔습니다. 당시 한 권한대행의 손편지 공개 요청에 대해 총리실의 한 인사는 "총리님(한 권한대행)이 정치인도 아니고 무슨 편지 공개냐"라고 머쓱해하며 손편지 내용 공개를 조심스레 거절했습니다.
대정부 질문 불참하고 호남행…이번엔 손편지 공개그때로부터 22일 지난 어제(15일), 한 권한대행은 현대기아차 광주 공장을 방문했고, 이후 인근의 시장을 찾으려다 시간상 불발되자 총리실 직원들을 통해 상인들에게 손편지를 간접적으로 전달했습니다. 그리고 3주 전 산불 현장 방문 당시와 달리, 그 편지 내용을 공개했습니다.
"김윤경 사장님께. 어머님이 시작하신 1000원 백반 식당을 따님이 뒤를 이어 15년째 운영하고 계시다고 들었습니다. 꼭 한 번 뵙고 싶었는데 일정이 여의치 않아 멀리서 감사 말씀만 전하고 갑니다. 시장 다른 점포 사장님들도 많이 도와주신다고 들었습니다. 대인시장과 해뜨는식당 모두 건승하셨으면 합니다. 대통령 권한대행 국무총리 한덕수 드림."
겉으로 보면, 정치적 메시지로 읽힐 만한 내용은 담겨 있지 않습니다. 문제는 한 권한대행 차출론·출마설이 불거지는 시점이다 보니, 이러한 행위를 놓고 정부 안팎에서 갖은 해석들이 나오고 있습니다. '예민한 시기에 대정부 질문 참석 대신 호남으로 광폭 행보를 했다'라거나 '대선 출마 등을 염두에 두고 호남 민심을 고려해 손편지를 공개한 것 아니냐'는 식의 분석들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취재를 종합해 보면, 어제(15일) 한 권한대행이 손편지를 공개하게 된 건 주변 참모들의 판단과 건의가 일정 부분 받아들여진 것으로 보입니다. 평소 같았으면 '정치인도 아니고 무슨 편지를 공개하느냐'라고 거절했을 법한데, 총리실은 어제 늦은 오후 기자단에 해당 손편지를 제공했습니다. 한 권한대행이 직접 쓴 손편지를 공개한 데 대해 총리실 참모들은 "지방 일정 시 메인 이벤트 후에 인근 소상공인 업체를 찾곤 했다"며 "지난달 28일 국립현충원 내 나눔의집을 찾아 자원봉사자들을 격려한 것과 같은 취지"라고 설명했습니다.
불출마 선언한 황교안…불출마 선언 않는 한덕수대통령 권한대행으로서 대통령 선거 출마설에 오르내린 건 한 권한대행뿐만이 아닙니다. 노무현 전 대통령 탄핵심판 도중 짧게 출마설이 불거졌지만 선을 그었던 고건 전 국무총리와 박근혜 전 대통령 파면 후 출마설이 불거졌지만 불출마를 선언한 황교안 전 국무총리가 있습니다.
이들 두 전직 국무총리와 한 권한대행의 차이점이라면, 한 권한대행은 명확한 의중을 드러내지 않고 있다는 점입니다. 취재진이 '불출마 선언 계획은 없느냐'고 총리실 참모들에게 물어보면 '당초 대선 주자도 아니었고 출마 의중을 먼저 드러낸 적도 없는데, 대뜸 불출마 선언을 하는 것도 모양새가 안 맞지 않느냐'는 취지의 답변이 돌아옵니다.
한 정부 고위 관계자는 현 상황과 관련해 "한 권한대행이 내적 갈등을 겪는 것으로 보인다"고 짧게 설명했습니다.
트럼프 '대선 출마' 질문에 "고민 중" 답한 한덕수명확한 불출마 선언을 하지 않으면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통화 당시 대선 출마 여부에 대한 질문에 '아직 결정된 바 없고 고민 중'이라고 답한 점 또한 무성한 해석을 낳고 있습니다. 해당 발언이 보도된 데 대해 한 권한대행은 짧게 탄식을 내뱉으며 긍정도, 부정도 안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특히, 국민의힘을 중심으로 제기되는 '한덕수 차출론'이 가라앉지 않고 있는 데다 민주당에선 하루빨리 명확한 입장을 정하라고 공세를 높이고 있는 터라, 한 권한대행의 스탠스가 '애매모호한 것 아니냐'는 지적이 줄곧 제기됩니다. 이에 대해 정부 관계자는 "지금 시점에서 당장 대선 출마 여부를 밝히는 것은 적절치 않아 보인다. 아직은 좀 시간이 남아 있지 않느냐"는 반응을 보였습니다.
하지만, 선수로 뛰어야 하는 국민의힘 대선 주자들 입장에서는 '맥이 빠지는 게 사실'이라거나 '대선 관리에 집중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의견이 나오고 있습니다. 만약, 한 권한대행이 공직자 사퇴 시한인 5월 4일 전에 출마 여부를 밝히고 출마하느냐 불출마하느냐에 따라 국민의힘과 민주당의 이른바 '빅텐트론'이 출렁일 수 있는 만큼 모두가 한 권한대행의 언행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습니다.
한덕수 지지율, '반사이익'은 아닐까리얼미터가 에너지경제신문 의뢰로 실시한 <차기 대선 후보 적합도 조사>(4월 9∼11일 전국 18세 이상 유권자 1천506명, 95% 신뢰 수준에 표본 오차 ±2.5%포인트, 무선(100%) 자동응답 방식, 응답률 4.7%. 자세한 내용은 중앙선거여론조사심의위원회 홈페이지 참조)에서 한 권한대행의 지지율은 8.6%를 기록한 것으로 나타나 있습니다. 총리실에서는 여론조사에서 한 권한대행을 제외해 달라는 별도 요청은 하지 않을 계획인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공교롭게도 현재까지 행보만 놓고 보면, 어딘가 묘한 기시감이 있습니다. 지난 2020년 하반기, 윤석열 전 대통령이 검찰총장 시절 월성 1호기 경제성 평가 조작 의혹 수사를 본격 지휘하며 문재인 당시 정부와 각을 세우던 때, 그리고 추미애 당시 법무장관의 징계 처분에 반발하며 몸집을 키워나가던 상황이 떠오릅니다. 당시 법조계 안팎에서는 윤 전 대통령이 '대립'이라는 매커니즘을 통해 일종의 반사이익을 키워가는 모양새가 아니냐는 평가가 나왔습니다. 행간에는 온전한 지지세가 아닐 수 있기 때문에 독이 든 성배일 수 있다는 의미도 담겨 있었습니다. 당시 윤 전 대통령은 대검 대변인실을 통해 여론조사를 실시한 기관 등에 자신을 제외해달라는 요청을 했다가 거절당한 바 있습니다.
물론 한 권한대행은 당시 '윤석열 검사'처럼 수사를 매개체로 대립각을 세우고 있지는 않지만 마은혁, 조한창, 정계선 세 헌법재판관 후보자 임명을 보류하다가 지난해 12월 말 탄핵소추됐고 이어서 지난 8일에는 이완규 법제처장과 함상훈 서울고법 부장판사를 대통령 몫 헌법재판관 후보자로 지명하며 권한대행으로서 할 수 있는 최대 권한 행사라는 수를 뒀습니다. 민주당 등과 뚜렷한 대립각을 세운 상태입니다. 한 권한대행 주변에서도 '의외였다'는 반응이 나오고 있습니다.
한 권한대행이 이들 두 후보자를 임명하려면 ① 국회가 임명동의안을 제출받은 날로부터 20일 이내에 심사 또는 인사청문을 마쳐야 하고 ② 부득이한 사유로 20일 이내에 마치지 못하면 대통령이 10일 이내로 국회에 인사청문경과보고서 송부를 요청한 뒤 국회가 송부하지 않으면 임명할 수 있습니다. 때문에 한 권한대행이 출마하지 않은 채 5월 4일 공직자 사퇴 시한 이후에 임명을 강행하는 경우의 수가 있고, 반대로 출마하게 될 경우 이완규, 함상훈 후보자에 대한 임명 여부는 부총리 등에게 넘겨야 하는 등의 상황이 펼쳐질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