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매튜 월서는 가톨릭 문예지 더 램프(The Lamp)의 편집자이자, 뉴욕타임스 오피니언 필진이다.
1711년 발간된 글에서 조너선 스위프트는 "런던 커피하우스의 메아리를 왕국의 목소리로 착각하는 사람들의 어리석음"을 통탄했다. 스위프트에 따르면 '커피하우스'로 불리던 비공식적 살롱의 이용객은 영국 중앙은행이나 동인도회사, 또는 "기타 회사"의 주식으로 부를 쌓은 이들이었다. 트럼프 정부 관세 정책에 대한 반응으로 우리가 알게 된 것이 있다면, 주주와 국가를 혼동하는 곤란한 경향이 여전히 남아있다는 것이다. 그 옛날 스위프트가 지적한 병폐와 다를 바가 없다.
오늘날 미국 사회의 가장 뚜렷한 경계는 소위 공화당을 지지하는 '붉은 주'와 민주당을 지지하는 '푸른 주', 도시와 시골 사이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 경계는 바로 주식을 소유한 이와 소유하지 않은 사람 사이에 존재한다. 주식을 가진 이들에게 경제적 안정이란 투자 포트폴리오를 통해 측정하는 것이다. 반면 전체 미국인의 40%에 해당하는 나머지 사람들은 주거 비용이나 달걀 가격 같은 낡은 지표로 경제적 안정을 파악한다.
이런 구분은 단순히 경제적인 문제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이념적인 것이기도 하다. 많은 미국인이 주식을 조금이라도 가지고 있기는 하지만, 단 10%가 주식의 93%를 소유하고 있다. 그런데도 주식을 갖고 있는 엘리트 계층은 S&P 500 지수에 좋은 것이 곧 미국에 좋은 거라고 확신한다. 설상가상 은퇴 자금이나 연금 계획의 일환으로 주식을 보유한 많은 미국인이 그렇게 믿고 있다. 자신들의 이해관계가 백만장자들의 이해관계와 깔끔하게 일치하지 않는 것이 엄연한 현실인데도 말이다.
그 결과 주주의 즉각적인 이익에 부합하지 않는 정책은 무모하거나 급진적인 정책, 경제 문맹 정책으로 치부된다. 일종의 이데올로기적 포획이다. 공동선이라는 개념을 아예 내다 버릴 수는 없으니, 단어는 남겨두되 그 뜻은 시장 수익률이라는 언어로 번역된다. 주가를 올리지 못하는 것이 '선하다'고 할 수 있을까? 이런 질문을 하는 이들은 대개 질문 속에 이미 답이 있다고 주장한다.
델피의 신탁을 떠받드는 참배객처럼 우리는 다우존스와 S&P 500 지수를 엄숙한 마음으로 신뢰하며, 반쯤은 무작위적인 지수의 변동을
또는 진노의 암시처럼 받아들인다. 도널드 트럼프를 포함한 모든 대통령이 그 제단 앞에서 절을 하고, 우리 대부분이 월 스트리트라는 위대한 신의 기분을 거스르는 정책을 암묵적인 신성 모독으로 간주한다. 주식시장은 우리 공동체의 안녕을 결정하는 최후의 중재자다.
그러나 주식시장의 호황과 미국 사회의 건강은 동의어가 아니다. 심지어 경제 상황을 반영하는 지표로서 늘 특별한 가치를 갖지도 않는다. 주식시장을 지금과 같이 취급하다 보니 실제 물질적인 현실을 잘 파악할 수 없게 됐을 뿐 아니라, 광범위한 번영과 부의 최상위 집중을 구분할 수 없게 됐다. 1990년 4월, 다우존스 산업평균지수는 2,710을 기록했다. 지난 일주일 반 동안의 끔찍한 상황 전개에도 불구하고 다우존스는 현재 40,200을 기록 중이다. 우리가 35년 전에 비해 실제로 약 15배 부유해졌다고 믿는 사람이 있을까? (마찬가지로 논란의 여지가 있는 지표인) 국내총생산만 살펴봐도 35년 전보다 5배 더 늘었을 뿐인데 말이다.
대안으로 활용할 수 있는 지표를 고려해 보자. 1970년에는 가구당 중위 소득이 9천 달러가 채 안 됐다. 신차 가격은 약 3,400달러, 주택 평균 가격은 2만 6천 달러였다. 오늘날 중위 소득은 8만 달러지만, 신차 가격은 4만 9천 달러, 주택 평균 가격은 40만 달러가 넘는다.
이런 수치들도 사실 전체 그림을 보여주지는 못한다. 반세기 전 중위 소득은 일반적으로 외벌이 근로자의 소득을 의미했고, 자동차 가격은 좀 비싸도 결국 미국 기업의 노동조합원에게 지급하는 괜찮은 급여가 결국 자동차 판매에서 나왔다는 점을 생각해야 한다. 반면 오늘날은 대부분 맞벌이 가구고, 상당수의 자동차와 트럭이 비노조 근로자가, 그마저도 대부분 해외에서 만든다.
이런 사례를 고려할 때는 또한, 이른바 '긱 워크(gig work)'라고 하는 플랫폼 노동과 임시직의 확산, 주택의 투기 자산화, 준합법 대마초 사업의 부상, 월급날 대출 및 온라인 도박의 확산, 독서의 감소, 디지털 커뮤니케이션 기술의 확산에 따른 집중력 저하 등 쉽게 수치화하기 어려운 다양한 사회적 병리 현상을 함께 생각해야 한다. 이 모든 것이 어떤 의미에서는 "시장에 좋은 일"이었기 때문이다.
탈냉전 이후 미국인들은 경제적 의사 결정에 가치 판단이 개입되지 않는다고 확신해 왔다. 정책이 주식시장에 도움을 줄 때 우리는 그것이 거스를 수 없는 자연의 법칙이라고 믿게 됐다. 하지만 주주 가치 증대는 여러 목표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 국내 철강 생산량을 늘리는 것도 하나의 목표가 될 수 있다. 출세 지향적 '노트북 직종'을 원하는 중하위 계층이 숙련기술직을 갖도록 하는 것도 하나의 목표일 수 있다. 이 모든 사안 역시 규제나 민영화 못지않은 정치적 결정이다.
실질 임금이 정체되고, 주택 구입이 요원해지고, 인프라가 무너지는 상황에서 주식 시장의 호황이 번영의 증거가 될 수는 없다. 그렇기 때문에 금융 애널리스트나 싱크탱크 관계자, 영원히 불만을 품은 트럼프 반대파가 "경제"에 대한 타격을 우려할 때 우리는 이를 비판적인 시선으로 바라봐야 한다. 이들이 우려하는 것은 정확히 무엇인가?
(남은 이야기는 스프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