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원조 한류 가수 계은숙
외교부가 오늘(28일) 비밀 해제한 1994년 외교 문서에는 가수 계은숙이 '디너쇼'에서 일본 가요를 부르는 문제를 놓고 정부 내에서 갑론을박을 벌인 흔적이 남아있습니다.
1979년 데뷔 후 이듬해 MBC 10대 가요제에서 신인상을 받은 계은숙은 1982년 돌연 일본으로 떠나 1990년대까지 일본에서 최고 가수 중 한 명으로 꼽혔던 '엔카의 여왕'입니다.
발단은 당시 일본 최대 여행사 중 하나인 교통공사(JTB)가 1994년 2월 서울 롯데호텔에서 그의 디너쇼를 기획한 것이었습니다.
일본인 관광객 800명을 관객으로 기획한 공연이었던 만큼 주최 측은 계은숙이 일본 가요를 부를 수 있도록 정부에 허가를 요청했습니다.
하지만 당시 정부는 과거사 문제 등 주요 현안이 해결되지 않은 상태에서 국민 정서를 자극할 수 있다며 일본 대중문화 유입을 막고 있던 터였습니다.
국내 가수가 일본 가요를 공연하거나 일본어로 노래를 부를 수 없었고, 일본 가요를 한국어로 번역해 부르는 것도 허용하지 않았습니다.
주일대사관은 일단 "국민 감정을 고려해가면서 신중히 대처해야 할 사안"이라면서도 1994년 '한국 방문의 해' 성공과 해외 여행 자유화 이후 적자로 돌아선 여행수지 개선을 위해 일본인 관광객 유치가 필요하다며 "긍정적 검토되어야 할 것"이라는 의견을 본부에 전달했습니다.
외교부 내에서는 견해가 엇갈렸습니다.
한일 관계에 초점을 맞춘 아주국은 "국민 대일 감정에 직결되는 사항"이라며 사안을 잘못 다룰 경우 반일 감정을 부추기는 악재로 작용할 수 있다고 신중론을 폈습니다.
김영삼 정부 출범 후 처음 열린 1993년 한일 정상회담을 계기로 새롭게 구축해나가는 양국 관계의 좋은 분위기를 깨뜨릴 수 있다는 의미였습니다.
반면 문화협력국은 '일본인 한정' 행사라는 점에서 전향적 의견을 냈습니다.
디너쇼가 국민 감정에 대한 직접적 충격은 최소화하면서 일본 대중문화를 받아들일 수 있는지 시험해 볼 계기로 활용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당시 김영삼 대통령이 방일을 앞둔 시점이었는데 "협상 카드로 활용할 수 있을 것"이라는 주장도 나왔습니다.
최종적으로 당국은 디너쇼의 일본 가요 가창은 불허하는 대신 가을에 일본 대중문화 행사 하나를 허용하는 1안과, 일본 가요 곡 수 제한 및 국내 가요 병행 가창을 전제로 디너쇼를 허용하는 2안을 놓고 저울질하다 후자를 택했습니다.
관광객만을 대상으로 하는 디너쇼를 불허하면 정부가 과도하게 개입한다는 인상을 주어 문민시대의 자율화 추구에 역행하는 것처럼 비칠 수 있다는 등의 의견이 검토 과정에서 힘을 얻은 것이었습니다.
(사진=EMI·외교부 제공,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