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 딜런 전기 영화의 개봉을 기다려왔지만, 주연을 맡은 티모시 샬라메에 대한 기대는 거의 없었다.
오히려,
밥 딜런 역을 왜 티모시가 하지? 너무 안 붙잖아
라는 생각만 들었을 뿐이다. 영화 포스터가 공개됐을 때까지도 이런 생각은 변함이 없었다. 아무리 티모시가 어수룩한 척 뽀글머리를 하고 포스터에 나타난다 한들 그건 -우리 모두가 아는 바로 그 힙한- 티모시 샬라메일뿐이라는 확신만 더 커졌다.
하지만 영화 《컴플리트 언노운》(A Complete Unknown)을 본 뒤 생각이 바뀌었다.
우유 빛깔 티모시가 이렇게 연기를 잘 해도 되는 거야? 게다가 노래까지 이렇게 잘 하다니...
(뮤지컬 영화인 “웡카”때보다도 훨씬 낫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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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으로부터 14년 전인 2011년 10월 5일, 스티브 잡스가 56세로 타계했다. 그가 아이폰을 출시해 세상을 영원히 바꾼 지 채 5년도 지나지 않았던 때였다. 나는 당시 주간 뉴스매거진 제작 부서에서 일하고 있었는데, 방송일이 일주일도 안 남은 시점에 스티브 잡스가 갑자기 타계하는 바람에 팀에 비상이 걸렸다. 내 순번은 아니었지만 나는 ‘스티브 잡스 오비추어리’(obituary) 리포트를 맡겠다고 자청했다. 며칠을 숨 가쁘게 취재하고 인터뷰를 다니면서 원고를 썼는데, 이 기사의 마지막만큼은 잡스의 육성으로 끝내고 싶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잡스의 연설 중 가장 유명한 건 2005년 스탠포드대 졸업식 연설 ‘스테이 헝그리, 스테이 풀리시’(stay hungry stay foolish)지만, 그 말을 인용하는 것은 -항상 ‘think different’를 외쳤던- 잡스의 부고 기사에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대신 나는, 잡스가 불과 29살 때 했던 애플 주주총회 연설을 넣고 싶었고, 그렇게 했다.
1984
년 1월에 열렸던 그 주주총회는 스티브 잡스가 PC의 새로운 시대를 연 ‘매킨토시’를 처음으로 공개하는 현장이었다. 그때만 해도 말쑥하게 수트를 빼입은 스티브 잡스는 연단에 오르더니 느닷없이 어느 가수가 부른 노래의 가사를
자신만만하게
읊어 내려갔다. 그 가수는 스티브 잡스의 우상으로 알려진 밥 딜런이었다. 그 노래는 1964년 ‘뉴포트 포크 페스티벌’에서 밥 딜런이 불렀던 ‘세상이 바뀌고 있네’(The Times They Are A-Changin’)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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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컴플리트 언노운》에서 밥 딜런을 연기한 티모시 샬라메도 올해 29살이 됐다. 영화 연기의 세계에서 티모시가 거둔 성취는 29살의 스티브 잡스가 거둔 성취 못지않다. 그는 지난달 골든글로브 남우주연상을 받았고, 이번 주에는 미국배우조합상에서 최연소 남우주연상을 수상했고, 내일이면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그렇게 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 아카데미 역대 최연소 남우주연상 수상자는 2003년 “피아니스트”의 애드리안 브로디였는데, 그도 이번에 ‘브루탈리스트”로 두 번째 오스카를 노린다. (티모시 샬라메와 고등학교 동문이다)
29살 잡스가 그랬듯이 티모시 샬라메는 엊그제 미국배우조합상(SAG Awards) 시상식에서 나와
자신만만하게
수상 소감을 밝혔고, 이 수상 소감 때문에 어느 정도의 비판도 받았다. (제발 뭐든지 ‘논란’으로 끌고 가지는 말자)
티모시의 발언 요지는 다음과 같다.
“나는 밥 딜런 연기를 하기 위해 5년 반 동안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쏟아부었다. 우리는 주관이 지배하는 업계에서 일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위대함을 추구하고 위대한 인물 중 한 명이 되고 싶다. 나는 다니엘 데이 루이스(최초의 아카데미 남우주연상 3회 수상자), 말론 브란도, 비올라 데이비스만큼 마이클 조던, 마이클 펠프스에게도 영감을 받았고, 그들과 같은 위치에 올라서기를 원한다.”
일부 대중은 티모시에게 겸손과 품위가 부족하다고 비난했다. 티모시도 자신의 발언이 그렇게 비칠 수도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수상 소감 서두에서 자신을 낮추는 것이 품격 있는 행위라는 건 자신도 안다고 말했다. 그러니까, 그의 수상 소감은 작정하고 한 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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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컴플리트 언노운》은 무명의 밥 딜런이 대중 스타가 되는 과정을 그리지만, 그가 대중으로부터 이해받지 못하는 풍경도 그린다.
대중들은 제각각 그들 마음대로
밥 딜런을 규정하려 했고
, (“이 방의 200명 모두가 제각각 다른 나를 원해”)
포크 음악을 규정하려 했고
, (“뭐가 포크 음악이고 뭐가 포크 음악이 아닌지 결정하려는 사람들은 내가 원하는 음악을 듣고 싶어 하지 않아”),
그의 재능을 질투했다
. (“어디서 노래의 영감을 받았냐고 묻는 사람들의 표정을 보면, ‘그게 왜 너한테는 가고 나한테는 안 왔냐’고 묻고 있는 거야”)
1965년 ‘뉴포트 포크 페스티벌’ 무대에 밥 딜런이 통기타 대신 전기 기타와 록 밴드를 대동해서 나타나 포크 록을 부르자 일부 관객들은 쓰레기를 던지고 “유다!”라며 야유를 퍼붓는다.
밥 딜런과 친한 페스티벌 관계자들도 포크 음악은 “민중에 의한, 민중을 위한 음악”이라며 정신 차리라고 밥 딜런을 쏘아붙인다. 하지만 밥 딜런은 야유 속에서도 꿋꿋이 노래를 이어간다. 스티브 잡스는 이런 요지로 말한 바 있다. ‘만들어 보여주기 전까지는 사람들은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모른다’고. (《브루탈리스트》에서 애드리안 브로디는 사람들에게 정육면체를 설명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정육면체를 만들어 보여주는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1965년 뉴포트 포크 페스티벌에서 밥 딜런이 야유를 받으며 불렀던 ‘라이크 어 롤링 스톤’(Like a Rolling Stone)은 포크 록의 시작을 알리는 노래로서 대중 음악 사상 최고의 명곡으로 평가 받는다. 그리고 훗날 이 노래 가사를 비롯한 수많은 명가사에 힘입어 밥 딜런은 2016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하게 된다.
밥 딜런은 1963년 마틴 루터 킹의 ‘워싱턴 대행진’ 무대에서 노래를 불러 유명한 저항 가수, 민권 운동의 기수로 떠올랐고 한국의 포크 씬에도 지대한 영향을 끼친 가수지만, 어떤 식으로든 자신을 하나의 ‘무엇’으로 규정하는 것에 대해서는 질색했다. 사회파 가수이면서도 자신은 저항 가요를 쓰지 않는다고 하거나, 자신은 좌파가 아니며 혼자 걷고 혼자 서는 음유 시인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캐롤》의 토드 헤인즈 감독이 밥 딜런을 다룬 영화 《아임 낫 데어》(I'm not there, 2008)에서는 크리스천 베일과 리처드 기어 등 무려 여덟 명의 배우가 밥 딜런의 여러 페르소나를 연기할 정도다. 하지만 《컴플리트 언노운》에서는 티모시 샬라메 혼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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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티브 잡스 부고 리포트’를 위해서 나는 마지막 인터뷰를 하러 김영세 디자이너(애플의 아이팟에 앞서 출시된 세계 최초의 MP3 플레이어 ‘아이리버’를 디자인했다)에게 갔었다. 인터뷰 말미에 물었다.
-아무리 스티브 잡스라 해도 단 한 사람 때문에 이런 큰 변화가 왔다고 볼 수 있나요? 전 그렇게 믿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면 제가 거꾸로 질문할게요. 이 세상에 피카소가 몇 명 있습니까?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몇 명 있습니까? 마이클 잭슨이 몇 명 있습니까? 우리나라가 잘못 이해하고 있는 부분 중 하나는 한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 이렇게 엄청나다는 것을 자주 인정하거나 토론하지 않는다는 점이에요.
티모시 샬라메가 수상 소감에서 밝힌 ‘위대한 인물’(“The Greats”) 명단에 스티브 잡스와 밥 딜런을 추가한다고 해서 뭐라 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티모시도 언젠가는 그 명단에 합류하기를 원한다.
《인터스텔라》에 출연했을 때 자신의 역할이 생각보다 별 볼일 없었다고 느껴 시사회를 마치고 집에 돌아와 울먹이던 소년이 《콜 미 바이 유어 네임》, 《작은 아씨들》, 《듄》 등을 거쳐 2020년대를 대표하는 대형 스타 배우로 발돋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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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컴플리트 언노운》은 미네소타의 촌뜨기였던 밥 딜런이 기타 하나 달랑 메고 뉴욕에 와서 포크의 왕으로 우뚝 서기까지의 5년을 그린다. 티모시 샬라메는 이 5년을 위해 실제로 5년이라는 시간을 들여 준비했다고 한다. 세월이 흘러 변하면서도 변하지 않는 밥 딜런의 모습을 티모시 샬라메는 설득력있게 그려낸다. 노래와 기타, 하모니카 연주도 직접 라이브로 해냈다. 이 영화의 오리지널모션픽처사운드트랙에 실린 23곡의 곡 중 밥 딜런이 불렀던 17곡은 모두 티모시 샬라메가 직접 불렀다.
1964년의 ‘뉴포트 포크 페스티벌’에서 밥 딜런(티모시 샬라메)과 존 바에즈(모니카 바바로)가 듀엣으로 부르는 ‘It ain’t me, Babe’를 무대 뒤에서 듣고 있던 당시 딜런의 애인 실비(엘 패닝)의 눈가에 그렁그렁하게 눈물이 맺히는가 싶더니 그녀는 이내 콘서트장을 떠나간다. 이 감정의 동요를 연출한 영화의 장면이 왠지 모르게 가슴 설레고 떨리게 마음속에 남아있다. 이 영화는 어찌 보면 뻔한 것을 뻔하게 보여주지만 그걸 제.대.로. 해내는 것이야말로 주류 영화가 잘 해내(야하)는 지점이다.
스티브 잡스 부고 리포트 [현장21 29회 '세상을 바꾼 남자' 31분 09초부터] ☞ https://programs.sbs.co.kr/culture/indepth21/vod/53225/220000754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