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쏟아지는 콘텐츠 홍수와 나도 헷갈리는 내 취향, 뭘 골라야 할지 고민인 당신에게 권해드리는 '취향저격'
<캡틴 아메리카: 브레이브 뉴 월드>는 그럭저럭 즐길 만한 평작으로 여겨지는 분위기다. 최근 마블의 부진에 실망한 팬들을 달랠 신작. 새로운 캡틴의 데뷔 무대. 혹은 꽤 정치적인 작품으로도 읽힌다. 분노 조절이 어려운 대통령과 그를 제압하는 블랙 히어로의 이야기는 해석하기 어렵지 않은 메타포다.
그러나 이런 반응을 볼 때, 한 가지 아쉬움을 느낀다. 이 작품은 기저에 중요한 메시지를 고이 각인해 두었는데, 이 부분에는 영 관심이 모이질 않는다. 하지만 우리는 영화가 전하고픈 이야기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여기에 앞으로 마블 시리즈의 향방을 예고하는 힌트가 숨어있기 때문이다. 아래부터 <캡틴 아메리카: 브레이브 뉴 월드> 결말에 대한 스포일러가 있으니 유의해서 읽어주기를 바란다.
영화가 시작되면, 첫 번째 주제가 제시된다. 그것은 바로 '증명'이다. 너 자신을 증명하라. 너의 위치에 어울리는 사람임을 입증하라. 영화에 나오는 인물들은 한결같이 묵직한 압박에 시달린다.
초반에 등장하는 성당 액션신은 제법 잘 연출된 장면이다. 신성한 예배당에서 거친 격투가 벌어진다. 이때 악당은 윌슨(앤서니 매키, 새로운 '캡틴 아메리카')을 깔보는 말을 던진다. 기분 나쁠 상황이지만 그의 반응은 생각보다 담담하다. 비록 그 후에 두들겨 패긴 하지만. 이는 화려했던 1대 캡틴 아메리카 '스티브(크리스 에반스)'를 잇는 윌슨에게 주어진 숙명이다. '네가 캡틴 아메리카라고?'라는 시선을 견디는 일 말이다.
인정 투쟁에 시달리는 것은 윌슨뿐만이 아니다. 영화의 중요한 축인 로스(해리슨 포드)도 지독한 갈증을 겪는다. 그는 자신의 유산을 공고하게 구축하고 딸에게 자랑스러운 아버지로 인정받고 싶다. 여기서 중요한 질문이 도출된다. 자신을 증명하고 싶은 이는 어떤 길을 걸어야 할까? 스스로를 입증하지 못하는 순간 빠르게 탈락하는 시대에서 영화는 공감할 만한 질문을 던진다.
인정 욕구로 앓는 이가 할 수 있는 선택은 두 가지다. 자제하거나, 폭발하거나. 이 영화에서 많은 인물이 후자를 택한다. 대표적인 이는 로스다. 그가 운동을 하는 장면에서 '목표를 위해 무엇이든 하겠다'라는 내용의 노래가 흘러나온다. 과연 그 가사대로 로스는 무엇이든 한다. 자신의 업적을 위해서 윤리의 선을 넘기도 한다. 또 분노를 폭발하는 바람에 자신의 일궈온 모든 것을 잃을 뻔한 위기에 처한다.
새로운 팔콘, 토레스(대니 라미네즈)도 전투 중에 실력을 보이려고 과한 액션을 감행하다 사고를 낸다. 창공에서 낙하하는 그의 모습은 '이카로스의 신화'와 겹친다. 인공 날개를 달고 하늘을 날다가, 너무 높이 올라간 나머지 태양에 가까워져 녹은 날개와 함께 추락한 이카로스. 절제하지 못한 욕망이 가져온 비극. 이는 <캡틴 아메리카: 브레이브 뉴 월드>를 관통하는 문제의식이다.
증명하고 싶다. 더 강해지고 싶다. 이런 욕망을 빠르게 채우고 싶을 때, 영화에 등장하는 것은 '약물'이다. 인체를 순식간에 강화하는 물질. 이것을 잘 보여주는 이가 스턴스(팀 블레이크 넬슨)다. 그는 두뇌에 헐크의 피가 섞이며 높은 지능을 가진 인물로 변이한다. 여기까지는 의도가 아니라 사고다. 그러나 이후 그는 그 좋은 지능으로 범죄를 일으키고, 이때도 약물을 활용한다. 그가 로스에게 건넨 심장병 치료약 속에는 감마선이 들어있다. 또 그는 타인을 세뇌해서 범죄를 저지르는데, 이때 활용되는 음악이나 플래쉬도 일종의 약물(외부에서 투입되어 신체에 변화를 일으키는 물질)로 기능한다.
스턴스를 보면 알 수 있듯이, 이 영화는 약물에 대해 부정적이다. 약을 쓰면 빠르게 강해질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은 '수련'이 아니라 '처치'의 도구일 뿐이다. 약물은 강인한 인간이 아니라, 강력한 돌연변이를 탄생시킨다.
이것은 결국 '혈청'을 거부한 윌슨의 결단으로 이어진다. 그는 인위적인 물질 없이, 자기 모습 그대로 히어로가 되기로 결심한다. 그런 의미에서 <캡틴 아메리카: 브레이브 뉴 월드>는 윌슨이 혈청을 맞지 않는 이유에 대한 설명서라고도 할 수 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시그널인데, 히어로에 대한 일종의 패러다임 변화라고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과거 스티브는 슈퍼 솔저 혈청을 맞고 초인이 되었다. 스티브의 시대에서 혈청은 강인함과 우월함을 강조하는 도구였다. 하지만 MCU는 윌슨의 시대에 이르러 과거의 관행을 버린다. 그리고 불안을 겪을지언정 자신의 모습 그대로 히어로의 자리에 앉는 인물을 보여준다. 혈청 자체는 좋지도 나쁘지도 않다. 다만 그런 설정을 바라보는 시각과 취향에 변화가 생긴 것이다. MCU의 시대가 변하였다.
그렇다면 약물을 거부한 윌슨에게는 무엇이 남았을까. 맨몸밖에 없는 것인가. 물론 윙 슈트, 캡틴 아메리카의 방패 같은 첨단 장치도 있다. 하지만 그가 진정으로 얻은 것은 '동료'다. 고독한 싸움을 끝낸 윌슨에게 토레스는 '너와 같이 되고 싶다'는 말을 듣는다. 최고의 찬사가 아닌가. 비슷한 맥락에서 레드 헐크가 아닌 인간으로 되돌아온 로스도 딸의 애정을 되찾는다.
손쉬운 파워 대신 동료를 얻는다. 이것이 새로운 캡틴, 윌슨의 특성이자 강점이다. 그는 연대를 상징하는 히어로다. 그렇기 때문에 윌슨이야말로 '어벤져스를 재건하라'는 임무에 제격인 것이다. 묵묵한 모습으로 동료의 마음을 얻는 그는 어벤져스를 이어 붙일 만한 인물이다. 물론 재건 여부는 짐작하기 어렵지만.
(남은 이야기는 스프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