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파일] '파죽지세' 인권위, 김용현 논의만 쏙 빠진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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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죽지세(破竹之勢) : 대나무를 쪼개듯 거침없는 기세

국가인권위원회는 말 그대로 파죽지세입니다. '윤석열 대통령 방어권 보장' 권고안 의결에 이어 여인형·문상호 등 내란 공범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군 장성들의 긴급구제 안까지 속전속결 논의했습니다. 인권위 권고는 구속력을 지니지 않지만 사법 및 수사 기관이 이행 계획을 인권위에 통지해야 하는 만큼 적지 않은 영향을 끼칠 것으로 보입니다. 인권위가 비상계엄을 옹호하는 선봉에 섰다는 비판까지 제기되고 있는 가운데, 묘하게 소외된 한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김용현 전 국방부 장관

입니다.

김 전 장관은 지난 10일 인권위에 긴급구제를 신청했습니다. 헌법재판소가 진행 중인 사건 기록 사용을 중단해 달라는 등 방어권 보장을 요청하며 진정을 제기한 것으로 전해졌습니다. 김 전 장관 측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13일 여인형·문상호·곽종근·이진우 전 사령관들의 긴급구제 신청까지 대신 넣었습니다. 군사법원 등의 접견 제한과 호송 시 포승 노출은 인권침해라는 취지였습니다. 김 전 장관 측이 당사자들의 동의를 구하지 않고 제3자 진정을 제기한 것으로 알려졌는데, 문상호 전 사령관은 이에 반발하며 인권위의 진정 조사를 거부해 논란이 불거지기도 했습니다.

군 장성들 4명의 긴급구제 안건은 접수 당일 회의 일정이 잡혔습니다. 13일에 신청을 접수하고 닷새 만인 18일에 임시 군인권보호위원회를 열기로 한 겁니다. 같은 소속인 강정혜 비상임위원이 해외 출장을 이유로 부재를 예고했던 날임에도 회의를 강행했습니다. 이날 회의에선 수사나 재판 중인 사안에 대해선 진정을 각하해야 한다는 인권위법 규정에 따라 긴급구제 안건은 각하됐지만, 대신 의견을 표명하기로 결정했습니다. 바로 다음 날, 이들의 신속한 보석 허가를 적극 검토하고 일반인 접견 제한 해제 및 수갑 · 포승 사용을 제한하는 것을 권고하는 결정문을 냈습니다. 당초 신청 내용에도 없었던 '신속한 보석 적극 검토'가 담겼고, 계엄사령관이었던 박안수 전 육군참모총장까지 인권위의 의견 표명 대상에 포함됐습니다.

김 전 장관보다 더 늦게 접수된 군 장성들의 긴급구제는 이처럼 신속하게 논의됐지만, 정작 김 전 장관의 긴급구제 안건은 논의조차 되지 않고 있습니다. 김 전 장관의 안건은 침해구제1위원회로 배당돼 18일에 회의가 예정됐었는데 별다른 설명 없이 갑자기 취소됐습니다. 심지어 회의를 취소한 날 군인권보호위원회 임시회의 일정이 새로 잡혔던 겁니다. 인권위 직원들도 "이미 잡힌 회의 일정이 왜 갑자기 취소됐는지 모르겠다"는 반응이었습니다.

얼핏 의아스럽지만, 숨은 이유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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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현 긴급구제 논의, 왜 늦어지나…"미루기 작전일 수도"

군인권보호위원회와 침해구제1위원회는 모두 김용원 상임위원이 소위원장으로 있습니다. 김 상임위원은 '윤 대통령 방어권 보장' 권고안을 주도한 인물입니다. 자신의 SNS에 "탄핵이 인용되면 헌재를 부숴라"는 글을 써 파장이 일기도 했죠. 내란 혐의자들이 하필 김 상임위원이 소위원장으로 있는 위원회에 배당된 건 우연은 아닙니다. 소위원회 안건은 진정 내용 등에 따라 배정됩니다. 인권위는 12·3 비상계엄 사태 이후인 올해 1월 소위원회 구성을 재편했고, 이때 김 상임위원은 자신이 이끄는 소위들을 여권 성향으로 전부 또는 과반수 이상으로 꾸렸습니다.

소위원회 구성 변경은 인권위가 지난해 10월 인권위 소위 구성을 3인에서 4인으로 늘리기로 전원위원회에서 의결한 게 계기였습니다. 출범 이후 22년 만에 소위원회 '만장일치' 합의로 운영해 왔던 관행을 깨고 2 대 2 동수일 경우 안건을 기각하기로 규정을 바꾼 겁니다. 의결정족수는 3명 이상의 출석과 3명 이상의 찬성으로 유지했습니다. 참고로 인권위의 소위 구성 변경 역시 김용원·이충상 등 여권 측 인사들이 주도했던 것으로, 당시에도 안팎의 비판이 거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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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인권보호위원회엔 김용원 상임위원 외에 한석훈·이한별·강정혜 위원이 있습니다. 대법원장이 지명한 강정혜 위원은 해외 체류 중이었지만 윤 대통령과 여당 측이 추천·지명한 나머지 세 사람이 신속하게 회의를 열고 의견표명 결정까지 내릴 수 있었습니다. 반면 침해구제1위원회는 김용원 상임위원 말고도 한석훈·김종민·소라미 위원이 포함돼 있습니다. 여기도 소라미 위원을 제외하면 여권 성향이 세 명으로 의결 정족수를 채우도록 구성됐습니다. 그런데 이 가운데 대통령 측 추천 인사였던 '원명스님' 김종민 위원이 '윤 대통령 방어권 보장' 권고안 후폭풍 속 지난달 돌연 사퇴해 버린 겁니다. 이로써 침해구제1위원회는 김용원·한석훈·소라미 위원으로 당분간 3인 체제를 유지하게 됐습니다.

대법원장 추천 인사인 소라미 위원은 '윤 대통령 방어권 보장' 안건 등에 강력히 반대하며 나머지 김용원·한석훈 위원과 대척점에 서있습니다. 김용원 상임위원이 이 같은 2대 1의 상황을 고려해서 아예 침해구제1위원회 회의 개최를 취소한 게 아니냐는 의심이 드는 대목입니다. 위원회 위원 세 명 모두 합의하지 않으면 안건을 기각하거나 전원위에 올려 논의해야 하는데 이 또한 세 명의 의결이 필요한 사안이기 때문입니다. 군인권보호위원회에서 했던 것처럼 안건은 법 규정에 따라 각하되더라도 의견을 표명하는 식의 결론에 이르는 것도 사실상 불가능할 것이고요. 인권위 고위관계자는 "침해구제1위원회에선 김 전 장관 긴급구제 진정을 두고 의견이 충돌할 게 뻔하니 아예 회의를 미루는 작전을 택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인권위는 김용현 전 장관을 논의에서 소외시킨 게 아니라 논의를 미루는 방식으로 감싼 것일 수도 있겠습니다. 침해구제1위원회는 18일 회의를 취소한 이후 다음 회의 일정을 아직 잡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인권위 내부에선 이달 안에 열리지 않을 거라는 얘기도 돕니다. 물론 김 전 장관의 안건이 인권위에서 당장 논의되지 않더라도, 최근 결정문들에 따른 간접 영향은 받을 것으로 보입니다. 독립적인 국가기관임에도 입맛대로 안건을 처리하거나 묵히는 행보에 인권위를 둘러싼 논란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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