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역사 속 '그날'의 이야기를, '장트리오' 장현성-장성규-장도연이 들려주는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이하 '꼬꼬무'). 본방송을 놓친 분들을 위해, 혹은 방송을 봤지만 다시 그 내용을 곱씹고 싶은 분들을 위해 SBS연예뉴스가 한 방에 정리해 드립니다.
이번에 '당신'에게 들려주고 싶은 '그날'의 이야기는, 지난 6일 방송된
'그녀들의 'He' 스토리'
편입니다. 이야기 친구로는 배우 장혜진, 고규필, 댄서 아이키가 출연했습니다.(리뷰는 '꼬꼬무'의 특성에 맞게, 반말 모드로 진행됩니다.)
▲ 팬덤 문화의 원조
때는 1949년 11월, 부산. 한 만삭의 임신부가 고통스러운 신음을 토해내고 있어. 숨이 점점 가빠오고 진통 주기도 짧아지는 게 곧 아기가 나올 분위기야. 그런데, 옆에 있는 남편의 반응이 좀 이상해. 아내한테 "여기서 애를 낳으면 안 되니, 조금만 참으라"는 거야. 근데 이상한 건 이뿐만이 아냐. 주변에, 사람이 많아도 너무 많아. 수백 명의 사람들이 임신부를 에워싼 채 지켜보고 있는 거야. 그때였어!
"응애응애~"
결국, 아기가 태어났어. 다행히 아주 건강한 사내아이야. 주변에선 "왕자님 보러 왔다가 진짜 왕자님을 낳았네요"하는 축하의 목소리와 박수가 쏟아졌어. 여기가 어디길래, 산모는 어쩌다가 수많은 사람들 앞에서 출산을 하게 된 걸까?
바로 여기야. 부산공회당(釜山公會堂). 부산의 대표적인 문화공간이야. 당시 좀 핫하다 싶은 연극이나 공연은 모두 이곳에서 열렸다고 해. 그러니까 이 만삭의 임신부도 연극을 보러 왔다가 갑자기 산통을 느끼고 출산까지 하게 된 거야.
대체 얼마나 대단한 연극이길래 만삭의 임신부가 그 무거운 몸을 이끌고 굳이 공연장까지 왔던 걸까? 이 임신부가 온 이유는 하나야. 바로 남주! 이 남자주인공의 실물 영접 기회를 놓칠 수가 없었거든. 어떤 배우인지 궁금하지? 바로 이분이야.
이 배우의 이름은 임종례. 당시 임종례 배우는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모르는 이가 없는 대체불가 최고의 셀럽이었어. 풍채는 듬직한데 얼굴은 또 미소년 같아. 그래서 그런지 팬들 대부분은 여학생과 주부가 많았다고 해. 이 팬들을 부르는 이름이 따로 있었어. 우리나라 팬덤 문화의 시초였을 그 이름은, 바로 '고무신 부대'. 왜 이런 이름이 붙었을까? 이유가 좀 독특해.
일단 임종례가 출연하는 공연은 관객이 하루 평균 약 7천 명이 모였다고 해. 어마어마하지? 하루 평균 4회 공연의 관객을 다 합친 숫자야. 이 7천 명이 극장에 모인다고 생각해 봐. 서로 밀고 치이고 난리도 아니겠지? 그러다 벗겨진 고무신이 매일 한 트럭씩 나온다고 해서 붙은 별명이 '고무신 부대'야. 팬덤이 얼마나 대단했는지, 상상이 돼? '꼬꼬무'가 이 고무신 부대를 직접 만났어.
"40년생이고 이름은 김영숙입니다. 그때가 중학교 2학년쯤 됐는데, 엄마가 한 달 치 회수권을 끊어줘요. 그럼 그걸 안 끊고 그 돈으로 다 극장에 가는 거야. 그 (배우) 사진도 엄청 많이 샀어요. 그래 가지고 그 사진을 모으는 게 우리가 취미였어, 그때는. 그 사진도 내가 이렇게 많았는데, 엄마한테 들켜갖고 다 뺏겼지."
-김영숙, '고무신 부대' 출신
"52년생이고 황경희입니다. 꽃다발 꽃도 사다가 드려보고, 중간에 그거 한번 손 번 만져보고 싶어서..."
-황경희, '고무신 부대' 출신
"좋아하는 사람 많았죠. 좋아서 시집도 안 가고 그 옆집에다 (집을) 얻어 가지고 평생을 사는 사람도 있었어. 지금 뭐 조용필이나 임영웅이나 그런 문제가 아니죠."
-홍성덕, '고무신 부대' 출신
70년 전 인기가 이 정도야. 얼마나 대단한 스타인지 짐작이 가지? 그럼 공연이 끝난 후에 이 고무신 부대들, 그냥 집으로 돌아갔을까? 아니지. 어떻게든 임 배우 얼굴 한 번 더 보려고 극장 뒷문에 진을 치고 있어. 오죽하면 이 극성팬들 때문에 공연장에 몇 시간씩 강제 감금되는 경우가 허다했대. 잠시 후, 소란이 잦아든 틈을 타 살금살금, 임 배우가 극장 뒷문을 빠져나오던 그때였어! 꺄아~ 하는 소리와 함께 어디선가 소녀들이 구름떼처럼 몰려오는데, 이 소녀들 반응이 좀 이상해.
"언니! 내 언니 억수로 좋아합니데이~"
아니 남자한테 언니라니. 이거 무슨 상황인 것 같아? 사실은 소녀팬들의 마음을 훔친 이 임 배우가, 남자가 아니고 여자인 거야.
그러니까 여자 배우가 남장을 한 채 연기를 한 거야. 혹시 지금 머릿속에 떠오르는 드라마 하나 있지 않아? 그래 맞아, 지난해 방송된 '정년이'. 드라마 '정년이'는 1950년대에 우리나라에서 엄청난 센세이션을 일으킨 여자들의 K-뮤지컬 '여성국극'을 다룬 드라마야. 여기서 '국극'은 말 그대로 나라를 대표하는 창극이야. 창극은 노래와 춤, 연기가 어우러진 일종의 오페라 같은 건데, 이 창극 무대를 오로지 여자들로만 채우는 게 바로 여성국극이야.
자, 오늘은 '정년이'의 실사판. 삶 자체가 한 편의 드라마였던 여성국극 배우들의 이야기를 들려줄 거야. 시간을 조금만 더 앞으로 돌려볼게.
▲ 신예 국악인의 등장
1948년 3월, 이번엔 서울이야. 흐드러지게 핀 벚꽃 사이로 수백 명의 사람들이 걸음을 재촉해. 이들의 목적지는 어디냐. 바로 창경원. 창경궁의 옛 이름이 창경원이야. 해방 직후 창경원은 서울 시민들의 테마공원 같은 곳이었어. 주말이면 연인, 친구, 가족들이 나들이를 즐기러 이곳에 나오는 거야.
이날도 창경원 야외무대에 한 국악인의 공연이 예정되어 있었어. 그런데 오늘따라 관객들 표정이 영~ 좋지 않아. 공연을 한다길래 엄청 기대를 하고 왔는데, 막상 왔더니 듣도 보도 못한 신인이 나온다는 거야. 잠시 후, 냉랭한 분위기 속에 오늘의 주인공, 신예 국악인의 무대가 시작됐어. 장르는 승무였어.
그런데 이 신인, 춤사위가 제법이야. 마치 한 마리의 학이 날아오르듯 하얀 장삼을 휘날리는데, 우아하면서도 격조 높은 몸짓이 눈을 뗄 수가 없을 정도야. 그날 찍힌 사진이 한 장 있어.
이렇게 멋지게 승무를 추는 사람. 그가 바로, 고무신 부대를 탄생시킨 원조 아이돌 임종례야. 사실 종례는 떡잎부터 남달랐어. 고향은 소리의 고장으로 유명한 전라남도 함평. 종례가 판소리, 가야금, 장구를 마스터한 나이가 겨우 9살이야. 당시 전남 지역의 예술제란 예술제는 죄다 휩쓸고 다닐 정도였어. 그렇게 예술제를 섭렵하고 4년 뒤, 종례는 스물둘이란 어린 나이로 창경원 야외무대에 서게 된 거야.
그러던 어느 날. 신인 종례에게 "잠시 나랑 얘기 좀 나눌 수 있을까?"라며 누군가 말을 걸어와. 그 순간, 종례가 깜짝 놀라 입을 다물지 못해. 눈앞에 자신의 롤모델이 서 있었거든.
이름은 박녹주. 당시 40대였던 박녹주 선생은 여류 명창계의 레전드 같은 존재였어. 이 박녹주 선생에게 직접 판소리를 배운 제자가 있거든? 제자의 이야기를 들어볼게.
"우리 선생님이 성격이 남자 같아요. 남자 같고 우직하고 정직하고. 그때는 또 우리 선생님이 여자로서 판소리 명창으로서 이름났던 분이야. 이동백 선생님, 또 송만갑 선생님보다 후배였지만, 우리 선생님은 여자로서, 남자 이상으로 소리를 잘했거든. 잘했고 유명했어요."
-이옥천 명창, 박노주 선생의 제자
이런 대스타가 까마득한 신인을 찾아왔으니 얼마나 놀랐겠어. 그런데 종례는, 다음 이어지는 얘기에 더 깜짝 놀라.
"여성 국악인들끼리 단체를 만들 건데... 너도 함께하면 어떨까?"
말 그대로 여성 국악인들로만 이루어진 단체를 만들자는 거야. 왜 이런 생각을 했을까? 이유가 있었어. 바로 '권번' 때문에.
권번은 일제 강점기 시절 기생을 길러내던 기생양성소야. 그 당시 여성 국악인들은 대부분 이 권번을 거쳐야 했대. 그러다 보니까 여성 국악인들을 바라보는 시선이 별로 곱지 않아. 아무리 실력이 뛰어나도 기생 출신이라는 낙인 때문에 여성 국악인이 설 자리가 없는 거지. 이를 보다 못한 박녹주 선생이 여성조직을 결성하게 된 거야.
종례는 그 제안을 바로 승낙했어. 사실 종례도 광주 권번 출신이거든. 종례는 기생이란 말을 듣는 걸 죽기보다 싫어했대. 예인으로서 자부심도 강한 거지. 그렇게 '여성국악동지회'의 창립멤버가 된 종례는 입단 후 제일 먼저 이름을 바꾸기로 해.
봄 춘(春)자에 꾀꼬리 앵(鶯)을 써서 임.춘.앵. 마치 봄에 지저귀는 꾀꼬리처럼, 목소리가 곱고 청아했거든. 그래서 선배 국악인이 '춘앵'이라는 예명을 붙여준 거야.
▲ 여성국극의 시작
자, 이렇게 춘앵이 마지막 멤버로 이름을 올리면서 총 서른두 명의 여성 국악인들로 이뤄진 동호회가 결성됐어. 그럼 이제 뭘 해야 할까? 다들 예인이잖아. 실력으로 여성 파워를 증명해 보여야지. 멤버들은 여성들로만 이뤄진 창극 무대를 올리기로 해. 고민 끝에 작품도 선정했어. "이리 오너라 업고 놀자~ 사랑 사랑 내 사랑이야~"로 유명한 '춘향전'으로. 그때도 '춘향전'은 믿고 보는 히트작 중 하나였어. 전 국민이 다 아는 뻔한 레퍼토리지만 그만큼 친숙한 매력 덕분에 흥행보증수표로 통했거든.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생겨. 누군가는 남자역을 소화해야 하는데, 다들 춘향이 역할만 하겠다고 하는 거야. 공연을 이끄는 박녹주 선생 입장에선 난감했겠지? 게다가 박녹주 선생에겐 춘향이보다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배역이 따로 있었어. 바로 이몽룡. 그 이유에 대해 여성국극을 연구하는 전문가의 이야기를 들어볼게.
"판소리 신에서 어떤 소리꾼이 일가를 이루고, 굉장히 좋은 판소리꾼으로 무대에 서기 위해서는 이제 막 한 50, 60세가 넘어야 되는 상황이잖아요. 근데 생각해 보면 50, 60세가 넘은 아저씨가 뭐 18세 이몽룡을 연기한다, 이런 것들이 이제 좀 안 어울릴 수밖에 없는 거죠. 근데 이제 20대의 여성들이 남성의 분장을 하고 마치 이제 그 보이밴드처럼 너무 아름다운 모습으로 굉장히 로맨틱한 역할 이런 것들을 이제 하게 되면 당연히 이제 매력적일 수밖에 없었을 것 같아요. 그게 여성국극의 소위 시호(試毫)가 되는 순간이었던 거죠."
-정은영, 여성국극 연구자
아무리 주연이라도, 성별을 바꿔 연기한다? 쉬운 일은 아니지. 근데, 이럴 때 궂은일은 막내한테 돌아가곤 하지. 여기서 막내는 춘앵이잖아. "춘앵아. 그러지 말고 딱 한 번만 해보자. 내가 도와줄게!"라며 하늘 같은 박녹주 선배의 부탁이야. 거절할 수 있겠어? 결국 이몽룡 역엔 춘앵이 낙점됐어.
춘앵은 기왕 하게 된 거, 젊고 패기 넘치는 이몽룡을 제대로 한 번 보여 주자고 결심했어. 그런데 이게 결심만 한다고 되는 일일까? 지금껏 20년 넘게 여자로 살았잖아. 아무리 연기라도 갑자기 남자 흉내를 내는 게 쉽진 않겠지. 사실 춘앵은 키가 158cm야. 남자라 하기엔 체구가 좀 작은 편이지? 그래서일까. 춘앵은 유독 덩치에 집착을 했다고 해. 마치 양복 패드를 넣은 것처럼 어깨를 크게 부풀리고, 신발 밑창엔 고무를 잘라 여러 겹 덧붙였어. 키가 커 보이려고. 심지어 매일 밤에는 우동을 먹었대. 일부러 살을 찌우려고 한 거야.
근데 덩치는 키울 수 있다 쳐. 진짜 문제는 목소리야. 목소리를 곱게 다듬는 데엔 날계란이라도 있지, 여자가 남자 목소리를 무슨 수로 내겠어. 게다가 예명이 '춘앵'일만큼 꾀꼬리처럼 고운 목소리를 가졌잖아. 이게 얼마나 피나는 노력이 필요한 일인지, 실제로 남역을 맡아 연기했던 여성국극 배우분들에게 물어봤어.
"남자 역할이라는 게 하루아침에 되는 게 아니거든. 여자는 여자 태가 나잖아요. 걸음걸이라든지 말하는 톤이라든지 이런 걸 고쳐야 되는데 그게 좀 어렵더라고."
-이옥천, 박녹주의 제자, 여성국극 배우
"처음에 배울 때 머리도 미용실로 안 가고 남자 미용실로 가서 머리를 깎게 하고, 그다음에 남자 옷 입히고, 남자 구두 신기고. 모든 것을 넥타이까지 다 해서 걸음을 걸어라. 여자 옷 입다가 남자 옷 입으면 벌써 마음이 조금 달라지잖아요. 그렇게 해서 남자의 성품을 마음으로 갖게끔. 여자 역할은 다 아무나 해요. 그러나 남자 역할은 아무나 못 해요. 모든 것이 준비가 되어야 해요."
-홍성덕, '고무신 부대' 출신
결국 춘앵은 목소리를 바꾸기 위해, 목이 쉬도록 고함을 지르는 방법을 썼어. 이 연습을 얼마나 했냐. 무려 6개월. 그러는 사이 꾀꼬리 같던 춘앵의 목소리는 걸걸한 중저음 보이스로 변했고 자태도 제법 늠름해졌어. 이젠 누가 봐도 18살의 꽃미남 이몽룡 그 자체야.
그로부터 며칠 뒤, 드디어 공연 날이 왔어. 호객꾼의 목소리에 사람들이 하나 둘 모여들어. 잠시 후 막이 오르고 위풍당당! 이도령으로 변한 춘앵이 등장했어. 그리고는 혼신의 힘을 다해 열연을 펼쳤어. 과연 사람들의 반응은 어땠을까?
결과는, 흥행 대실패. 처음엔 호기심에 관객이 좀 몰리나 싶더니 금세 발길이 뚝 끊어졌어. 악플보다 무섭다는 무플 참사가 벌어진 거야. 대체 이유가 뭐였을까?
"선생님들이 말씀하시기로는 초기 옥중화의 스타일이 지금 우리가 생각하는 드라마가 있는 극의 형태를 아직 갖추지 못한 상태였다고 해요. 말하자면 약간 가요무대처럼 창자들이 무대에 올라와서 한 자락을 하고 내려가면, 그다음 소리꾼이 올라와서 노래를 하고. 이제 이런 방식이었던 것 같아요."
-정은영, 여성국극 연구자
그러니까 여자들끼리 공연을 한다고 해서 잔뜩 기대를 하고 갔는데,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뭐야~ 똑같잖아!" 하며 실망을 한 거지. 결국 야심 차게 쏘아 올린 여성국극의 신호탄은 흥행 대참사라는 흑역사를 안게 됐어.
▲ 임춘앵과 그 일행들
그렇다고 여기서 포기하면 춘앵이 아니지. 춘앵은 다시 한번 마음을 다잡아.
"이제 똑같은 창극은 안 할 거야. 내가 별천지 같은 오페라, 제대로 된 여성국극을 보여주겠어!"
그날 이후 춘앵은 파격적인 행보를 시작해. 가장 먼저 한 일은, 여성국악동지회를 탈퇴했어. 그리고는 자신만의 국극단을 새롭게 꾸리고, 새 단체명도 정했어. 춘앵이 정한 이름은 '임춘앵과 그 일행들'. 꼭 서태지와 아이들 같지? 그렇게 그녀는, 여성국극의 새로운 신호탄을 쐈어.
단체명은 정했고, 이제 멤버들을 꾸려야지. 춘앵은 남역은 자기가 맡기로 했어. 다들 싫어하니까. 그리고 한 소녀를 자신의 여성 상대역으로 캐스팅해. 바로 이 소녀야.
이름은 김진진. 진진은 춘앵 언니의 딸이야. 그러니까 춘앵에겐 조카가 되는 셈이지. 마치 이모의 끼를 고스란히 물려받은 듯 가무악에 능한 데다가 외모도 아주 출중해.
그렇게 진진을 비롯해 실력 있는 여성 국악인들을 캐스팅한 춘앵은 이번엔 '원우전'이라는 한 남자를 영입해. 이분은 당시 보기 힘든 무대장치가야. 병풍만 세워뒀던 무대를 입체형으로 바꾼 최초의 인물로 알려져 있어. 춘앵은 옥중화 공연이 관객들에게 외면을 당한 이유를 밋밋한 무대 때문이라고 생각했대. 그래서 이번만큼은 화려한 무대와 볼거리로 관객들의 눈을 제대로 사로잡겠다고 결심한 거야. 그럼 화려한 무대를 만들기 위해선 뭐가 필요할까?
춘앵의 선택은 바로 '미러볼'이었어. 1950년대에 이걸 쓴다니, 안 믿기지? 당시 이 무대에 함께 섰던 분의 이야기를 들어봐.
"저는 여성국극을 했던 당년 91세 조영숙입니다. 그때 미러볼이라는 게 웬만한 클럽에도 없었고 호텔이 있었는데 그 워커힐 그라브에 하나가 있었어요. 그거를 밀수한 사람한테 사가지고 그 미러볼을 썼어요. 그거를 (춘앵)아주머니가 과감하게 만든 거예요, 처음으로. 그래 가지고, '이랴' 하면서 견우가 나오면 조명이 촤악 비치면 그 꽃길로 이렇게 나오는 거예요. "하늘 높이 우뚝 솟은 천하 절경 금강산" 이러면서 탁! 그렇게 해서 획기적인 공연을 하신 분이 임춘앵 선생님이에요."
-조영숙, 여성국극 배우
확실히 시대를 앞서갔다는 느낌이 들지? 이뿐만이 아냐. 춘앵은 멜로디 파트도 전면 수정했어. 국극 자체가 판소리를 기반으로 만들어졌다고 했잖아? 그러다 보니까 창 부분의 가사가 좀 어렵게 느껴졌대. 그래서 좀 더 대중들이 쉽게 이해하고 따라 할 수 있도록 일종의 가요 형식으로 창을 편곡한 거야.
이렇게 배우, 무대, 음악까지 새롭게 완성이 됐어. 그럼 이제 모든 준비가 끝난 걸까? 아니야. 제일 중요한 하나가 남았어. 바로 여심저격!
춘앵은 작품을 고를 때부터 남자주인공에 대한 3가지를 조건을 뒀어. 첫째! 남주는 충절과 신의를 지키는 용맹스러운 왕 혹은 왕자여야 한다. 둘째! 남주는 가무에 능하고 무예를 겸비해야 한다. 셋째! 이게 제일 중요해. 남주는 여성을 존중하고 사랑에 헌신하는 로맨티시스트여야 한다.
이몽룡 땐 그저 외적인 모습에만 치중했다면, 이번엔 여성들의 연애세포를 깨울 진짜 왕자님을 보여줘야겠다고 생각한 거야. 여성의 권위가 바닥인 시절이잖아. 보란 듯이 여성을 떠받드는 남성 캐릭터를 무대에 세워서 대리 설렘을 자극하자는 거지. 이런 남주를 연기한 춘앵. 이번엔 여심저격에 성공했을까?
새로 준비한 공연은, 완전 초대박이 났어. 관객석 여기저기에서 도파민이 팡팡 터지고 과몰입한 여성들은 감동의 눈물까지 흘려. 당시 상황을 적은 글이 있어.
"우뚝한 콧날 아래 붉은 입술은 마치 천상에서 내려온 귀공자 같고, 서늘한 눈매와 맑은 미소는 다정다감하기 그지없었다. 그때의 왕자님은 소녀들이 꿈에 만나보던 바로 그 왕자님이었고, 어머니가, 아주머니가, 누나들이 소녀 시절 언젠가 한두 번쯤 상상 속에서 만나보았던 바로 그 왕자님이었다."
▲ 임춘앵 왕자님의 시대
이렇게 혜성처럼 등장한 백마 탄 왕자님은 여성팬들 사이에서 그야말로 어마어마한 신드롬을 일으켜. 집집마다 춘앵 앓이에 밤잠을 설치는 여인들이 늘어나고 값비싼 패물을 조공하는 팬들도 많았대. 바야흐로 임춘앵 왕자님의 시대가 열렸어.
"길에 가면 여학교 앞에서는 사진관 그 할인권을 줘요. 그 표를 갖고 사진관을 가요. 가면 거기 옷이 다 있는 거야. 하다못해 말까지도 만들어 놓고 칼이고 뭐 다 있어. 왕자 옷도 입고 찍어보고, 칼도 들고서 찍어보고."
-김영숙, '고무신 부대' 출신
"단원들이 여관 같은 데 가잖아요. 여관 같은 데 가면 그 앞에서 죽쳐 있고. 어린 마음에 그것도 가서 보고. 또 집 앞에, 문 앞에 가서 그냥 얼굴 한 번 더 쳐다보려고 문 앞에 서 있어 보기도 하고. 그땐 어렸으니까. 물불 안 가렸어요."
-황경희, '고무신 부대' 출신
"우리 학생들은 책가방 들고 학교는 안 가고 그냥 논산에서 (서산) 강경까지 따라오는 거야. 선물은 뭐 많이 받죠. 뭐 차도 사주기도 하고, 집도 사주기도 하고. 나중엔 애들이 막 혈서를 쓰고 안 만나준다고 혈서를 쓰고 보내고 막 이런 경우가 많고. 팬들은 그땐 막 극성스럽지."
-이옥천, 여성국극 배우
그렇게 여성국극의 인기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던 그때. 1950년 한국전쟁이 터졌어. 단원들은 하나같이 겁에 질려있고 다른 국극단은 이미 해산했다는 이야기도 들려와. 잠시 후, 한참을 고민하던 춘앵이 단원들을 불러 모아 광주로 가자고 했어. 왜 하필 광주였을까? 아까 춘앵이 광주에 있는 권번 출신이라 했잖아. 게다가 광주엔 춘앵의 특별한 지인도 있었어. 바로 춘앵의 연인, 신대우. 춘앵보다 나이가 열 살 정도 많았는데 춘앵은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그를 찾아가 조언을 구할 만큼 신대우를 믿고 의지했다고 해.
이 신대우의 도움으로 광주에 온 춘앵은 차근차근 계획했던 일을 꾸려나가기 시작해. 사실 춘앵은 큰 그림을 그리고 있었어. 지금 서울에선 공연을 할 수 없는 상황이잖아. 그래서 광주에 내려가 권번 출신의 예인들과 함께 다음 작품을 준비할 계획을 세운 거야.
시간은 흘러 1952년 1월 25일. 드디어 춘앵의 공연 날짜가 잡혔어. 근데 지금은 전시 상황이잖아. 북쪽에선 서로 총칼을 겨누고 남쪽으론 연일 피난민들이 내려오고 있어. 이런 불안한 시국에 공연을 보러 오는 관객들이 있었을까? 있었어. 그것도 어마어마하게 많이.
"공연 첫날 광주극장에는 관객들이 몰려들었다. 극장이 무너질 것 같다는 소리까지 나왔다. 소문은 금방 인근 지역으로 퍼져나갔고 가는 곳마다 관객들이 장사진을 이뤘다."
- '김진진 회고록' 中에서 -
이번에도 공연은 대성공! 전쟁이 한창인 와중에도 전국방방곡곡 지방 순회공연을 다녀야 할 만큼 반응이 뜨거워. 이런 기막힌 일도 있었대. 당시 공주를 괴롭히는 악역 전문 이미자 배우님의 이야기를 들어볼게.
"한 번은 객석이 막 시끄럽길래 왜 그런가 보니까 우리 외할머니하고 어떤 사람하고 싸움이 붙었는데. 왜 싸우고 하니, 제가 역적이다 보니까 막 '저놈 죽으라'고. 막 객석에서 '저거 죽어야 된다'고 그러니까, 우리 외할머니가 구경을 하다가 '남의 외손녀한테 왜 죽으라고 그러냐'고. 연극인 줄도 모르시죠 노인네다 보니까."
-이미자, 여성국극 배우, 악역 전문
관객이 얼마나 몰입했으면 진짜 싸움이 다 났을까. 심지어 한 배우는 극성팬의 요청으로 이런 웨딩사진도 찍었어.
가상 결혼식을 올린 거야. 신랑이 조금앵이라는 여성 국극 배우인데, 당시 춘앵 못지않은 인기를 누린 배우야. 신부석의 팬이, 금앵한테 반해서 '진짜 결혼은 바라지도 않으니 제발 웨딩사진만 안 되겠냐'며 몇 달을 쫓아다닌 끝에 소원을 이룬 거야.
게다가, 전에 없던 독특한 현상도 발생했어. 전에는 공연을 보는 팬들이 여학생이나 주부들이었는데, 이제 남성 팬들이 대거 유입된 거야. 다른 때도 아닌, 전쟁 중인 이 상황에서. 어쩌다 남녀불문 팬들이 늘어난 걸까. 비결은 바로 이거야.
이건 1952년 11월 5일 부산에서 공연된 '청실홍실' 대본의 일부를 재현한 거야. 사실 이 '청실홍실'은 셰익스피어의 작품 '로미오와 줄리엣'을 번안했어. '청실홍실'은 '로미오와 줄리엣'처럼 원수 집안이었던 '청사랑'과 '홍랑'이 운명 같은 사랑에 빠지는 로맨스를 그린 작품이야. '로미엣과 줄리엣'의 엔딩 기억나? 줄리엣이 죽었다고 생각한 로미오가 독약을 먹고 그런 로미오를 본 줄리엣도 결국 죽음을 택하잖아? 그럼 '청실홍실'은 어떤 결말을 맞았을까? 대본의 마지막 부분이야.
"어허이 꽃이 피네 승전고 두리둥둥 꽃이 피네. 봉세로세 황세로세 청사랑 홍랑은 봉새 황세. 삼세에 잊혀질 사랑일세. 맞닿은 칼날을 내던지고 어화 두 집에 담을 텄네. 어허이 만백성아 사랑의 동아줄에 달려 살자."
결말이 원작과 전혀 다른 해피엔딩이야. 그럼 춘앵은 왜 굳이 결말을 해피엔딩으로 바꾼 걸까?
"전쟁통이라 마음들이 모두 무거울 텐데, 무대도 훌륭하고 예쁘고. 그때만큼은 이걸 다 잊어버리잖아요. 그 노래로다가 그 감정으로 객석을 울리고 웃기고 하는데 그걸 자유자재로 하는 게 임춘앵 씨 하나밖에 없었어요."
-조영숙, 여성국극 배우
40년 가까이 나라를 잃었는데 이제는 같은 민족까지 잃어야 했던 국민들에게. 조금이나마 위안이 되는 이야기를 전하고 싶었던 거야.
▲ 황금기를 맞은 여성국극
그로부터 1년 뒤. 끝나지 않을 것 같던 전쟁이 끝이 나고 드디어 휴전이 선포됐어. 이맘때 춘앵은 단원들과 함께 상경을 하게 돼. 그사이 늘어난 인기 덕분일까? 어느새 임춘앵 국극단의 단원수는 40명을 훌쩍 넘어섰어. 그럼 다 같이 함께 연습할 장소가 필요했겠지? 춘앵은 거금을 들여 종로 돈의동의 한 한옥집을 사기로 해. 근데 방이 무려 7개에 큰 마당까지. 이건 뭐 거의 대궐이야.
근데 이 집 다 좋은데 딱 하나 문제가 있어. 바로 민원. 당대 최고의 톱스타가 사는 집이잖아. 팬들이 매일 같이 대문 앞에 진을 치고 있는 거야.
"낙원동 그 골목이 큰 기와집이었는데 경찰들이 와서 그냥 쫓고 그래도 소용없어. 어디 가서 숨어 있다가 또 오고 바글바글하니까 동네 사람들이 막 욕지거리 하면서 빨리 안 가냐고. 임춘앵이 때문에 우리가 못 살겠다고. 파출소에 얘기해도 아 팬들이 와서 그러는 걸 어떻게 해."
-조영숙, 여성국극 배우
그리고 그중에서도 눈에 띄는 이들이 있었어. 까만 양복을 차려입은 남자들. 이 남자들은 춘앵을 모시러 온 극장주들이었어. 계약을 따내려고 지방에서 새벽같이 올라온 극장주들까지 줄을 섰으니, 집 주변에 사람이 얼마나 많았겠어. 그렇게 팬들과 극장주들을 겨우 돌려보내고 나면, 저녁엔 또 이것 때문에 난리가 나. 뭘까?
바로 돈이야. 그때 당시 여성국극 티켓 한 장이 '백환'이었거든? 이 백환짜리 지폐를 담은 자루가 하루에 10포대씩 들어왔어. 공연이 끝나면 수레로 이 돈 자루를 계속 퍼 나르는 거야. 오죽하면 종로구 일대 땅이 다 임춘앵 꺼라는 소문이 나돌 정도였대. 대단하지? 그런데 춘앵이 진짜 대단한 이유는 따로 있어. 그 시절 춘앵과 함께 지냈다는 가족분의 이야기를 들어볼게.
"저는 임춘앵 여사님의 올케 되는 박선엽입니다. 교육을 가르칠 때는 엄하고, 아주 무서웠지만, 한쪽으로는 굉장히 인자하고 정도 많고 했던 분이세요. 단원들하고 연구생들한테는 다 베풀었어요, 돈을. 자기 어머님이 아파서 수술한다면 수술비 대주고, 또 가봐서 못 살면 쌀도 다 대주고. 그때만 해도 제가 생각하기에는 고아원 두 군데, 양로원 세 군데를 매달 드렸던 걸 생각해요. 그렇게 흥행을 해서 돈을 많이 벌어도 돈은 욕심도 없고, 남 도울 줄만 아셨지. 하여튼 봉사 정신이 아주 굉장했던 분이세요."
-박선엽, 임춘앵의 올케
▲ 비극의 시작
그런데, 그런 말 있지? 불행은 언제나 행복한 순간에 찾아온다고. 이듬해 겨울, 춘앵에게 한 통의 비보가 전해져.
"아저씨가 계셨을 때는 아저씨가 다 했잖아요. 그랬는데 암으로 돌아가셨거든요. 그 양반 돌아가시고 나니까 그 양반 하던 일을 혼자서 다 하니까 얼마나 힘이 들겠어요. 연극하기도 힘들지."
-조영숙, 여성국극 배우
신대우는 돈의동 숙소에서 사업부를 담당하고 있었어. 그러던 중 건강이 악화됐고 갑작스레 숨을 거둔 거야. 오랜 시간 춘앵이 의지했던 유일한 사람이야. 연인을 허망하게 떠나보내야 했던 춘앵의 마음은 어땠을까? 하지만, 이땐 아무도 알지 못했어. 이건 비극의 시작일 뿐이라는 걸.
연인의 죽음으로 춘앵이 실의에 빠져있던 어느 날. 춘앵의 인생을 송두리째 흔드는 일들이 발생해.
"쏟아져 나오는 국산 영화"
"터무니없이 많은 영화가 쏟아져 나온다고 느낄 정도로 올해는 국산 영화가 제작 생산되고 있다."
"하반기 제작 상영될 영화는 작년의 배가 될 것 같다. 한국 영화계가 어느새 이렇게 컸는가 생각하면 놀랍기만 하다."
-당시 신문 보도 中
전쟁의 여파로 주춤했던 국산 영화 제작에 다시 붐이 일기 시작한 거야. 여성국극에 투자했던 투자자들은 영화로 눈을 돌리고 감독들은 여성국극 출신의 배우들에게 높은 개런티를 부르며 캐스팅을 해갔어. 이렇게 실력 있는 배우들이 대거 영화판으로 옮겨간 상황에서 설상가상 정부가 '국산 영화 입장세 면세 조치' 발표까지 해. 이게 뭐냐면, 극장주가 영화를 사서 틀잖아? 그러면 한 편당 60%에 가까운 세금이 붙었대. 근데 이 세금을 국산 영화에 한해서만 면제하겠다는 거야. 하루 최대 4회 공연이 가능한 여성국극과 무한대로 상영할 수 있는 값싼 한국 영화. 극장주라면 어떤 걸 선택할까? 당연히 영화가 더 이득이겠지? 이건 게임이 안 돼. 결국 여성국극단은 자연스레 지방 변두리 극장을 기웃대는 신세가 되고 말아.
"이전에는 정말 극장 1회 공연하고 내보내고, 2회 공연하고 내보내고. 그러니 돈이 얼마나 많았겠어요. 정말 자루에다가 발로 눌러서 들어갈 정도였는데. 그 후에 이제 단체 열몇 개가 되던 것이 하나씩 하나씩 다 해산되더니 나중엔 없어요. 단체가 없는 거예요."
-이미자, 여성국극 배우
임춘앵 국극단의 사정도 마찬가지였어. 이런 와중에 또 한 통의 비보가 전해져. 이번엔 어머니의 부고 소식이야. 계속되는 악재에 결국 춘앵은 걷잡을 수 없이 무너지기 시작해. 신경쇠약으로 잠을 이루지 못하고 술에 의지하는 날이 늘어가. 그리고 결국, 일이 벌어졌어.
가까스로 잡은 지방 변두리 극장에서 공연을 준비하던 날이야. 남주를 맡은 춘앵이 거울을 보며 분장을 하는가 싶더니, 갑자기 탁! 붓을 내려놔. 그리고는 후배 배우에게 이런 말을 해.
"오늘은 네가 올라가라. 나 오늘 무대에 안 선다."
이 말을 끝으로 분장실을 나선 춘앵은 다시 무대로 돌아오지 않았어.
"그러니까 극장에서는 난리죠. 포스터에는 임춘앵인데 왜 후배냐, 안 된다… 그러고 난리가 나고 그러면 날짜를 안 줘 그다음부터는. 그러면 (춘앵)아줌마는 너무 힘드니까 그냥 후배를 시키기도 하고 그러는데, 그러다 보니까 차츰차츰 이제 이미지가 안 좋잖아요."
-조영숙, 여성국극 배우
당대 최고의 톱스타가 벌인 이날의 돌발 행동은 꼬리의 꼬리를 물고 수많은 루머를 만들어 냈어. 마약을 한다는 소문부터, 심지어 사망설까지. 화려한 무대 위, 위풍당당했던 백마 탄 왕자님은 그렇게 무너져 가고 있었어.
그로부터 3개월쯤 흘렀을까. 드디어 춘앵의 소식이 들려왔어. 바로 여기에서.
사진이 좀 흐릿하긴 한데 어딘지는 알겠지? 맞아, 병원이야. 한 기자가 춘앵을 찾아낸 거야. 이게 당시 기사야.
"국악제의 명미로서 인기가 비등한 임춘앵은 과연 별세하였는가? 그간 약 3개월간 무대에 나타나지 못함으로 해서 팬들 간에 별세하였다는 소문과 함께 구구한 억측과 풍설이 떠돌았는데 최근 본지에서는 이를 확인하여 팬들의 궁금증을 풀어주고자 요양 중인 인천 병사를 방문하였다."
-당시 기사 내용 中
춘앵은 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있었어. 그래도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이 기사로 춘앵을 둘러싼 루머들은 잠잠해졌어. 하지만 가뜩이나 국극단이 위기인 상황에서, 춘앵의 긴 공백 기간까지 있었잖아. 퇴원한 춘앵이 돈의동 합숙소에 돌아왔을 땐 모든 것이 달라져 있었어. 담장 너머 울려 퍼지던 단원들의 노랫소리도, 팬들로 북적였던 골목길도, 매일 40인분의 밥을 짓던 솥도 텅 비어 있어. 그 사이에 배우들이 다른 국극단으로 이적하거나 영화계로 넘어간 거야. 톱스타의 몰락은 주변 사람들에게도 아픈 기억으로 남아있어.
"하루는 하..... 울음 나올까 봐 얘기를 못하겠어. 울고 계세요, 안방에서. 제가 울고 계시는데 가서 보니까 '올케, 그렇게 돈 싸들고 오던 극장장…' 욕을 하면서 '지금은 내가 전화해도 안 받네. 어떡하지?' 그래서, 울면서 '할 수 없죠. 몸만 건강하셔야 돼요'. 절대 실망하지 마시라고 항상 그러고 위안을 드리고 그랬었어요. 흥행을 하다가, 사람 인기 있다가 시들어지면 먼저 가듯이 좀 아프셨어요. 술도 좀 많이 잡수고 병원 입원도 많이 하셨고. 뭐든지 옛날 같지 않고 하니까 죽을 결심을 그렇게 하시더라고요. 그래서 몇 번 제가 또 말린 적도 있었어요. 저도 같이 울기도 하고.."
-박선엽, 임춘앵의 올케
인기라는 게 영원할 수는 없다지만, 세상 모두가 나에게 등을 돌린 것 같은 기분. 춘앵은 어떤 마음이었을까? 그래도 한 가지 다행은 이 무렵 춘앵의 어린 조카들이 태어났다는 거야. 왜 집에 아이들이 있으면 웃을 일들이 생기잖아. 춘앵은 올케인 선엽 씨의 두 어린 딸들을 참 예뻐했다고 해. 이런 가족들의 따뜻한 응원 덕분일까? 춘앵은 다시 용기를 냈어. 새로운 단원들을 물색하고 간간이 공연도 이어갔어.
▲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
그로부터 얼마 뒤인 1962년 1월 5일. 정부는 전통예술을 보존하기 위해 '문화재 보호법'을 발표해. 역사적으로나 예술적으로 연구 가치가 있다고 생각되는 문화재를 선정해 국가가 관리하도록 한 거야. 연극, 음악, 무용 등 전통 공연 예술 대부분이 무형문화재로 선정이 됐어. 그런데, 여성국극은 제외가 됐어. 왜 제외를 한 걸까? 그 이유를 짐작할 수 있는 글이 있어.
"암탉이 울면 그 집이 망한다. 여자가 설치면 나라가 망하는 법이다. 구한말 민비가 정권을 집단 농락하더니 나라가 망하였다. 여성극단의 출연은 한마디로 말하면, 창극사에 길이 씻을 수 없는 오점을 남겼을 뿐이며, 속죄할 수 없는 죄과를 범하였다고 할 수 있겠다."
- '창극사 연구' 中에서 -
여성국극의 인기에 밀려 침체기를 겪어야 했던 기존의 전통예술계가 여성국극을 무시하기 시작한 거야. 심지어 현란한 의상으로 관객들을 속이는 여성들만의 기형적인 무대라는 막말까지 쏟아냈어.
"그러다 보니까 이후의 행보들이 너무 다 소위 말하자면 비참하기 이를 데가 없었죠. 딱 끊고 다 사라지시고 다른 쪽으로 흘러가신 분들도 많고. 일부만 남아서 어려운 상황에서도 공연을 해보려고 노력을 많이 하셨는데, 그게 말하자면 장터 같은 데를 돌아다니면서, 약장수들이랑 간단한 꼭지 같은 걸 보여주는 그런 일들을 하셨던 거예요."
-정은영, 여성국극 연구자
그렇게 수많은 관객들을 별천지 세상으로 이끌던 임춘앵은 1961년 '흑진주' 무대를 끝으로 사람들의 기억 속에 잊혀지고 말아.
▲ 왕자님의 마지막
세월은 무심하게 흘러 어느덧 1968년 겨울. 소복하게 쌓인 눈길을 헤집고 늦은 밤, 영숙의 집 앞에 누군가 찾아와. 문 앞엔 초라한 행색의 한 여자가 서 있어. 춘앵이었어.
"아니 선생님, 이 밤에 어쩐 일로... 추운데 안으로 들어오세요."
그러자 춘앵이 머뭇대며 입을 열어.
"영숙아, 나 술 두 병만 사줄 수 있는가? 미안허지만 갚겄다는 약속은 못하겄네,,"
"그래서 '아유 아줌마 들어오세요 사다 드릴게' 내가 가서 사다 드린다고 하니까 '아유 가시지 마세요' 나한테 가시지 말고 그냥 돈으로 줘라, 이러시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무슨 소리세요 아줌마'… 얼마나 가슴 아픈지 몰라."
-조영숙, 여성국극 배우
결국 영숙은 돈을 드렸고 그게 영숙이 본 춘앵의 마지막 모습이었다고 해. 그로부터 얼마 뒤 신문에 짤막한 기사 하나가 실렸어.
"우리나라 여성국극계의 1인자 임춘앵 씨가 서울 성북구 자택에서 뇌출혈로 별세했다. 향년 52세."
그녀는 떠나기 전 올케 선엽 씨에게 이런 말을 남겼다고 해.
"제가 돌아가시기 한 달 전에 봤었어요. 오시더니 '올케, 내가 올케 노래 하나 가르치고 싶은데 하려나? 아유 내가 창을 안 가르쳐줬는데 할 수 있나?' 그래요. '해보세요' 그랬더니 하시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배운 적이 한 번 있었어요. 그게 마지막이었어요 그게. '어머님의 사랑~ 하늘이 주신 사랑~ 천만 길 끝간 데를 모르는 사랑~ 엄마~ 엄마~ 어머니의 사랑~' 그리고 둘이서 대성통곡을 하고 울었어요. 이 노래를 하면 그때 생각이 나서..."
-박선엽, 임춘앵의 올케
춘앵의 마지막 모습처럼, 짧지만 강렬했던 여성 예인들의 시대를 끌어낸 여성국극도 그렇게 사라지는 듯했어.
▲ 다시 무대에 선 배우들
그런데, 그로부터 12년이 흐른 1987년. 서울 국립극장 무대 위로 중년의 여성들이 들어서.
붓으로 그린 얼굴에 까만 턱수염, 그리고 위풍당당 위엄 있는 걸음걸이. 이분들은, 바로 '꼬꼬무' 인터뷰에 응해주신 여성국극 배우 분들이야. 그간 누구누구 엄마, 또 누구누구의 아내로 살아온 이들이 다시 배우라는 이름으로 무대에 오른 거야. 무려 30년 만에.
"우리 막내아들이 많이 뒷받침 됐었는데, 그 애가 나를 힘을 주더라고요. 홍성덕은 절대로 쓰러지지 않으니까, 엄마는 용기를 내라고. 그래서 거기서 다시 또 시작하게 되고."
-홍성덕, 여성국극 배우 겸 연출가
"거기서 이제 좋은 반응을 느끼니까 옛 마음이 또 돌아오는 거야. 그러니까 그 기분 괜찮더라고. 이 국극이라는 게 정말 애착이 가는구나. 더 느끼고 기분 좋고."
-이옥천, 여성국극 배우
그날 이후 배우들은 매년 공연을 올리며 여성국극을 이어가고 있어. 예전만큼 화려한 무대나 엄청난 인기는 아니지만, 혼신의 힘을 다해 무대에 임하는 여성국극 배우들. 무대에 대한 그들의 열정은 지금까지도 현재 진행형이야.
그리고, 그 시절의 고무신 부대들도 여전히 함께 하고 있어. 팬들은 이젠 배우의 스케줄도 관리하고, 같이 밥도 해 먹는 진정한 성덕의 삶을 살고 있다고 해. 게다가 최근 불어온 드라마 열풍으로 제2의 전성기까지. 너무 잘됐지?
"이런 일도 있구나, 사람이 노력하면 반드시 노력은 보답을 해주는구나. 그런 생각을 합니다."
-조영숙, 여성국극 배우
"젊은 친구들도 많이 궁금해서 전화가 오고. 관심들을 많이 가지니까 더없이 기뻐요."
-이옥천, 여성국극 배우
"80세이다 보면 이 몸 안 아픈 데가 없는데. 하하하, 활력소가 생겨요."
-이미자, 여성국극 배우
지금 이 순간, 춘앵도 함께였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마지막으로 아주 오래전, 한 잡지에 기록된 임춘앵 선생님의 인터뷰를 끝으로 오늘의 이야기를 마칠까 해. 기자가 "인생에서 가장 즐거운 순간은 언제였나요?"라고 물었어.
"즐거운 순간이요? 마음에 드는 작품을 충분히 연습했다고 느낄 때, 무대를 앞두고 콤팩트로 두 뺨을 두들길 때, 그리고 만장의 관객에게서 박수가 쏟아질 때, 여성국극과 함께한 모든 순간들이 제겐 그 무엇과도 비견할 수 없는 행복이었습니다."
-임춘앵
지난 2000년, 한국여성유권자연맹은 20세기를 빛낸 대한민국 여성 10인을 선정했어. 독립운동가 유관순, 최초의 여성법관 이태영 변호사, 소설가 박완서 선생님 등 이름만 대면 알만한 분들 사이에 이분도 당당히 이름을 올렸어. 바로 임춘앵 선생님. 하지만 이 대단한 명성에 비해 임춘앵 선생님과 관련된 자료는 거의 남아있지 않은 상황이야. 한 시대를 풍미했던 천재 국악인이란 타이틀에 비해 그녀를 기억하는 이들이 많이 없다는 건 조금 서글픈 일이지.
그간 임춘앵이란 이름 앞엔 언제나 거창한 수식어가 따라다녔어. '세상에 다시없을 천재 예술가', '부와 명예를 거머쥔 전무후무한 여류 국악인', '만인의 사랑을 쟁취한 최고의 남장 배우'. 하지만 그녀가 진정 원했던 수식어는 이런 게 아니었을까?
'가장 높은 곳에서 가장 낮은 이들의 애환을 노래했던 멋진 언니!'
'그날' 이야기를 들은 '오늘' 당신의 생각은?
강선애 기자
(SBS연예뉴스 강선애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