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페퍼민트 NewsPeppermint
"한국에는 없지만, 한국인에게 필요한 뉴스"를 엄선해 전하는 외신 큐레이션 매체 '뉴스페퍼민트'입니다. 뉴스페퍼민트는 스프에서 뉴욕타임스 칼럼을 번역하고, 그 배경과 맥락에 관한 자세한 해설을 함께 제공합니다. 그동안 미국을 비롯해 한국 밖의 사건, 소식, 논의를 열심히 읽고 풀어 전달해 온 경험을 살려, 먼 곳에서 일어난 일이라도 쉽고 재밌게 읽을 수 있도록 부지런히 글을 쓰겠습니다. (글 : 송인근 뉴스페퍼민트 편집장)
지난주 워싱턴 D.C. 상공에서 여객기와 군 헬기가 충돌해 비행기에 타고 있던 사람 67명이 모두 숨지는 끔찍한 사고가 난 이튿날 백악관에서 열린 트럼프 대통령의
이 도마 위에 올랐습니다. 사고 원인에 대한 조사는커녕 아직 사고 현장에서 시신도 수습하지 못한 상태에서 충돌 원인이 다양성을 고려해 인재를 채용하는 연방항공청(FAA)의 원칙 때문이라고 생각한다는 말을 대통령이 직접 꺼냈기 때문입니다.
문제의 발언은 큰 파장을 낳았습니다. 그러나 오늘은 그보다도 기자회견에서 본 다른 장면에 관한 이야기로 글을 시작하려 합니다. 트럼프 대통령 말고도 이날 기자회견 단상에 잠시라도 선 인물은 세 명이 더 있었습니다. 션 더피 교통부 장관, 피트 헤그세스 국방부 장관, 그리고 J.D. 밴스 부통령이었습니다. 장관들은 트럼프 정부가 출범한 뒤 상원 인사청문회를 거쳐 임명됐으므로, 아직 부처 업무 파악도 다 하지 못한 상태에서 이런 대형 사고를 맞닥뜨렸고 정신이 없었을 겁니다.
그런데 이 세 명은 마이크를 잡자마자 약속이나 한 듯 똑같은 말로 발언을 시작합니다.
무엇보다 먼저 트럼프 대통령의 뛰어난 리더십에 감사하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대통령님이 없었으면 이 상황을 지금처럼 잘 관리하고 헤쳐나가지 못했을 겁니다.
대략 이런 투의 이야기였습니다. 유족에 대한 위로나 사고 원인에 대한 투명하고 철저한 조사 같은 상식적인 약속 없이 다양성 채용 원칙이 사고를 불렀다는 믿기 어려운 장광설을 10분 넘게 늘어놓던 트럼프 대통령을 보며 한숨이 나왔는데, 그런 트럼프를 향해 일제히 엄지손가락을 추켜세우는 충성스러운 신하들을 보고 있으니, 이거야말로 트럼프 행정부의 특징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장면이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심지어 헤그세스 국방부 장관은 일어나선 안 될 사고였으며, 헬기 조종 과정에 문제가 없었는지 자세히 조사하겠다고 말하더니, 갑자기 엄숙한 표정을 지으며 "대통령님께서 말씀하셨듯이 DEI가 문제다. 내가 장관으로 있는 한 미 국방부와 군대에 DEI가 설 자리는 없을 것"이라고 힘주어 말했습니다. 이날 기자회견은 사고를 수습하고 유족을 지원하고 재발 방지 대책을 논의하는 행정부와 대통령의 모습이 아니라, 지난해 내내 본 선거 유세 속 트럼프와 추종자들의 정견 발표 현장 같았습니다.
비단 이날 기자회견뿐 아니라, 트럼프 대통령이 부처 장관, 연방 기관 수장으로 지명한 사람들을 상원이 검증하는 인사청문회 자리에서도 비슷한 장면이 계속 연출됐습니다. 장관은 물론이고, 정보 기관장, 연방수사국장, 환경보호청장 후보자 모두 청문회 내내 트럼프 대통령을 향한 감사와 충성을 드러내며, 자신은 트럼프 정부의 성공적인 국정 운영을 넘어 트럼프의 의제들을 성공으로 이끄는 데 이바지하기 위해 이 자리를 맡는다고 당당히 말했습니다. 어찌 보면 마치 왕에게 '하사'받은 벼슬자리를 두고 왕을 향해 "성은이 망극하옵나이다!"라고 외치는 신하들 같았습니다.
현대 관료주의에서 유능한 관료는 기능적으로 매우 중요합니다. 어떤 일을 맡는 데 필요한 경험과 전문성을 키워내는 건 많은 경우 해당 조직과 기관, 부처입니다. 그런데 자신이 기존 정치인 출신이 아니며, 워싱턴 D.C. 기득권은 무조건 무능하고 부패했으며, 나쁘다고 몰아세움으로써 당선된 트럼프 대통령에게 관료 제도는 비판을 넘어 타도의 대상입니다. 게다가 지난 첫 번째 임기 때 트럼프 대통령은 전통적인 공화당, 보수 정부의 인재들과 적잖은 마찰을 빚었습니다. 이번에는 더욱더 자신에게 충성하는지, 자기 말을 잘 들을지가 중요했고, 실제로 그 기준으로 인재를 뽑았습니다.
트럼프가 하도 많이 언급해서 전 세계적인 상식이 돼 버린 DEI는 다양성(Diversity), 공평(Equity), 포용(Inclusion)의 앞글자를 딴 말로, 인재를 채용하거나 심사할 때 차별을 금지하는 원칙을 두루 일컫는 말입니다. 꼭 민주당만 DEI를 외쳐온 건 아니지만, 아무래도 다양한 인종과 성적 지향을 포함한 사회적 약자를 더 많이 고려하고, 특히 미국 역사에서 노예제가 끼친 피해와 광범위한 영향을 직시하는 데 더 많은 노력을 기울인 건 공화당보다 민주당, 그 안에서도 특히 진보적 의제를 좇는 이들이었습니다.
반대로 공화당과 보수 진영 내에서도 특히 경제적으로 뒤처진 백인들, 특히 백인 남성들의 불만을 적극적으로 활용해 표를 얻고 끝내 대통령에 두 번이나 당선되는 정치적인 성공을 거둔 이가 바로 트럼프입니다. 트럼프는 다양성을 고려하고, 인종과 성별, 출신 배경에 상관없이 공평하게 대우하며 모든 이를 다 끌어안는다는 원칙을 "백인 (남성)을 향한 역차별"이라는 말로 간단히 치환하고, 이를 끝없이 비난했습니다. 반대로 자기가 만들 "DEI 없는 세상"은 능력과 성과에 따라 정당한 보상을 받는 "성과주의(meritocracy)"의 세상이 될 거라고 홍보해 왔습니다. 정부효율부(DOGE)를 이끄는
도 늘 "급진 좌파의 허울뿐인 평등 사상이 아니라 미국인이 하고 싶은 걸 다 해볼 수 있는 자유를 누리고 결과에 따라 공정한 보상을 받는 세상"을 이야기하죠.
▶ 뉴욕타임스 칼럼 보기 : "트럼프 내각이 성과주의라고요? 이 사례는 어떤가요?"
누구를 위한 성과주의인가?다만 트럼프나 머스크가 말하는 성과주의가 과연 무엇을, 또 누구를 위한 성과주의인지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DEI가 하나의 사상이 되고, 교조적인 면이 생겨 나타난 문제를 시정하는 것과 DEI 자체를 없애버리고, DEI 없던 세상으로 돌아가자는 건 전혀 다른 이야기입니다. 뉴욕타임스 칼럼니스트 데이비드 프렌치가 지적한 것처럼 트럼프는 DEI로 인한 문제를 늘 극적으로 부풀려 말합니다. 작은 문제를 바로잡으면 될 일인데, 굳이 DEI를 아예 없애고 싶어 하기 때문입니다.
트럼프가 무엇을 위해, 누구를 위해 DEI 척결을 부르짖는지 생각해 봅시다. 차별 금지 조항과 원칙이 사라진 세상은 곧 자신을 향한 견제와 반대가 덜한 세상이고, 지난 선거에서 자신에게
의 발목을 잡던 규제를 없애주는 세상입니다. 부자들의 배를 채워주는 건 자신을 공격했던 이들에게 반드시 복수하고 논공행상을 철저히 하는 트럼프의 삶의 기조에도 부합하는 일입니다. 결국, 비유하자면 'DEI라는 빈대'를 잡겠다며 초가삼간을 다 태우자고 주장하는 트럼프는 집이 다 타고 나면 거기에 새로 높은 건물을 올려 자기랑 자기 말 잘 듣는 사람만 모아놓고 살고 싶어 하는 셈입니다.
이렇게 이미 가진 게 많은 이들에게만 새로운 특혜가 집중되는 건 바람직한 방향이라고 보기 어렵습니다. 트럼프와 머스크 말대로 능력 있는 사람이 부당하게 역차별받지 않고 공평하게 대우받아서 성과를 낸다고 칩시다. 예전이라면 몰라도 현대 사회는 그 성과를 공정하게 분배하는 데도 신경을 써야 합니다. 지도자나 보스 마음대로 하는 게 아니라 제도와 원칙을 따라야 하는 사회가 더 나은 경우가 많습니다.
백번 양보해서 그 성과를 트럼프에게 충성한 부유한 엘리트들이 독점하지 않고, 경제적으로 뒤처져 분노했던 백인들, 지금 이 순간도 트럼프에게 열광하고 있는 백인들이 실질적으로 함께 누릴 수만 있다면, 그건 분명한 성과가 될 것입니다. 그렇지만 저는 그럴 가능성이 매우 낮다고 생각합니다. 트럼프나 머스크는 항상 "내가 거둔 성공은 온전히 내가 잘 나서, 내가 열심히 해서 이룬 성과"라고 말하고, 실제로 그렇게 생각합니다. 각종 제도적 지원이나 자기가 고용한 노동자들의 노동이 성공에 기여한 바를 무시하고 후려치지 않으면 그렇게 말할 수 없죠. 맹렬한 공격을 퍼붓는 DEI가 철폐돼도 트럼프에게 투표한 백인들이 심정적으로 느끼는 카타르시스 말고 경제적인 사정이 딱히 나아지진 않을 겁니다. 대신 미국 사회는 지금보다 극소수 부자들에게 막강한 권력이 집중되는 신 도금시대(New Gilded Age) 혹은 과두정에 가까운 모습을 띨 겁니다.
기울어진 운동장과 DEIDEI는 트럼프 행정부가 열을 올리며 비판하는 급진적인 사상이라기보다 미국 사회에 오랫동안 유지돼 온 차별을 직시하고 이를 바로잡기 위해 하나씩 만든 장치와 제도에 가깝습니다. 인종에 따라 기회가 달리 주어지던 것을 시정하고, 똑같이 일해도 성별에 따라 다르던 보상을 공평하게 맞추고, 저소득층 출신 아이들에게 교육의 기회를 제공하는 것처럼 기울어진 운동장을 평평하게 다지는 일이 모두 DEI에 포함됩니다.
(남은 이야기는 스프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