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인에 몹시 진심입니다만,>, <와인과 페어링>의 저자 임승수 작가가 와인 이야기를 들려드립니다.
아주 오래전 일이다. 외국인이 본 조선 시대의 모습이 궁금해 <하멜 표류기>를 찾아 정독한 적이 있다. 초반부를 읽어 내려가던 중, 서양 와인을 난생처음 마시고 크게 만족한 조선 관리의 이야기가 눈에 들어왔다. 와인 애호가가 되기 훨씬 전이고, 심지어 술을 좋아하지도 않았던 시절이었지만, 유독 그 대목이 인상 깊었다. 도대체 조선의 관리는 무슨 이유로 물 건너온 와인을 마시게 되었을까? 하멜 일행의 관점에서 그 자세한 내막을 살펴보겠다.
핸드릭 하멜은 1630년 네덜란드 호르쿰에서 태어나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 직원으로 일했다. 1653년 8월 16일, 화물을 실은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 소속 스페르베르 호는 일본 나가사키로 가던 중 거센 풍랑을 만나 제주도 인근 바다에서 난파되어 산산조각 났다. 64명의 선원 중 36명만이 살아남았다. 이들은 자신들이 도달한 곳이 일본이라고 착각했다. 암스테르담 출신의 선장 레이니어 에흐버츠는 바닷물에서 20미터쯤 떨어진 곳에서 팔베개를 한 채 죽어 있었다. 추가로 예닐곱 명의 선원 시신을 발견한 하멜 일행은 이들을 매장했다. 얼마나 절망적이었을까. 며칠 동안 제대로 식사도 못 한 상태에서 해안으로 떠밀려온 난파선 물품이 그들에게 작은 희망이 되었다. 밀가루 한 포대, 고기 한 통, 베이컨, 그리고 스페인 레드 와인이 담긴 나무통이었다. 일단 비를 피하려고 돛으로 천막을 쳤다.
다음 날인 8월 17일, 하멜 일행은 도움을 요청할 사람을 찾아 나섰다. 배와 구명보트가 산산조각 난 상황이라 더는 수리가 불가능했다. 정오쯤, 200~300미터 떨어진 곳에서 한 사람을 발견했지만, 손짓하자 도망갔다. 정오가 지나 또 세 사람을 발견했으나, 아무리 불러도 가까이 오지 않았다. 선원 중 한 사람이 용기를 내어 다가가 총을 들이대고서야 불을 얻어내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예상과 달리, 이들은 일본인 복장을 하고 있지 않았다. 선원들 사이에 불안감이 감돌았다. 저녁 무렵, 약 100명 정도의 무장한 남성이 천막 주변으로 모여들어 선원들의 인원을 세고 밤새 감시했다.
8월 18일 아침, 선원들은 더 큰 천막을 치느라 분주했지만, 정오 무렵 상황은 급변했다. 1천여 명의 군졸과 기병이 갑자기 몰려와 천막을 포위하고 서기, 일등항해사, 이등갑판장, 사환을 지휘관에게 연행했다. 지휘관은 이들의 목에 쇠사슬을 감고 꿇어 엎드리게 했다. 군사들은 천둥 같은 소리로 위압감을 조성했다. 천막 안에 있던 나머지 선원들도 무릎을 꿇으라는 명령을 받았다. 지휘관은 뭔가를 물었지만, 아무도 알아듣지 못했다. 손짓과 발짓으로 일본 나가사키를 목적지라고 설명했지만, 소용없었다. 지휘관은 선원들에게 술 한 잔씩을 주고 천막으로 돌려보냈다.
군졸들은 선원들이 기거하는 천막에 식량이 부족하다는 사실을 지휘관에게 알렸고, 1시간 뒤 죽이 지급되었다. 오랫동안 굶은 선원들의 건강을 고려한 조치였다. 오후에는 군졸들이 밧줄을 가져오자 선원들은 자신들이 묶여 죽는 것이 아닌가 두려워했다. 하지만 그들은 난파선으로 가서 쓸 만한 물건들을 모아 묶는 데 사용했다. 저녁이 되자 쌀밥이 지급되었다. 이날 오후, 일등항해사 헨드릭 얀스는 관측을 통해 자신들이 제주도에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8월 19일, 난파 후 나흘째 되는 날이었다. 군졸들은 부유물을 해안으로 옮기고 쇠붙이가 붙어 있는 나무를 태우는 작업을 계속했다. 하멜 일행은 절망감과 공포 속에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선물 공세를 펼치기로 했다. 드디어 문제의 와인이 등장할 차례다. 상급 선원들은 망원경, 스페인 레드 와인, 은으로 된 잔을 준비했다. 지휘관과 병마절도사가 좋아할 만한 물건이었다.
이들이 챙긴 와인은 무엇이었을까? 스페인 남부에서 생산된 셰리(Sherry) 와인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셰리는 17세기 유럽과 아시아 간 해상 무역 품목 중 하나였다. 증류주를 첨가해 알코올 도수를 높였기 때문에 부패하지 않아 장거리 운송에 적합했다. 셰리는 화이트 와인 아니냐고 반문할 수도 있겠지만, 당시에는 색상 구분이 지금처럼 명확하지 않았다. 포도 품종 및 숙성 정도에 따라 짙은 색을 띤 셰리 와인도 있었으니, 레드 와인이라고 부르더라도 이상하지 않았다.
하멜의 기록에 따르면 지휘관과 병마절도사는 와인 맛을 보고는 크게 만족하며 연거푸 마셨다고 한다. 이 때문인지 기분이 무척 좋아 보였고, 받았던 은잔도 다시 돌려주고 심지어 천막까지 바래다주었다고 한다. 굳이 은잔을 돌려받았다고 기록한 걸 보면 조선 관리의 청렴함에 깊은 인상을 받은 건 아닐까. 다만 망원경을 돌려받았다는 기록은 없는데...
(남은 이야기는 스프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