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쁜 현대인들의 일상 속에서 자신을 돌보는 잠깐의 '틈'을 만들어갈 수 있도록, 마음을 돌보는 일상의 라이프스타일을 제안합니다. 성인 4만 4천 명을 상담했던 장재열 상담가가 자신의 삶에서 소진을 겪었던 전문가를 만나 일상 속 멈춤과 쉼의 비결에 대해 묻습니다.
인터뷰어 : 장재열 (상담가 겸 작가, 월간 마음건강 편집장)
인터뷰이 : 나희경 (보사노바 음악가)
선구자라는 단어의 뜻을 정확히 아시나요? 남들이 가지 않는 길을 가는 사람? 자신만의 길을 가는 사람? 왠지 이런 느낌일 것 같지 않으세요? 그런데 백과사전을 보면 선구자라는 단어에 대해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1. 말을 탄 행렬의 맨 앞장에 선 사람.
2. 어떤 일이나 사상에 있어 그 시대의 다른 사람보다 앞선 사람.
생각보다 꽤 상대적인 개념으로 서술되어 있지요? 다른 사람보다 앞서간다는 말은 결국 다른 사람의 속도와 비교를 해서 나오는 결과니까요. 하지만 막상 실제로 한 분야의 선구자를 만나보면, 누군가보다 앞서 있다는 생각도, 앞서나가고 싶다는 욕망도 전혀 없는 분들이 대다수입니다. 아이러니하지 않나요? 남들보다 앞서고 싶은 욕망이 없는데 가장 앞서 있는 사람이 된다는 게 말이죠.
오늘 만나볼 인터뷰 주인공도 마찬가지입니다. 누군가보다 앞선 존재가 되기를 바란 적 없이, 그저 내가 가장 나다울 수 있는 환경을 찾아 떠난 용감한 이십대. 그리고 시간이 흘러 자연스레 한 분야의 선구자라 불리게 된 그녀, 보사노바 아티스트 나희경 님을 만나봤습니다.
장재열(이하 장) : 안녕하세요, 희경님. 자기 소개를 부탁드립니다.
나희경(이하 나) :
안녕하세요. 저는 보사노바라는 세계에 빠져 삶을 유랑하고 있는 음악가 나희경입니다.
장 : 삶을 유랑하는 음악가, 너무 좋은데요? 그런데 제가 희경 님에 대한 수식어 중에 가장 놀랐던 것은 '대한민국 보사노바의 선구자적 예술가'라는 말이었어요. 뭔가 선구자라고 하면 지긋한 어른 예술가가 떠오르는데, 아직 젊은 나이시잖아요. 이 수식어, 희경 님 본인은 어떻게 느끼셨어요?
나 :
일단 보사노바는 국내에 하는 사람이 많이 없어서. (웃음) 한국 음악계에서 보사노바만을 본격적으로 하는 예술가가 거의 없긴 했어요. 다만 보사노바를 비롯해 라틴 계열의 소스들을 활용한 노래들은 예전부터 가요계에 꾸준히 있었죠. 예를 들어 윤상 선배님의 <이사>, 김현철 선배님의 <춘천 가는 기차>, 유재하 선배님의 <우울한 편지> 같은 곡들이죠.
그런데 저 같은 경우는 브라질 현지로 직접 건너가서 1950년대부터 활동하시던 보사노바 1세대 선생님들께 사사하고 교류를 하면서 곡을 만들어간 경우이다 보니 그런 수식어를 붙여주신 게 아닌가 싶어요.
장 : 선례가 없었던 거네요. 브라질로 그야말로 혈혈단신 넘어가신 거라고 들었어요. 심지어 처음부터 음악 전공자도 아니셨다고, 심리학을 전공하셨다고 들었거든요. 그 용감함의 원천은 어디에 있을까요?
나 :
원천이라고 하면... 눌려왔던 열망이라고 표현해야 할까요? 강한 열망이라고 해야 할까요. 사실 제가 어릴 때부터 음악 자체는 계속 만들어왔거든요. 초등학생 때부터 미디라는 툴을 통해서 음악을 만들었으니까 굉장히 오래전에 시작을 한 거죠. 제 초등학교 졸업앨범에 보면 장래 희망이 컴뮤지션이라고 적혀있어요. 그때는 잠깐 그런 단어가 유행했었어요.
청소년기에도 밴드를 만들어서 활동했었는데요. 정확히는 퓨전 오케스트라를 만들었어요. 제가 그 학교 1회 졸업생이었거든요. 모든 게 처음이라 다양한 시도를 학교에서 지원해 줬지요. 밴드를 만들고 싶었는데 사실 중1 때 베이스기타, 전자기타를 잘 치는 아이들이 흔치는 않으니까 초등학교 때 피아노나 바이올린을 배운 아이들을 모으고, 저는 원래 기타를 치고 있었기 때문에 기타를 맡고 그렇게 퓨전이 된 거예요.
사실 음악을 만들고 공부하는 건 부모님께서도 지원을 많이 해주셨어요. 아침마다 음악을 들으며 아침 식사를 하는 분위기였고, 어머니도 피아니스트를 꿈꾸셨으니까요. 그런데 현실적인 이유로 전공까지는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반대하셨어요. 제가 가고자 하는 분야는 실용음악 전공이었는데 청소년기에 저의 학업 성적은 꽤 상위권이었거든요. 고등학교 때는 전교 부회장도 하고 있었고. 그러다 보니 부모님께서는 공부로 승부를 봐서 우리가 보편적으로 생각하는 좋은 학교를 진학하기를 바라셨어요.
그런데 저는 그러기에는 너무 확고한 자신의 취향과 관점이 있었던 아이였던 거죠. 어릴 때부터 이미 상당히 마니아 성향이 강했거든요. 일례로 청소년기에는 편집 음악 테이프가 유행했었는데요. 맥스라고 해외 팝 편집 테이프를 팔았어요. 그러면 저는 그 곡 중에서도 라틴 계열의 곡들이 그렇게 좋았어요. 다른 친구들이 브리트니 스피어스, 아니면 H.O.T.나 S.E.S. 포스터를 방에 붙여놓을 때 저는 산타나의 <마리아 마리아>라는 곡에 흠뻑 빠져서 (웃음) 제 방안에는 산타나라든가 에릭 클랩튼의 포스터가 붙어있고 그랬지요.
장 : 그 정도의 열망이 있었다면, 심리학과를 진학한 것은 특별한 이유는 없었겠네요?
나 :
아니에요. 저는 원하지 않는 걸 억지로 할 수 있는 타입은 못 돼요. 어떤 전공을 음악이랑 어떻게 같이 하면 시너지를 낼 수 있을까? 고민하다 후보로 나온 게 심리학이었는데요. 상담 심리가 아니고 지각인지심리학 분야였어요. 쉽게 말해 음악을 듣는 사람들에게 마음속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를 연구하는 학문이죠. 저는 실제로도 그게 너무 궁금했거든요. 음악을 들으면서 사람들의 감정이나 마음은 어떻게 변할까, 그걸 알면 더 음악을 잘 만들 수 있을 것 같고요.
그래서 고등학생 때 인터넷 검색을 해보다가 우연히 한국음악지각인지학회라는 학회를 발견한 거예요. 그런데 당시 거기 회장님이 김경일 아주대 심리학과 교수님이었거든요. 그래서 이거다! 하고 아주대 심리학과에 입학했지요. 입학하자마자 오리엔테이션 때 손들고 그거 하러 왔다고 말했어요.
장 : 우리가 아는 '그 김경일' 교수님 말씀이죠?
나 :
네. '그 김경일' 교수님요. 이후로 교수님 따라다니면서 학회 OT도 같이 가고 세미나도 듣고, 그렇게 지각 인지심리학에 푹 빠졌지요. 다만 어릴 때라서 학회에 회장이 선출직으로 2년에 한 번씩 바뀐다는 걸 몰랐어요. (웃음)
장 : 정말 앞서 말씀하신 열망이라는 단어가 온몸으로 느껴지는 에피소드들이 많은 것 같은데요. 신입생 때 교수님께 손 번쩍 들고 그런 이야기 하기도 쉽지 않고, 중학교 신입생 때 퓨전 오케스트라를 만든 것도 그렇고... 말씀을 듣다 보니 브라질로 건너가신 것도 두려움 없이 훌쩍 떠나셨을 것만 같기도 한데요.
나 :
오, 또 그렇진 않아요. 많은 예술가가 그런 경향이 있겠지만 저 역시 감각이 예민하고 민감한 편이에요. 자연히 불안한 감정도 자주 느끼면서 살아가거든요. 감정이 다이내믹해서 고저가 있었고 고민도 있었어요. 그런데도 브라질행을 결정하면서 제일 먼저 떠올렸던 것은 뭐랄까요. 사랑이라고 할까요, 순수한 열망 같은 사랑. 그 모든 불안과 걱정을 압도하는 열망이 정말 컸지요.
대학을 졸업하고 부모님께서 늘 말씀하시던 '사회인'이 되어 내가 내 삶의 결정권을 가지게 된 순간, 오랫동안 반대되어 온 '음악'에 대한 포텐이 빵 터졌다고 할까요?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나는 한번 해봐야겠다. 아무도 안 도와줘? 그럼 내가 혼자 할 거야. 이런 마음이 생겼지요. 하고 싶은 게 있었지만, 현실적인 것들로 인해 아주 눌려왔기 때문에, 그 오래 억눌린 열망을 활용해서 불안을 압도할 수 있었다고 할까요?
장 : 말씀 듣다 보니 그런 말이 떠오르네요. '압력 없이는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다'고요. 오히려 너무 오랫동안 반대라는 압력을 경험하셔서 용수철처럼 튕겨 나가듯 브라질행을 용감하게, 그리고 신속하게 결정할 수 있었을 수도 있겠네요. 그게 몇 살 때였죠?
나 :
만 스물두 살이었어요. 2010년 말 데뷔 앨범을 보싸다방이라는 명의로 냈었고요. 앨범을 내자마자 브라질로 바로 갔어요. 사실 앨범을 내면 활동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잖아요. 저는 근데 아주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 내가 해온 음악 활동에 대한 한 문단의 마침표를 찍는 앨범이라고 느껴졌어요. '아, 한 문단이 끝났구나.' 그래서 이 앨범을 녹음하면서 이 앨범을 가지고 어떻게 활동할지 그런 생각은 없었고, 오히려 녹음실에서 아주 좋은 음질로 녹음하다 보니 더욱 브라질에 얼른 가야겠다는 생각이 커지더라고요.
음악감독님께 브라질 음악 샘플들을 들려드리며 녹음 방향을 잡아나가는데, 그 좋은 음질과 환경에서 브라질 음악을 들을수록 '아, 이 디테일은 정말 현장에 가서 배우고 느끼지 않으면 내 안에 녹여낼 수가 없겠구나. 가지 않으면 경험할 수 없겠다' 싶었죠. 이 생각이 든 것도 심리학을 전공한 덕이 정말 컸다고 생각한 게, 인간이 혼자 힘으로 변화하는 건 가장 힘든 일이라는 걸 늘 배우거든요. 하지만 환경을 변화하게 해준다면 정말 많은 변화가 일어나요. 그래서 저 자신도 이 장르의 음악이 만들어지는 환경에 가야겠다. 뭘 배우고 공부하고 이런 걸 다 떠나서 그냥 내가 그 환경으로 들어가야겠다고 생각했죠.
장 : 그럼 처음부터 음악 공부를 한 것이 아니네요?
나 :
네. 그냥 처음엔 가서 반년 머무르면서 하숙집을 잡고, 영어도 포르투갈어도 할 줄 몰랐지만 일단 그 환경에서 지내봤어요. 관광을 가고 이런 건 거의 안 하고요. 하숙집 아줌마랑 장 보러 다니고, 공연 보러 가고 그랬죠. 그리고 참 좋았던 게 하숙집 아저씨가 전통악기 연주자이셨고 아줌마는 그림 그리는 분이었어요. 그래서 주말마다 예술가들의 파티 같은 게 열려서 자연히 교류하게 됐죠.
그러다 보니 단순히 음악만 배운 게 아니라 표현과 감정을 배우게 되더라고요. 포옹과 키스같이 접촉으로 애정을 주고받는 경험부터 "사랑한다", "당신 멋지다"라고 더 풍부하게 이야기하게 되고, 행복함이 늘어나고, 또 표현이 풍부하고 행복한 사람이 되니까 나라는 사람의 매력이 늘어나는 게 느껴지고요. 분명히 보사노바 공부를 하고 다음에 안 갈 수 있었을 텐데 이 감각을 느끼러 가게 되고 또 가고 또 가고 그렇게 14년간 브라질과 한국의 양국을 오가고 있네요.
장 : 처음엔 음악에 매료되어서 떠났지만, 그곳의 정서 자체를 사랑하게 된 거네요. 그런데 제가 일전에 희경 님과 차를 마시는 자리였나요? 그때 언뜻 듣기로는 문화가 상당히 달라서 무조건 좋은 것만은 아니었다고 하셨던 것 같은데요.
나 :
아, 맞아요. 그 이야기하시는 거죠? 완전 MBTI P만 있는 나라 같다고 제가 말한 거요. 일례로 브라질에서 투어가 잡혀서 준비하는데, 출국 2주 전에 투어 취소됐다는 이야기가 나왔다가 그래도 일단 가기로 했으니 가야겠다 하고 비행기 탑승하려고 보니까 추가로 공연이 두세 개 더 잡혀있고 뭐 그런 일이 다반사예요. 그래서 브라질에 가면 브라질의 흐름에 몸을 맡기죠. 반대로 한국에 와서 활동하는 기간에는 한국 양식으로 세팅이 자동으로 되어요. 이제는.
처음에는 그 균형을 찾는 게 쉽지 않았거든요. 저는 양국에서 다 활동하니까. 특히나 브라질에서 시간을 보내고 한국에 처음 들어왔을 때는 우왕좌왕했어요. 브라질에서 연주하고 직접 사사해 온 사람이 제가 처음이었으니까, 많은 음악계의 선배님들이 같이 연주하자고 연락을 주시고 그랬어요. 너무 감사했지요. 만 스물세 살짜리가 대학 교수님인 음악가 선배님들이랑 연주하게 됐는데, 최소 띠동갑이었거든요. 그런데 사실 브라질에서는 띠동갑을 넘어서 완전 할아버지 음악가와도 그냥 함께 어우러져서 친구처럼 연주했단 말이에요. 근데 한국은 문화가 다르잖아요. 이 교수님들께 실례하지 않으면서 어떻게 같이 자연스럽게 어우러질 수 있을까, 내가 실수한 건 없나, 뭐가 맞는 거지? 어느 환경에 맞춰야 하는 걸까? 오래 우왕좌왕했어요.
장 : 그 우왕좌왕의 끝에는 어떤 결론이 있었나요?
나 :
어느 환경에 맞추는 것이 정답이 아니라는 결론을 냈지요. 나는 음악가로서 "내가 설정한, 그리고 내가 믿는 방식, 내가 대하는 태도로 해나가면 된다"는 게 결론이었어요. 이십대 초반에는 바뀐 환경에 나를 밀어 넣으면 그 환경의 영향으로 내가 바뀔 거라는 생각을 했다면, 이제는 내가 중심을 잡고 나면 내 신념과 내 관점을 기반으로 주변 환경이 바뀐다는 걸 깨닫게 되었죠. 이 깨달음을 얻기까지 한국에서도 나희경답게, 브라질에서도 나희경답게를 찾는 시간이 필요했어요. 그래서 우왕좌왕한 시간이 아주 필요했던 순간이라고 봐요.
장 : 그러고 보니 나다움에서 비롯된 또 한 번의 환경 변화가 있었다면서요?
나 :
맞아요. 대학원을 진학했어요. 이번에도 심리학인데요. 얼마 전 면접하러 갔더니 김경일 교수님이 깜짝 놀라서 네가 왜 여기 있냐고 물으시더라고요. (웃음)
장 : 그러게요. 이제는 보사노바 음악가로 온전히 자리를 잡으셨는데, 아니? 얘가 또 왜 심리학 대학원에 온다는 거지? 하셨을 것 같은데요.
나 :
정확해요. 그런데 고3 때 심리학과를 갔던 게 내 음악 활동을 위해서였다면, 이번에는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공부를 해보고 싶더라고요. 제가 코로나19 기간 브라질을 한동안 못 가고 한국에 오래 머물렀는데, 그 기간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쳤어요. 그런데 실용음악은 1대1로 가르치는 경우가 많아서 학생들이 꽤 많이 제게 마음을 털어놓게 되거든요. 예술인, 프리랜서들 같이 사회적 공동체 감을 느끼기 어려운 사람들이 느끼는 불안감이 있잖아요. 아, 내가 심리 상담학을 전공하면 이 아이들을 더 도울 수 있겠다. 나아가서 예술인 전반을 도울 수도 있겠다 하는 생각이 들었지요.
장 : 그렇다면 요즘 가장 마음이 쓰이는 유형의 사람은 막 시작하는 주니어 예술인들일까요?
나 :
그들을 포함해서... 요즘에는 고군분투하는 사람 전반에 마음이 쓰여요. 예전보다 더 불투명해진 이 세상 속에서 무언가를 찾아나가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사람들요. 그런 분들께 늘 "삶의 이 순간에 마음을 쓰고 있는 당신 자체가 너무 아름답습니다. 그리고 소중합니다"라고 이야기해 주고 싶어요.
사실 목표가 있고 골을 생각하다 보면 거기까지 도달하는 중에 고군분투하는 모습의 자신은 좋아해 주기 어려워요. 하지만 생각보다 많은 열망하는 대상은 막상 이루고 나면 "정말 바란 게 이거였나?" 싶을 정도로 환희감이 금세 사라지기도 해요. 저 역시 열망을 향해 첨예하게 살아왔지만, 많은 것을 달성한 뒤 이제 와서 느껴지는 것들은 뒤돌아보았을 때 고군분투해온 그 모든 순간이 아름다운 거였구나. 깨닫게 되었죠.
(남은 이야기는 스프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