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페퍼민트 NewsPeppermint
"한국에는 없지만, 한국인에게 필요한 뉴스"를 엄선해 전하는 외신 큐레이션 매체 '뉴스페퍼민트'입니다. 뉴스페퍼민트는 스프에서 뉴욕타임스 칼럼을 번역하고, 그 배경과 맥락에 관한 자세한 해설을 함께 제공합니다. 그동안 미국을 비롯해 한국 밖의 사건, 소식, 논의를 열심히 읽고 풀어 전달해 온 경험을 살려, 먼 곳에서 일어난 일이라도 쉽고 재밌게 읽을 수 있도록 부지런히 글을 쓰겠습니다. (글 : 송인근 뉴스페퍼민트 편집장)
지난 6일 미국 캘리포니아 남부 LA 주변 곳곳에서 동시에 발화한 산불 피해가 걷잡을 수 없이 커지고 있습니다. 글을 쓴 13일 아침 현재 최소 16명이 목숨을 잃었고, 두 곳의 불길은 여전히 잡히지 않아 불에 탄 면적도 계속 빠르게 늘어나고 있습니다. 수십만 명이 대피했고, 재산 피해는 아직 추산조차 어려운 상황입니다.
이번 산불은 왜 난 걸까요? 어렸을 때 매년 11월 불조심의 달을 맞아 포스터를 그린 기억을 더듬어 보면, 산불이 난 결정적인 원인을 잘 찾으면 밝혀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최근 들어 발생하는 산불은 갈수록 원인을 특정하기 어려워졌습니다.
이번 LA 산불도 마찬가지입니다. 기후변화를 막지 못해 극심한 기후 재난이 점차 잦아지는 추세가 고스란히 반영된, 전형적인 요즘 산불입니다. 이 말은 곧 산불이 어떤 이유로 났다고 한두 가지 요인을 확실히 꼽기 어렵다는 뜻입니다. 물론, 그러든 말든 쉽게 답을 내려는 사람들이 있겠지만, 그 명쾌해 보이는 답이 반드시 정답이란 보장은 없습니다.
여러 가지 원인이 얽혀있다는 두루뭉술한 대답이 그나마 정답에 가까울 텐데, 유발 하라리가 지적한 것처럼 진실은 원래 복잡하고 여러 가지 요인이 애매하게 얽히고 꼬여 있기 마련입니다. 완벽한 사실 혹은 흠결 없는 진실이란 우리 주변에서 찾기 어렵습니다. 그런데 그래서 사실에 가까운, 대부분 과학자가 동의하고 합의한 명제에도 항상 음모론과 거짓말이 비집고 들어올 틈이 있습니다. 100% 확실하게 설명할 수 없는 부분들을 유사 과학자와 음모론자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자양분으로 삼습니다. 석연치 않은 구석을 집중적으로 공략해 사실로 굳어져야 하는 가설의 신뢰를 떨어뜨리는 작전이 늘 성공하는 건 아니지만, 반대로 절대로 사라지지 않고 질긴 생명력을 유지합니다.
▶ 뉴욕타임스 칼럼 보기 : '여기선 살 수 없다'... 기후학자가 LA를 떠날 때가 왔다고 느꼈을 때
평소에 지구의 평균 기온 상승을 이야기하는 글이었다면, 기후과학자의 견해를 신중히 소개하고 과학자들이 말하는 여러 단서와 가정들을 최대한 빠짐없이 담으려 했을 겁니다. 그러나 지금은 미국에서 두 번째로 큰 도시에서 그 누구도 별일 아니라고 치부할 수 없는 기후 재난이 발생한 상황입니다. 기후 재난이 인간이 초래한 기후변화 때문에 일어났거나 최소한 훨씬 더 심해졌다는 사실을 부정하고 부인하는 사람은 비판받아야 하고, 심지어 기후변화라는 명백한 원인을 일부러 빼놓거나 축소하려는 저의가 있다면 이 또한 문제 삼아야 할 때입니다. 이번 산불이 일어난
을 하나 꼽으라면, 인간이 초래한 기후변화로 더워지다 못해 뜨거워진 지구가 언급돼야 합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이렇습니다.
2024년은 인간이 기온을 측정하기 시작한 이래
입니다. 2024년 전에 가장 더웠던 해는 언제였을까요? 바로 직전인 2023년입니다. 한두 해 유달리 더웠던 게 아니라, 지구 자체가 계속 뜨거워지고 있다는 뜻입니다. 실제로 가장 더웠던 해 1위부터 10위가 모두 2010년대 이후에 몰려 있습니다. 지구가 더워지고 있고, 그 속도가 빨라지고 있다는 건 자명합니다.
LA가 있는 남부 캘리포니아의 겨울, 특히 1월은 원래 우기입니다. 우기라고 많은 비가 내리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건조한 다른 계절에 비하면 비가 와야 정상입니다. 그런데 지난 두 번의 겨울, 남부 캘리포니아에는 비가 너무 많이 내렸습니다. (내륙 산간에는
지난여름 늦게까지 자연설 위에서 스키를 탈 수 있었을 정도죠.) 예년보다 훨씬 많은 비가 내린 결과, 숲에 풀과 나무가 더 많이 나고, 웃자랐습니다. 그런데 올겨울은 이례적인 가뭄이 들었습니다. 남부 캘리포니아에서 마지막으로 비다운 비가 내린 게 지난해 5월 5일이었습니다.
마른 장작을 쌓아놓은 듯한 건조한 숲에 이맘때면 부는 산타 아나 바람이 불어옵니다. 산타 아나 바람은 연초 캘리포니아 동쪽 유타나 네바다주 사막에서 태평양 쪽으로 부는 바람입니다. 사막 지대의 건조하고 뜨거운 공기가 불어오는 것 자체는 원래 있던 현상이니 기후변화와 무관하지만, 지구가 더워지면서 그 바람이 태풍에 맞먹는 거대한 규모로 불어오게 된 건 기후변화가 아니면 원인을 설명하기 어렵습니다. 바짝 마른 낙엽, 수풀, 잡목을 태양이 내리쬐다 보면 자연적으로 불이 납니다. 이 불을 삽시간에 번지게 하는 건 초속 40m가 넘는 뜨거운 산타 아나 바람입니다. 바람이 너무 세서 초기에 소방 헬기를 띄워 불을 끌 수도 없습니다.
캘리포니아주는 원래 산불이 자주 일어나는 곳입니다. 거기서도 인구 400만 명이 사는 가장 큰 도시인 LA 주변은 당연히 산불에 대비해 소방 인프라가 구축돼 있습니다. 산불이 났을 때 가장 먼저 지켜야 하는 게 당연히 사람의 목숨이니, 거기에 맞춰 소방 시설과 장비, 인력이 배치돼 있고, 경험 많은 베테랑 소방관도 많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급속도로 번지는 커다란 산불이 무려 네 군데에서 동시에 일어났습니다. 아무리 잘 대비된 소방 당국이라도 손 쓰기 어려운 수준이었죠. 점점 더 극심해지는 기후 재난이 끝내 매뉴얼에 없는 수준으로 덮친 겁니다.
이번 산불을 포함해 최근의 기후 재난은 더워진 지구 때문에 극심한 수준으로, 훨씬 더 자주 일어나고 있습니다. 지난해 허리케인 헬린은 예상치 못한 노스캐롤라이나 내륙 지역에 폭우를 뿌려 엄청난 피해를 냈고, 2023년에는 하와이 산불로 100명 넘는 사람이 숨졌습니다. 지구가 더워진 건 화석연료를 비롯한 인간의 산업 활동 때문입니다. 여러 가지 원인이 있겠지만, 인간의 활동을 빼고는 설명할 수 없습니다. 인간은 산업혁명 이후 꾸준히 지구의 온도를 높였고, 지금도 계속 지구를 덥히는 데 이바지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몇 년 안에 지구의 온도가 오르는 추세를 낮추지 못하면 큰일 난다는 경고를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지만, 추세는 변하지 않고 오히려 더 가팔라지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는 마감을 수시로 어긴 대가를 치르고 있는 셈입니다.
더 암울한 건 이런 재난이 반복해서 일어나는데도 반전의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해결책에 관한 논의는커녕 어쩌다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에 관해서도 우리는 합의를 이루지 못했습니다. 이렇게 자명한 과학적 사실이 있는데,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요? 완벽하기 어려운 사실의 틈에 거짓말과 음모론을 끼워 넣을 때 이득을 보는 이들이 여전히 있으며, 우리 사회의 담론에 매우 큰 영향력을 끼치기 때문입니다. 캘머스 박사가 칼럼에 언급한 화석연료를 기반으로 하는 에너지 기업들입니다. 이들은 과학자들이 합의하거나 대체로 동의하는 사실에 교묘히 딴지를 걸거나 노골적으로 반박하며, 아니면 양비론을 앞세워 세상의 관심을 다른 데로 돌리며 기후변화 대책을 번번이 무산시켰습니다.
과학적 사실이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는 게 놀랍기도 하지만, 사실 이들의 작전은 앞서 설명한 원리, 즉 진실은 원래 복잡하고 완전하게 이해하기 어렵기 때문에 틈이 많다는 점을 고려하면 꽤 잘 먹히는 전략입니다. 일반 대중들의 태도도 어느 정도 이해가 갑니다. 원래 나한테 일어나지 않으면 실감하고 공감하기 어려운 법입니다. 총기 난사 사건으로 수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어도 총기 규제에 관한 논의가 반짝 일었다 사라지는 이유도, 오피오이드 위기로 인한 "절망의 죽음"에 많은 사람이 무심한 것도 비슷합니다. 심지어 하와이에서 일어난 산불도 직접 보고 온 사람의 이야기를 들으면 끔찍한 재앙이었지만, 미국 본토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어떤 면에서는 "강 건너 불구경"이었습니다.
다만 이번에 거대한 산불이 일어난 곳이 미국에서 두 번째로 큰 도시 LA였다는 점에서 이번에는 사람들이 정말로 기후변화로 인한 재난이 심각한 수준에 이르렀다는 사실을 깨닫는 계기가 될 수도 있습니다. 사실 그동안 기후변화를 일으킨 건 사실 산업혁명을 선도한 나라들이었지만, 정작 그 피해는 기후변화에 기여한 게 거의 없는 약소국의 저소득층에 집중되는 모순 아닌 모순이 있었습니다. 물론 선진국 안에서도 기후 재난으로 이재민이 되는 건 저소득층과 취약계층일 가능성이 큽니다. 해수면 상승으로 섬이 물에 잠겨 나라가 없어질 위기에 처한 남태평양 섬나라도 그렇고, 미국에서도 플로리다와 조지아 해안 지대에 침수 위험을 무릅쓰고 살던 집에서 계속 사는 사람들은 대부분 위험해도 어디 갈 데가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이번 피해는 수많은 사람이 두 눈으로 똑똑히 봤습니다. 어쩌면 이제 지구 반대편에서 일어나는 기후 재난이 더는 남의 일처럼 보이지 않을 수 있습니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당선인과 트럼프 2기 행정부 실세 중의 실세인 일론 머스크는 기후변화를 부정해 온 세력들이 쓰던 전가의 보도를 이번에도 꺼내 들었습니다. 과학적 사실을 앞세우는 대신 부정적인 의미의 "정치화"를 통해
를 하는 전략입니다. 먼저 트럼프는 (민주당이 다수당인) 캘리포니아 주정부의 무능함을 지적했습니다. 소방 당국이 무능해서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고 주장했습니다. 머스크도 마찬가지로 다양성과 평등, 포용성을 뜻하는 DEI를 들먹였습니다. 능력이 아니라, 다른 쓸데없는 기준으로 사람을 뽑고 일을 맡긴 탓에 피해가 커졌다는 주장입니다. 다분히 현재 LA 소방청장인
를 겨냥한 공격이었습니다.
(남은 이야기는 스프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