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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해범 옹호가 "정의 구현"? '피 묻은 돈'을 진정 해결하려면… [스프]

[뉴스페퍼민트] (글 : 송인근 뉴스페퍼민트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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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는 없지만, 한국인에게 필요한 뉴스"를 엄선해 전하는 외신 큐레이션 매체 '뉴스페퍼민트'입니다. 뉴스페퍼민트는 스프에서 뉴욕타임스 칼럼을 번역하고, 그 배경과 맥락에 관한 자세한 해설을 함께 제공합니다. 그동안 미국을 비롯해 한국 밖의 사건, 소식, 논의를 열심히 읽고 풀어 전달해 온 경험을 살려, 먼 곳에서 일어난 일이라도 쉽고 재밌게 읽을 수 있도록 부지런히 글을 쓰겠습니다. (글 : 송인근 뉴스페퍼민트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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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가 갑작스러운 계엄령과 탄핵 정국으로 혼란의 나날을 보내는 사이 미국 언론의 1면을 차지한 뉴스는 의료 보험사 유나이티드헬스케어의 CEO 브라이언 톰슨이 뉴욕 맨해튼 한복판에서 총에 맞아 살해당한 사건이었습니다. 경찰은 사건 닷새 만에 용의자 루이지 만지오네(26)를 펜실베이니아주 알투나에서 체포했고, 만지오네는 피의자 신분으로 전환돼 수사를 받았으며, 범행을 저지른 뉴욕시 맨해튼 법정에서 재판이 열릴 예정입니다.

총기 관련 사건이나 사고로 목숨을 잃는 사람이 워낙 많은 미국이지만, 이번 사건이 특히 세간의 관심을 끈 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우선 범인은 표적을 명확히 정해놓고 범행을 저질렀습니다. 훤한 대낮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어둠이 걷히고 주위가 많이 밝아진 시간대인 아침 6시 30분경에 범행을 저질렀습니다. 희생자는 미국 최대 의료보험사 가운데 하나인 유나이티드헬스케어의 CEO였고, 범행에 사용한 총기가 재료만 사면 3D 프린터로 몇 분 만에 만들어낼 수 있지만, 제품에 일련번호가 없어 추적과 관리가 어려운, 이른바 유령 총기(ghost gun)였다는 점도 주목을 받았습니다.

이런 여러 가지 특이점 중에도 사람들은 특히 범인이 사건 현장에 아마도 일부러 남긴 것으로 보이는 세 단어가 주는 메시지에 주목했습니다. 현장에서 발견된 탄피에는 "거부"를 뜻하는 "deny", "연기 또는 지연"을 뜻하는 "delay"가 적혀 있었고, 나중에 경찰 수사를 통해 "폐위시킨다, 끌어내린다"라는 뜻의 "depose"란 단어도 쓰여 있었다는 사실이 추가로 밝혀졌습니다.

의료보험사 CEO가 살해당한 현장에서 발견된 단서 같은 세 단어를 보고 많은 사람이 곧바로 상당히 비슷한 경험을 앞다투어 공유하기 시작했습니다. 의료보험사에서 본인이나 가족이 치료를 받아야 할 때 보험금 지급을 "거부"했거나 "차일피일 미루는 통에" 제때 치료를 못 받아 얼마나 고생했는지, 심지어 그로 인해 사랑하는 가족을 잃거나 오랫동안 장애를 갖게 됐다는 증언들이었습니다. 미국에서 살아본 사람들은 대부분 공감할 수 있는 내용이었죠.

미국은 우리나라와 같은 전 국민

의료보험

이 없습니다. 연방 정부가 65세 이상 의료보험 메디케어(Medicare)를 제공하고, 저소득층이나 지원이 필요한 계층에 연방 정부와 주 정부가 의료비를 보조하는 메디케이드(Medicaid)가 있으며, 여기에 퇴역 군인 의료보험인 보훈 보험(veteran's healthcare) 정도를 제외하면, 대부분 시민은 민간 부문의 사기업이 제공하는 의료보험에 들어야 치료비나 약값을 보조받을 수 있습니다. 의료비 지출이 워낙 많아서 병원비나 약값 때문에 파산하는 사람도 많고, 아예 보험료를 감당할 수 없어서 보험 없이 사는 사람도 전 국민의 10%에 육박합니다. (원래는 15% 언저리였는데, 그나마 오바마 대통령 때 건강보험 개혁안(Affordable Care Act, 일명 오바마케어)이 통과되면서 보험 없이 사는 사람 비중이 10% 이하로 줄었습니다.)

그런데도 의료비 지출 대비 국민의 평균 수명을

그래프

위에 그려보면, 미국은 홀로 동떨어져 있습니다. 평균적으로 의료비에 돈을 훨씬 더 쓰고도 사람들이 오래 못 사는 거죠. 살아있는 사람 중에도

건강하지 않은 사람

이 많습니다. 의술이 발달해 평균 수명이 늘어난 결과라고 볼 수도 있지만, 돈은 돈대로 쓰고 혹은 돈이 없어 파산에 이르면서도 제대로 치료를 받지 못해 고통 속에 사는 사람도 꽤 있다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통계 데이터에서 발견할 수 있는 사실이 아니라, 사람들이 직접 겪은 사례를 풀어낸 일화들은 훨씬 더 생생합니다. 제 기능을 하지 못하는 망가진 의료보험 제도 때문에 내 삶이 얼마나 끔찍해졌는지 공유하던 사람들은 나만 이런 고통을 겪는 게 아니었다는 것을 확인한 뒤 점점 더 보험사들을 향한 비판의 수위를 높였습니다. 이어 살해를 정당화하거나 심지어 미화하는 목소리도 나왔습니다.

의료보험사는 사람 목숨보다 돈을 더 소중히 여기는 악마와 다름없는 기업이고, 실제로 그 욕심 때문에 내가 죽을 뻔했거나 사랑하는 가족을 잃었거나 돈을 빼앗겨 끔찍한 삶을 살게 됐으므로, 그 회사를 대표하는 사람이 목숨을 잃은 건 물론 그 자체로 끔찍한 일이지만, 응당 받아야 할 벌을 받은 거로도 볼 수 있다는 식의 주장이었습니다. 아무리 그래도 살인을 정당화해서는 안 된다는 반론이 나왔지만, 이내 "당신은 돈이 많고 운이 좋아서 지금껏 의료보험료를 감당할 수 있었기 때문에 이 고통을 모르기에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것"이라는 차가운 재반론에 묻히고 맙니다.

피의자 만지오네에 대한 재판은 맨해튼 형사 법정에서 열릴 예정인데, 뉴욕 시민 중에 배심원으로 선정되면 재판에 참여해 만지오네에게 무죄를 평결하겠다고 공개적으로 밝힌 이들도 있습니다. 모두가 그렇지는 않겠지만, 적지 않은 사람이 만지오네를 부패하고 타락한 사회 제도가 그동안 구현하지 못한 정의를 직접 시행한 의로운 영웅처럼 묘사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이런 목소리는 (전통적인 의미에서) 정치적 이념의 좌우를 막론하고 나타났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생명윤리학자 트레비스 리더가 글을 썼습니다. 문제투성인 미국 의료보험 제도에 불만이 있을 수 있고, 얼마든지 문제를 지적할 수 있지만, 아무리 그래도 CEO가 명백히 살해당한 걸 미화하는 건 잘못됐다는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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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뉴욕타임스 칼럼 보기 : "살해범인데 칭송한다고?... 망가진 시스템은 핑곗거리가 될 수 없다"

미국인도 아니고, 미국에 10년 넘게 살면서 의료보험에 관해 격렬한 반응을 불러일으킬 만한 경험을 한 적도 다행히 아직 없지만, 저도 리더의 의견에 동의합니다. 제도의 문제는 힘들고 오래 걸리더라도 제도를 고쳐서 해결해야지, 제도를 건너뛰거나 무시한 채 권선징악 구도로 접근하는 건 사람들에게 강렬한 카타르시스를 선사할지 몰라도 근본적인 해결책이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결국, 이번 사건과 그를 둘러싼 논란은 문제를 지적하고 해결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목소리를 내되 넘지 말아야 할 선을 어디에 그을 것인가로 귀결됩니다.

의료보험사, 제약사들이 오랫동안 천문학적인 이익을 낸 건 주지의 사실입니다. 그중에는 물론 최첨단 의술을 제공한 데 대한 정당한 보상과 대가도 있겠지만, 적지 않은 부분이 환자가 치료받을 수 있는 권리를 적당히 제약하고 기업의 이익을 우선시할 수 있도록 한 규제-규제를 철폐하거나 규제 공백 상태를 방치한 것도 규제 당국이 선택한 결과라고 부를 수 있다면- 덕분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제도는 쉽사리 고쳐지지 않습니다. 이미 다양한 이익 집단의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얽혀 있기도 하고, 한 번 뿌리를 내리면 쉽사리 바꾸기 어려운 속성도 있죠. 그렇다고 제도의 피해를 본 사람이 직접 망가진 시스템에 이바지한 주체를 처단하는 건 꼬리에 꼬리를 무는 복수를 낳을 뿐 문제를 해결하는 데는 별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극히 예외적인 상황을 빼면 폭력을 정당화할 수 없다는 원칙에 동의한다면, 이번 일은 망가진 의료보험 제도에 경종을 울린 한 차례 비극으로 그쳐야 합니다. 다음번 폭력의 전조가 되는 일은 막아야 합니다. 그러려면 제도를 무시한 채 법을 어겨가며 직접 벌을 내리려 한 피의자에게 응분의 처벌을 내리는 것도 중요하지만, 제도 자체를 고치는 일에도 당장 나서야 합니다.

앞서 이번 사건에서 피의자 만지오네를 두둔하는 목소리가 보수, 진보를 막론하고 양쪽 진영에서 다 나온다는 점이 흥미롭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이를 뒤집어 말하면 공화당, 민주당을 막론하고 이른바 주류 기득권 정치인 중에는 망가진 의료보험 제도를 뜯어고쳐야 한다고 적극적으로 나서는 이가 별로 없다는 뜻도 됩니다. 이는 의료보험사와 기업형 병원, 대형 제약사들이 벌인 꾸준한 로비가 효과를 발휘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만약 전통적으로 기업형 로비가 미치지 못한 이들이 정책을 입안하고 집행하게 되면 지금까지 나온 것과는 다른 해결책이 나올 수도 있습니다.

(남은 이야기는 스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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