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국 파이낸셜타임스 본사 (런던/사진=정혜진 기자)
현지시간 지난달 24일, 영국 일간지 파이낸셜타임스(Financial Times, 이하 'FT') 런던 본사 편집국 사무실 곳곳에는 '등불(Lantern·랜턴)'이 켜져 있었습니다. '랜턴'은 FT 기사를 읽고 있는 독자 데이터를 실시간으로 분석해 편집국 구성원에게 전달하는 내부 시스템이면서 동시에 대시보드 이름입니다. 랜턴 데이터는 FT의 실시간 온라인 큐레이션 전략과 종이 신문 지면 배치 계획의 핵심으로 꼽힙니다.
▲ 파이낸셜타임스 홈페이지 '랜턴'
방문 당시 랜턴 대시보드를 보면, '블라디미르 푸틴, 우크라이나로부터 쿠르스크 탈환 위해 북한 병력 투입 검토(Vladlmir Putin bets on North Korean troops to retake Kursk from Ukraine)'라는 기사가 FT 홈페이지와 모바일 앱에서 구독자들이 가장 많이 읽은 기사 8위에 올라 있었습니다. 이 시각 현재 141명이 읽고 있으며 지금까지 총 2만9천838명이 읽었으며 독자들이 이 기사에 머문 평균시간은 2분37초, 플랫폼 기준으로는 PC에서 30, 모바일에서 70 비율로 소비되고 있다는 정보가 자세히 담겼습니다.
▲ 파이낸셜타임스 영국 런던 본사 (런던/사진=정혜진 기자)
리사 맥클러우드 FT 전략 담당은 “랜턴은 단순한 페이지뷰(page view) 집계가 아니라, 기사에 대한 독자의 참여도를 평가하기 위해 스크롤의 깊이, 페이지에 머문 시간, 접근 경로 등에 가중치를 두고 독자가 기사의 몇 %를 읽었는지를 측정하는 ‘퀼리티 리드(Quality Read·양질의 기사 읽기)’ 지표를 사용한다”고 설명했습니다. 랜턴은 지난 2016년 머신러닝 기술 기반으로 도입됐는데, 최근 생성형 AI 기술도 결합해 성능을 대폭 높인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잭 리 FT 전략부 AI 컨설턴트는 “전문용어가 많이 나오는 FT 기사 특성에 맞춰 독자들에게 생성형 AI 기반의 용어 설명 서비스인 ‘FT 데피니션(FT Definition·FT 정의)’를 도입한 이후 퀄리티 리드 지표가 200% 증가했다”고 밝혔습니다. 생성형 AI 서비스가 독자들이 기사를 더 깊이 읽도록 도와줬다는 뜻입니다.
▲ 파이낸셜타임스 영국 런던 본사 (런던/사진=정혜진 기자)
랜턴과 퀄리티 리드 같은 분석틀을 도입한 것은 ‘생존’을 위해서입니다. FT는 온라인 구독자 모델을 선도해 탄탄한 수익 모델을 갖춘 것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맥클러우드 FT 전략 담당은 “현재 온라인 구독자 130만명으로 견고한 수익 모델을 가지고 있지만, 우리는 더 나아가 전세계 유료 구독자 3백만 명을 목표로 하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랜턴 대시보드와 더불어 ‘GPA 3 Million(Global Paying Audience 3 Million)’이라는 문구를 FT 사옥 곳곳에서 볼 수 있었습니다. 맥클러우드는 “AI 시대에도 유료 구독자 수를 늘리기 위한 FT의 핵심 전략은 결국 질 높은 저널리즘(Quality Journalism) 추구가 될 수 밖에 없다”고 덧붙였습니다.
130년 역사를 바탕으로 양질의 기사에 대한 자부심이 뚜렷한 FT가 지난 4월, 챗GPT를 개발한 오픈AI에 학습용 기사를 제공하는 계약을 맺었습니다. 오픈AI는 FT의 기사를 AI 학습에 활용하고, FT는 오픈AI의 모델을 뉴스 제작과 홈페이지 운영 등에 활용한다는 내용이 계약에 담긴 걸로 알려졌습니다. 오픈AI에 기사 제공을 결정한 건 영국 유력 언론사 중에서 FT가 처음입니다. 이 계약으로 FT는 오픈AI로부터 뉴스 사용료를 받는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우리 기사를 멋대로 긁어다가 챗GPT 학습에 쓰고 있다”며 지난해 오픈AI를 상대로 대규모 저작권 침해 소송을 낸 뉴욕타임스와는 상반된 길을 택한 겁니다.
FT가 AI 빅테크 기업과 협력을 선택한 이유도 생존입니다. 샘 고울드 FT 전략부 AI 팀장은 “우리는 수익을 구독 모델에 의존하고 있고 기업 구독자가 전체의 약 75%를 차지하고 있는데, 이들이 오픈AI를 통해 우리 콘텐츠를 그냥 볼 수 있다면 이는 우리 비즈니스에 치명적인 영향을 끼치게 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이른바 ‘탈중개화(disintermediation)’ 위험을 매우 우려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독자들이 언론사의 콘텐츠, 특히 뉴스 기사를 해당 언론사의 홈페이지가 아니라 네이버를 통해 보고 있는 현재 우리나라 미디어 환경과 비슷한 것이 바로 탈중개화입니다. 그래서 FT는 자사 콘텐츠가 오픈AI 검색에서 제공될 경우 적절한 링크를 통해 독자가 FT 웹사이트로 유입되도록 하는 조건을 계약에 포함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고울드 팀장은 “결국 FT 자체적으로 AI 기술을 이해하고 활용하여 회사가 스스로 미래를 통제할 수 있는 역량을 갖추는 것이 생존의 핵심”이라고 덧붙였습니다.
한국언론진흥재단의 ‘2024 KPF 디플로마 - AI저널리즘 전문가 과정’의 지원으로 만나본 FT를 비롯한 영국 주요 언론사들은 AI가 콘텐츠 소비와 생성 방식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킬 기술이라는 점에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었습니다. FT는 자사 기사를 학습해 답변하는 AI 챗봇 ‘ASK the FT’를 개발해 지난 3월부터 구독자에게 제공하고 있고, 가디언(The Guardian)도 FT와 비슷한 ‘Ask the Guardian’이라는 AI 챗봇을 개발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영국 공영방송 BBC는 AI 이미지 검색 프로그램을 만들어 기자들이 빠르게 이미지를 찾을 수 있는 오리엘(Oriel) 프로젝트를 진행했습니다. 특히 BBC는 지난 2월 AI 원칙(BBC AI Principles)을 발표하고 책임감 있는 AI 사용에 대한 접근 방식과 원칙을 시청자들에게 공개했습니다.
▲ 2024 국민의 선택 SBS 선거방송 당시 'AI 투표로'
생성형 AI가 거대언어모델(LLM) 구축에 따른 막대한 자본력이 뒷받침돼야 하는 특성상 개별 언론사들이 오픈AI 같은 빅테크 기업처럼 직접 AI 시스템을 구축하는 방식은 현실적으로 어려운 측면이 있습니다. 이번에 만나본 영국 주요 언론사들 대다수도 특정 기술을 빌려와 자신에 맞게 적용하는 방식(Build-upon·빌드어폰)을 택하고 있었습니다. SBS도 빌드어폰 방식으로 지난 4월 국회의원 선거 방송에서 ‘AI투표로’와 SBS 스브스프리미엄 사이트의 ‘폴리스코어’ 같은 챗GPT 기반의 AI 콘텐츠를 선보인 바 있습니다.
생성형 AI는 1990년대 인터넷, 2000년대 모바일에 이어 세상을 바꿀 세 번째 ‘게임 체인저’가 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고 있습니다. 되돌릴 수 없는 IT 기술 발달의 흐름 앞에서 생존 전략을 찾는 해외 언론사들의 발걸음도 속도를 내고 있습니다. 오세욱 한국언론진흥재단 책임연구위원은 “저널리즘을 강조하는 영국의 가디언 같은 언론사도 뉴스라는 상품을 다루는 팀과 독자 데이터 분석팀을 별도로 두고 있듯, 우리나라 언론사들도 뉴스라는 상품을 좀 더 전략적으로 다루기 위한 변화가 필요하다”고 지적했습니다. BBC 기자 출신인 찰리 배켓 영국 런던정경대(LSE) 교수는 “되돌릴 수 없는 AI 도입 과정에서 저널리즘과 기술의 조화가 중요하며, 새로운 기술을 현명하게 활용해 양질의 저널리즘을 제공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습니다.
▲ 찰리 배켓 런던정경대(LSE) 미디어 커뮤니케이션학과 교수
※ 본 기사는 한국언론진흥재단 ‘2024 KPF 디플로마 – AI 저널리즘 전문가 과정’의 지원으로 작성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