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현 SBS 문화예술전문기자가 전해드리는 문화예술과 사람 이야기.
드라마 <정년이>의 인기가 뜨겁게 달아오르며 '여성국극'이라는 장르에 대한 관심도 커졌습니다. <정년이>는 여성들이 여성과 남성 역을 모두 맡아 했던 여성국극을 1950년대 대중예술의 총아로 그리고 있는데요, 여성국극은 1960년대부터 급격히 쇠락해 대중의 관심에서 멀어졌고, 한동안 대가 끊기다시피 했죠. 하지만 '정년이'의 후예들이 지금도 활동하고 있습니다.
<정년이> 오프닝에서 배역을 소개하는 목소리 많이 들어보셨죠? 이 목소리의 주인공은 여성국극 1세대 명인인 올해 91세 조영숙 선생입니다. 조영숙 선생의 제자들인 박수빈, 황지영이 바로 '정년이'의 후예들이라 할 만한 여성국극 3세대 배우들입니다. 이들은 '여성국극제작소'라는 단체를 만들어 여성국극의 보존과 창조적 계승에 헌신해 왔습니다.
온갖 우여곡절을 겪으면서도 여성국극 '지킴이' 역할을 해온 이들은 현재 안산 문화예술의전당 상주단체로 선정되어 활동 중인데요, 여성국극제작소 박수빈 대표를 골라듣는뉴스룸 커튼콜에서 만났습니다. 드라마 <정년이>의 문옥경처럼 남성 역할 전문 배우입니다. 수트를 입고 씩씩하게 걸어 들어오는 모습이 인상적이었습니다.
박수빈 대표는 어린 시절부터 풍물을 익히고, 중학교 때부터는 판소리를 배운 소리꾼입니다. 판소리를 가르친 박계향 선생의 권유로 여성국극 명인 조영숙 선생을 사사하며 여성국극과 발탈을 배웠습니다. 조영숙 선생은 방자 역할을 유명한 여성국극 스타였고, 발로 탈놀이를 하는 중요 무형문화재 '발탈' 기능 보유자이기도 합니다.
"명창분들, 예인분들 중에 여성국극을 안 거친 분들이 없어요. 저희 선생님도 여성국극 배우로 계셨던 분이니까 너는 여성국극을 해야겠다, 해서 조영숙 선생님을 연결해 주셨어요. 1990년대 말 정동극장 전통상설무대에서 조금앵 선생님(여성국극 1세대 스타로 2012년 별세)이 이도령, 조영숙 선생님이 월매, 저는 향단이 역을 하게 됐죠."
박 대표는 2000년대 들어 (지금은 해체된) 월드뮤직 그룹 '들소리' 멤버로 해외 무대를 누비며 노래했고, 당시 인연으로 프랑스 재즈 연주자들과 한불 크로스오버 그룹을 결성해 활동했던 경험도 있습니다. 하지만 다양한 활동을 하면서도 마음 한구석에는 항상 여성국극이 있었습니다.
끊길 듯 끊길 듯 이어온 여성국극의 명맥저도 90년대 말, 2000년 즈음 여성국극을 직접 본 기억이 있는데요, 당시 '신세대 소리꾼'이었던 이자람 씨가 여성국극 중견 배우들과 함께 출연했던 '춘향전'을 취재해 기사를 쓴 적도 있습니다. 침체됐던 여성국극이 부활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는 내용이었죠. 하지만 그 후로는 또 한동안 잠잠했어요. 여성국극의 '부활'은 금방 되는 일은 아니었습니다.
"2011년에 이소자 선생님이 사비 1억 원을 들여서 여성국극 '대춘향전'을 국립국악원 예악당 대관해서 했었어요. 누구도 도와주지 않으니까 직접 나선 거죠. 그때 돌아가신 여성국극 배우들을 추모하는 3시간짜리 공연을 했어요. 당시 반응이 좋았고 관객들도 다시 보고 싶다 했는데, 여러 가지 이유로 그 이후 또 멈춰졌죠."
박수빈 대표는 조영숙 선생의 또 다른 제자인 황지영 씨와 의기투합해 2019년 여성국극제작소를 설립합니다. 선생님 돌아가시기 전에 뭐라도 해야겠다, 이대로 있어서는 안 되겠다, 남들이 안 하니까 우리라도 해야지, 이런 생각으로 만든 단체였습니다.
"사실 선생님들은 여성국극은 작게 하면 안 된다, 호화스럽게 해야 된다, 제대로 해야 된다, 이러시거든요. 그래서 도리어 아무것도 못 하고 지낸 세월이 너무 길어서, 단체(여성국극제작소)를 운영하면서는 일단 뭐라도 해 보는 걸로 바꿨어요. 뭐라도 해야 한다. 그래서 1인극도 하고 2인극도 하고요. 여성국극이라는 이름으로 여러 가지 것들을 합니다."
여성국극제작소는 '대춘향전' 공연 10년 만인 2021년, 안산 문화예술의전당 '라이징 in 안산' 시리즈로 여성국극을 무대에 올렸습니다.
"제가 그랬어요. 뭐 수십 년 동안 '라이징(Rising)'이야, 이놈의 '라이징'은 언제까지 할 거야. 50년 전에도 '라이징'이고. 제가 그 단어를 쓰면서도 진짜 웃펐어요. 진짜 슬프다, 언제까지 '라이징'이라는 말을 써야 하나."
지난해 안산에서 공연한 '레전드 춘향전' 역시 박수빈 대표가 사비를 들여 한 공연이었습니다. 3천만 원은 개인적으로 빌리고 나머지 3천만 원은 펀딩과 지원으로 충당했습니다. 인기 웹툰 <정년이>를 원작으로 한 창극이 전석 매진 기록을 세우며 장안의 화제가 된 후였으니 이전과는 좀 달라진 분위기를 느끼지 않았을까요?
"못 느꼈어요. 죄송해요 솔직해서. 진짜 힘들었어요. 1, 2, 3세대가 같이 하는 '레전드 춘향전' 만들려고 할 때, 정말 제 마음은 딱 하나였어요. 이제 마지막으로 하나만 만들고 내려놓자. 너무 지쳐 있었고, 선생님들은 선생님들대로 연세도 있으신데, 사람들 만날 때마다 '여성국극이 이 세상에 왜 있어야 되냐? 여성국극이 이 시대에 있을 이유는 없다. 네가 무대에 서려고 그냥 하는 거 아니냐?' 이런 말들을 들었어요.
<정년이> 웹툰 나온 거 저도 재미있게 봤고, 창극도 저희 선생님 모시고 가서 자문도 하고 그랬는데, 사실은 우리 진짜 여성국극 장르에까지는 (관심이) 유입되지 않았어요. 그래서 '레전드 춘향전' 할 때만 해도 별로 느끼지 못했었어요."
레전드 춘향전은 생존해 있는 90대의 1세대 배우들, 70~80대의 2세대 배우들, 그리고 박수빈, 황지영 같은 3세대 배우들이 함께하는 무대였습니다. 어렵게 올린 이 공연에 '여성국극제작소' 만들 때부터 응원해 준 사람들뿐 아니라 여성국극을 처음 보는 관객들의 호응도 대단했습니다. 박수빈 대표는 '레전드 춘향전' 공연을 마치고 나서야 분위기가 달라진 것을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고 했습니다.
"제가 매년 지원 사업에 응모하는데, 심사위원 면접 볼 때 눈빛과 태도가 달라요. 그전에는 '여성국극이 왜 있어야 된다고 생각하세요?' 딱 이런 느낌이었는데 지난해 말 면접 보러 갔을 때는 '여성국극 지켜 주셔서 감사합니다' 하고 질문하시더라고요. 레전드 춘향전 때문만은 아니고, 당연히 <정년이> 웹툰과 창극 때문일 거예요. 그렇지만 이렇게 변하고 있구나, 하고 체감한 게 그때였죠."
여성국극은 50년대 대중예술의 총아였다요즘 여성국극제작소의 공연에는 극작가 고연옥, 혹은 '이날치'의 장영규 같은 내로라 하는 창작진이 참여합니다. 지난 8월 세종문화회관의 싱크넥스트 시리즈 중 하나로 무대에 오른 '조 도깨비 영숙'은 정가 가수 박민희와 장영규 음악감독이 여성국극 '선화공주'를 현대적으로 연출한 작품이었습니다. (장영규는 드라마 <정년이>에서도 음악감독을 맡았죠.) 국악계뿐 아니라 연극계에서도 여성국극을 주목합니다.
"여성국극이 창극이나 마당놀이와 뭐가 다르냐, 이런 질문들 많이 하시는데, 여성국극은 연극적 요소가 가장 커요. 처음 만들 때부터 음악적으로는 국악을 기반으로 했지만, 무대를 만드는 모든 기준이 연극적이었거든요. 유학 다녀오신 분들, 극작 무대 장치 의상 이런 연극적 요소를 다 반영했기 때문에 연출이 굉장히 중요했어요."
여성국극은 시작부터 대중예술을 지향했습니다. 대중과 밀착하고 대중의 취향을 선도하는 장르였습니다. 당시 가장 첨단의 콘텐츠를 모두 흡수하고, 새로운 시도를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박수빈 대표는 1950년대 초반 영화가 1년에 15편 제작될 때, 여성국극은 신작이 24편 제작될 정도로 상업적인 장르였고 모두 흥행에 성공했다고 했습니다. 박수빈 대표는 여성국극의 수많은 '최초' 기록을 나열했습니다.
"여성국극은 최초의 '시스루' 무대 의상을 도입했고요. '미러볼' 같은 무대 장치도 처음 사용했어요. 얼마나 환상적이었겠어요. 그러니까 제도권 안에서는 할 수 없었던 일들도 민간 단체니까, 대찬 여성들이 모였다 보니까 과감하게 시도한 것 같고요.
해외 작품을 번안해서 우리 식으로 무대화한 것도 최초이고, 판소리의 장단을 해체하기도 해서 악사들이 공연 전에 나 이거 못 하겠다, 하고 집에 가버리기도 했대요. 또 자료 화면 보면 무대 장치도 정말 그 공간을 다 상상할 수밖에 없게, 영화같이 재현해 놓고, 여성국극만의 분장술도 시도했고요."
절정 인기 누리던 여성국극, 급격한 쇠락 이유는?박수빈 대표는 여성국극이 인기를 누렸던 것은 훌륭한 배우뿐 아니라 당대 최고의 연출가, 연주자, 무대 미술가, 안무가 등등 훌륭한 창작진이 함께했기 때문이었다며, 여성국극은 최초의 K-뮤지컬이었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다시 한번 궁금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렇게 절정의 인기를 누렸던 여성국극은 왜 그렇게나 빨리 쇠락했을까요?
"정말 다양한 원인들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데, 제가 가장 크게 생각하는 부분은, '문화적 배제'입니다. 예전에 굿 하던 분들이 쉬쉬하듯이 여성국극 했다는 걸 쉬쉬할 수밖에 없는 분위기가 형성됐어요. 50년대 민속학이 들어왔고, 1960년대에 국립극장이나 국립국악원이나 이런 국가 예술기관들이 생기는데, 이렇게 국악을 살려보자 할 때 여성국극은 배제됐죠. 그냥 배제된 정도가 아니라 '여성국극 출신'이라고 얘기하면 수업조차 못 들어오게 했대요. 저 사람들하고는 같이 수업할 수 없다고. 저희 선생님들은 그런 설움을 겪으셨대요."
"왜 그랬을까요?"
(남은 이야기는 스프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