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흔을 바라보는 노부부가 지켜내고자 한 것은?
26일 방송된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이하 '꼬꼬무')에서는 '황제의 비밀특사'라는 부제로 조국의 독립을 위해 끝까지 싸웠던 헤이그 특사의 그날을 추적했다.
1992년 7월 14일, 네덜란드 주재원으로 온 후 현재는 무역업에 종사 중인 이기항 씨 부부는 한 건물이 매각 위기에 있다는 소식 접하고 바로 그 건물로 향했다. 그리고 이들은 전 재산을 털어 건물을 인수하기로 했다. 그들이 이토록 지키고자 했던 건물은 무엇일까?
특별한 사연이 있는 이 건물은 우리나라가 대한제국으로 불리던 시절 한국인 세 명이 이곳을 찾았고, 이에 이들은 이곳을 지키고자 했다.
이야기는 거슬러 올라가 1904년 4월 14일. 현재의 덕수궁인 경운궁(현재의 덕수궁)에 화재가 발생한다. 불길이 시작된 곳은 경운궁 한가운데 있는 고종 황제의 침전이었던 함녕전.
순식간에 화염에 싸인 경운궁, 다행히 이날 고종 황제는 함녕전에 없었지만 이 사고는 흉흉한 소문을 낳았다. 종로 거리에 "경운궁에 변고가 일어나고 고종은 먼저 수옥헌에 숨게 된다. 1904년 4월 21일, 고종은 창덕궁으로 거처를 옮긴다"라는 예언문이 붙은 것.
누군가가 고종 황제를 창덕궁으로 보내기 위해 고의로 불을 질렀다는 예언문에 민심은 흉흉해지고 대한제국은 급격한 쇠락의 길을 걸었다.
그리고 고종 황제의 거처가 된 수옥헌은 이후 치욕적인 역사의 현장이 되고 말았다. 1905년 11월 17일, 이곳에서 을사늑약이 체결된 것.
끝까지 고종 황제는 을사늑약 체결을 반대했으니 이토 히로부미는 을사오적이 을사늑약 체결에 찬성표를 던지게 만들어 이 늑약을 체결하도록 한 것이었다.
이후 수옥헌은 중명전으로 이름을 바꾸었고 이곳은 고종 황제에게 감옥이나 다름없던 공간이었다.
무능한 황제, 그러나 조국을 지키기 위해 필사의 노력을 한 황제, 두 얼굴의 고종 황제는 직속의 비밀 정보기관 제국익문사를 보유하고 있었다. 61명의 요원들은 은밀하게 국내외 정보를 수집해 고종 황제에게 보고했고 2년 후 고종 황제는 검사 이준을 불러들인다.
호법신이라 불린 검사 이준에게 고종황제는 대한제국의 운명을 건 임무를 맡긴다. 황제의 특사로 헤이그에서 열리는 제2차 만국평화회의에 참석하여 을사늑약의 부당함을 각국 대표들에게 알리고 대한제국의 주권을 회복하도록 하라는 것.
그리고 이준과 함께 성균관 대사성 이상설과 언어천재 이위종까지 함께하며 세 명이 헤이그 특사가 되어 조국의 운명을 되살리기 위한 막중한 책임을 갖고 헤이그로 향했다.
1907년 6월 25일, 헤이그에 도착한 세 명의 특사들은 자신들이 묵는 호텔 밖에 태극기를 걸고 만국평화회의가 열리는 기사의 전당으로 향했다. 고종황제의 친서를 전달하고 일본의 불법행위를 회의 안건으로 올려달라고 요구할 계획이었던 헤이그 특사. 그러나 이들은 회의에 참석도 할 수 없었다.
초청 명단에 있었음에도 문전 냉대를 받았던 것. "대한제국 특사들이 헤이그에 도착하여 협조를 구하면 이를 거절할 것"이라는 전보를 본국으로부터 받은 러시아 의장은 헤이그 특사의 회의 참석을 막았던 것이다.
이에 헤이그 특사는 공고사를 전달하고 만국평화회의보라는 신문에 "왜 한국을 제외하는가"라는 기사를 실으며 일본이 저지른 불법행위를 낱낱이 밝히며 을사늑약이 무효임을 주장했다.
그러나 그 누구도 특사들의 외침에 호응해주지 않았다. 일본은 이미 강대국들에 대한제국에 대한 지배권을 인정받았던 것이다. 전 세계의 평화를 위한 자리라고 했던 만국평화회의는 사실 강대국의 이해관계를 위한 평화회의였던 것.
그런데 이때 특사들의 활동을 호의적으로 바라보던 윌리엄 스테드라는 기자가 이위종과 나눈 대담과 함께 헤이그 특사의 사진을 기사로 실었다. 기자는 "당신은 일본이 강대국임을 잊고 계십니다"라는 말을 했고, 이에 이위종은 "대한제국이 약자이기 때문입니까? 왜 대포가 유일한 법이며 강대국들은 어떤 이유로도 처벌될 수 없다고 솔직히 시인하지 않습니까?"라는 답을 했던 것.
이후 이 기자는 전 세계 기자들이 모인 자리를 마련했고 헤이그 특사에게 연설을 해달라고 요청했다. 그리고 이 자리에서 이위종은 "일본은 평화를 외치고 있다. 그러나 기관총 앞에서 어찌 평화로울 수 있는가. 한국의 독립과 자유가 이루어지지 않는 한 극동에 평화란 있을 수 없다"라는 연설로 모든 이들을 감동시켰다. 그리고 백여 명의 기자들이 모인 이 자리에서 이들은 한국의 입장을 지지할 것을 만장일치로 결의했다.
각국의 기사로 한국에 관한 소식이 전해지고 회의장에 입장할 수도 없던 상황은 전화위복을 맞았다. 그러나 비극은 더욱 빨랐다.
이위종이 아버지의 급한 연락을 받고 잠시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돌아간 후, 7월 14일 저녁 7시경 홀로 호텔 밤에 남아있던 이준이 사망한 것이다. 그리고 그의 장례 행렬에 참석한 사람은 이상설과 호텔 주인, 두 사람뿐이었다.
지금도 사망원인이 명확하지 않은 가운데 당시 한국에서는 그가 자결한 것으로 알려졌다. 여러 가지 설이 나돌았지만 그가 조국의 독립을 위해 활동하던 중 순국했다는 것은 자명한 것. 이에 이준은 이준 열사가 되었고, 헤이그 특사 공식 활동은 종료되었다.
이토 히로부미는 헤이그 특사 사건을 빌미로 고종 황제를 퇴위시키고 순종을 황제로 세웠다. 그리고 세 명의 특사를 피고인으로 해서 궐석 재판을 열었다. 이상설에게 사형, 이준과 이위종에게 종신형을 선고한 일본.
이후 이들은 정미 7 조약으로 내정권까지 빼앗고 언론탄압을 위해 신문지법을 만들고 보안법을 만들어서 집회결사를 금지시켰다. 그리고 7천 명밖에 남지 않은 군대마저 해산시켰다. 이는 고종황제가 물러난 후 십여 일 만에 모두 일어난 일이었다.
일제의 식민지나 다름없는 상태가 된 대한제국. 그러나 이후에도 두 특사는 계속 자신의 임무를 다하려 노력했다. 조국으로 돌아올 수 없었던 두 사람은 각자의 길로 향했지만 대한제국의 독립을 위해 끝까지 싸웠다.
이위종은 항일 의병 운동에 뛰어들었고, 이상설은 최초의 해외 정부, 대한광복군정부를 수립해 정통령에 올랐다.
하지만 두 사람 모두 조국의 독립을 보지 못한 채 눈을 감았다. 조국의 독립을 위해 먼 타국으로 떠났지만 이후 다시는 조국의 땅을 밟지 못했던 세 특사. 그런데 광복 후 한 특사가 다시 조국 땅을 밟게 되었다. 이준 열사의 유해가 사망 56년 만에 고국으로 돌아온 것.
그리고 앞서 노 부부가 사비를 털어 인수한 건물은 바로 헤이그 특사들이 머물렀던 드 용 호텔이었다.
지금도 그대로 보존되고 있는 이 호텔은 현재 이준 열사 기념관이 되었다. 이에 부부는 "순국 현장이다. 방치할 수 없지 않냐"라며 전 재산을 털어 29년째 기념관으로 운영 중인 것.
1995년 기념관 개관 후 매일 아침 암스테르담에서 기차를 타고 와서 기념관 건물 앞에 태극기를 게양하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하는 노 부부. 이들은 저녁이 되면 다시 암스테르담으로 돌아가고 다음날이 되면 다시 기념관으로 돌아왔다.
아흔 살을 바라보는 부부는 건강이 허락하는 때까지 이 일을 계속할 것이라고 했다. 이들은 "나라를 위해, 역사를 위해 이런 일을 하다가 갔다고 하는 게 우리로서는 가장 큰 보람이다"라며 역사 속으로 사라질 수 있었던 역사의 한 조각을 지켜내고 있는 이유를 밝혔다.
역사를 잊지 않고 기억해서 후대에 전달해 주는 것, 그것이 지금을 살아가는 우리가 반드시 해야 할 일 아닐까?
(SBS연예뉴스 김효정 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