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상계단 막은 호텔들…불나면 참사 피할 수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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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 시내 호텔의 비상계단 실태

서울 시내 일부 숙박업소가 비상계단에 불법으로 물건을 쌓아둬 위급 상황이 발생하면 인명 피해가 우려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소방 당국은 업주들의 눈치를 보며 단속을 소홀히 하는 것으로 나타나 업무 태만이라는 지적이 나옵니다.

오늘(24일) 언론 취재를 종합하면 서울에서 '호텔' 간판을 내걸고 영업하는 숙박업소들이 위급 상황에 대피 통로로 사용돼야 할 비상계단에 불법 적치물을 쌓아두고 있습니다.

이러한 적치물은 대부분 세탁물로 호텔 청소가 시작되는 오후 4시쯤부터 세탁물 수거 차량이 오는 오후 9시까지 5시간가량 방치되고 있다고 합니다.

사실 확인을 위해 지난 14일 오후 종로3가역 인근의 숙박업소 5곳을 방문한 결과 많은 숙박업소가 세탁물뿐만 아니라 물병이나 수건 같은 비품들도 계단이 좁아질 정도로 쌓아두고 있는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5곳 중 4곳의 숙박업소에서 비상계단에 불법 적치물을 쌓아 둔 것을 확인했습니다.

이들은 청소 시간에 발생한 세탁물을 해당 층 비상계단에 모아두거나 계단 일부를 물병과 각종 비품을 보관하는 창고처럼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한 업소는 계단 한 층에 의자와 선풍기를 갖다 두고 직원의 휴게공간으로 탈바꿈시켰습니다.

'소방시설 설치 및 관리에 관한 법률'에 따르면 비상계단을 포함한 모든 피난통로에는 대피를 방해할 수 있는 어떠한 물건도 놔둬선 안 됩니다.

지난 14일 오후 5시쯤 A 호텔은 청소 과정에서 나온 세탁물을 계단에 모아뒀습니다.

7층 높이의 A 호텔엔 계단이 하나뿐입니다.

쌓아둔 세탁물로 인해 유일한 대피로인 계단의 폭이 반 이상 줄어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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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 호텔 비상계단

근처의 B 호텔은 더욱 심각했습니다.

방화문을 열고 들어가자 세탁물 포대와 쓰레기봉투가 뒤엉켜 길을 막고 있었습니다.

계단 한쪽엔 물병들이 쌓여있습니다.

온갖 물건들로 계단이 좁아져 성인 한 명이 지나가기도 힘들었습니다.

비상계단에 세탁물과 쓰레기만 쌓여있는 것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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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 호텔 비상계단

같은 날 오후 4시쯤 C 호텔엔 냉장고, 청소기 등 가전제품은 물론 의자까지 등장했습니다.

이 호텔의 5층과 6층 사이 계단참(계단 위 평지로 이뤄진 공간)은 선풍기, 컴퓨터, 방석 등이 비치돼 호텔 직원의 휴게 공간으로 변신했습니다.

C 호텔은 이런 문제를 지적하는 인터뷰 요청에 응하지 않았습니다.

숙박업자들은 상황이 이런데도 안전불감증에 젖어 있는 모습입니다.

A 호텔 관계자는 "세탁물은 수거 차량이 오기 전 잠시 쌓아두는 것이다. 오후 9시 이전에 모두 치운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또 "종로소방서에서 몇차례 단속을 나왔지만, 그때마다 조사관이 문제없다고 판단했고 처벌받지 않았다"는 황당한 이야기도 전했습니다.

B 호텔 관계자는 "비품 공급업체가 추석 연휴를 맞아 휴업해서 비품을 평소보다 많이 준비했다. 창고에 자리가 없어 잠시 꺼내놓은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인근 D 모텔 사장도 '휴일'임을 강조했습니다.

"왜 하필 토요일에 오시냐"며 운은 뗀 그는 비상계단 공개를 거부하며 "주말은 입실을 기다리는 외국인들이 가방을 계단에 모아둔다. 평일은 이렇지 않다"고 말했습니다.

또, "털어서 먼지 하나 안 나오는 곳이 어딨겠나. 이 주변 모텔들이 다 이런 상태"라고 주장했습니다.

해당 사실을 제보한 L 씨는 "이 근방 호텔들은 청소 시간이 되면 세탁물을 계단 가득 쌓아둔다"면서 "세탁물이 가득 쌓이면 사람이 지나가기 힘들어 화재가 발생했을 때 대피하기 어렵다. 근처의 숙박업소가 대부분 이렇다"고 전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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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 씨가 작성한 국민신문고 민원(좌)과 답변 내용(우)

L 씨는 지난 4월 국민신문고를 통해 이런 문제를 고발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소방 당국의 대응을 이해할 수 없었다고 합니다.

단속에 나서야 할 종로소방서가 단속 일정을 업소에 미리 알려줬다는 것입니다.

L 씨는 "소방서에서 호텔에 미리 전화해서 물건이 있으면 치우라고 한다. 직원들이 물건을 치우면 그제야 방문해서 물건을 두면 안 된다고만 말하고 간다"고 전했습니다.

이에 종로소방서 관계자는 고지의 의무가 있어 항상 불시 단속을 하진 않는다고 밝혔습니다.

이 관계자는 "민원이 들어올 때마다 불시 단속으로 과태료 부과하면 업주들에게 부담되는 것도 사실"이라며 "최초 적발 시엔 단순 지도하고 연속 적발 시에 과태료를 부과하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소방청 관계자 역시 "고지 여부는 현장 책임자 업무 스타일"이라며 큰 문제는 없다는 입장이었습니다.

그러나 전문가들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백승주 열린사이버대 소방방재학과 교수는 "업주들에게 과태료를 물리기 부담스러운 일선의 입장은 이해하지만, 인명이 걸린 문제"라며 "민원이 부담된다고 이렇게 단속하는 것은 업무 태만"이라고 꼬집었습니다.

류상일 동의대 소방방재학과 교수는 "미리 알려주고 점검하면 효과가 있을지 의문이다. 음주운전 단속을 미리 고지하면 누가 걸리겠나"고 지적했습니다.

모호한 규정도 문제입니다.

소방청에서 제공한 '신고 대상에 대한 위반행위별 세부 기준 지침'에 따르면 모든 적치물이 단속 대상인 것은 아닙니다.

▲즉시 현지 시정이 가능한 경우 ▲계단참에 휴지통 등을 고정하여 설치하는 경우 ▲자판기 등이 벽에 고정되어 객관적으로 피난 및 소방 활동에 방해되지 않는 경우 ▲일시 보관 물품으로 즉시 이동할 수 있는 단순 일상생활 용품인 경우 등 대피하는 데 크게 방해되지 않으면 과태료를 부과하지 않습니다.

문제는 '대피하는 데 방해되지 않는 정도'의 기준이 현장 책임자마다 다르고 업주의 민원을 의식해 실제로 처벌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지 않다는 점입니다.

직접 점검에 나서는 종로소방서 관계자도 규정의 모호함을 인정하면서 "세부 지침에 따르면 업주가 잠깐 두는 물건이라고 하고 치우면 단속하기 어렵다. 반발이 심해 과태료를 부과한 사례는 드물다"고 전했습니다.

봐주기식 점검이 아니냐는 지적엔 "그렇지 않다. 세부 지침을 벗어나는 심각한 경우는 거의 못 봤다"며 "심각하다는 건 치우는 데 한나절 이상 걸리는 경우"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면서도 그는 "화재가 언제 날지 모르니 원래 아무것도 없어야 하는 게 맞다. 실제로도 단속에서 과태료만 부과하지 않을 뿐이지 업체에 물건을 치우라고 말하고 온다"고 덧붙였습니다.

소방청 관계자는 소방 당국의 목표는 대피 자체에 있다면서 "대피만 할 수 있다면 처벌만이 능사는 아니"라고 말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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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로3가 인근 한 모텔의 비상계단

전문가들은 입을 모아 건물마다 화재 안전 책임자를 지정해 소방 안전관리 업무를 담당하게 하는 '소방안전관리자 제도' 강화를 주문했습니다.

건물주가 소방안전관리자를 직접 선임하기 때문에 자칫 '셀프 점검'으로 전락할 수 있는 문제를 고쳐야 한다는 것입니다.

류상일 교수는 소방안전관리자들이 고용주에게 피해를 주는 결과를 내놓긴 쉽지 않다며 "건물주가 직접 고용하는 형태에서 무작위 배정으로 바꿔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백승주 교수도 "지금처럼 숫자만 늘리기보단 권한과 교육을 강화해 소방안전관리자의 자립을 보장해야 한다. 그 변화의 주체는 결국 소방청"이라고 강조했습니다.

숙박업계도 불법 적치물 문제를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있었습니다.

김진우 대한숙박업중앙회 사무총장은 "2017년 제천 스포츠센터 화재의 피해(사망 29명·부상 40명)가 커진 이유가 비상계단이 불법 적치물로 막혔기 때문으로 알고 있다. 숙박업소에서도 그런 일이 벌어질 수 있다"며 "지난 달 부천 호텔 화재 사고로 경각심이 커진 상황이다. 전국 지부에 불법 적치물 문제 해결을 강조하겠다"고 전했습니다.

(사진=제보자 제공,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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