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례식장 성게미역국 자리에 황탯국이...


오프라인 대표 이미지 - SBS 뉴스

▲ 성게미역국

서울에 사는 김 모(35)씨는 8월 중순 친구 할머니 빈소가 마련된 제주시의 한 장례식장을 찾았다가 문화충격을 받았습니다.

상주가 대접한 음식이 소고기와 대파를 넣어 빨갛게 끓여낸 육개장이 아닌 황탯국이었기 때문입니다.

초등학교 때 전북에서 제주로 이사해 고등학교까지 다니다 서울에 올라가 줄곧 지낸 그가 문상을 갔던 서울 근처 장례식장에서는 대부분 육개장이 나왔었습니다.

상주를 위로하고 국 한술 뜨던 그는 또 한 번 낯선 소리를 들었습니다.

제주에서 나고 자란 친구가 "요새 제주 장례식장이나 잔칫날에 성게미역국은 보기 힘들어?"라고 말했기 때문입니다.

이 말에 상조회사 도우미 분은 "성게가 비싸 단가를 도저히 맞출 수 없다"며 "제주에서는 황탯국이나 생선미역국으로 대체된 지 꽤 됐다"고 답했습니다.

성게미역국은 과거 제주 장례식과 잔칫날에 흔히 볼 수 있는 음식이었습니다.

오죽하면 '인심은 구살(성게의 제주어)국에서 난다'는 말이 있을 정도였습니다.

경조사 때 귀한 성게를 얼마나 많이 넣어 국을 끓였는가는 찾아온 손님에게 성의를 표시하는 척도로 여겨졌습니다.

하지만 가뜩이나 귀했던 성게가 더욱 귀해지면서 노란 성게알이 둥둥 떠 있는 시원하고 구수한 성게미역국을 찾아보기 힘들어졌습니다.

제주 향토 음식점에나 가야 성게미역국이 메뉴판에 적혀있고, 그것도 성게알은 보이는 듯 마는 듯 한 정도입니다.

1일 제주지역 어촌계에 따르면 2017년만 해도 1㎏당 6만 원에 판매됐던 성게알은 올해 3배 이상 뛴 가격에 거래됐습니다.

김계숙 제주도해녀협회장은 "대부분 어촌계에서 성게알 1㎏당 17만 원에 팔았다. 1㎏당 20만 원을 받는 어촌계도 있었다"며 "가격이 비싸도 없어서 못 판다"고 말했습니다.

이처럼 성게알이 비싸진 이유는 전보다 성게를 채취하는 데 품이 많이 드는 데다 힘들게 잡은 성게에 알이 차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고령화된 제주 해녀들은 주로 5m 내외 수심에서 해산물을 채취합니다.

문제는 이 수심대 어장에서 바위에 하얗게 달라붙어 미역과 모자반 등 해조류를 폐사시키는 '갯녹음 현상'이 가장 먼저 발생한다는 점입니다.

한국수산자원공단이 2년마다 실시하고 있는 갯녹음 실태 조사에 따르면 2021년 기준 조사 암반 164.02㎢의 39.53%인 64.84㎢에서 갯녹음이 발생했습니다.

갯녹음 어장에 서식하는 성게에는 우리가 흔히 '성게알'이라 부르는 생식소가 없습니다.

성게는 전체 무게 대비 알 무게가 10%는 돼야 경제성이 있지만, 갯녹음 어장에 잡히는 성게 몸통을 반으로 갈라 보면 노란 알 대신 내장만 나옵니다.

결국 알이 찬 성게를 채취하기 위해서는 갯녹음 현상이 발생하지 않은 더 깊은 바닷속까지 들어가야만 하는 것입니다.

양병규 제주해양수산연구원 연구사는 "갯녹음 어장에서 서식하는 성게는 주 먹이인 해조류가 사라져 영양가 없는 이끼나 석회조류를 먹는 탓에 크기는 크지만, 생식소는 발달하지 못한다. 마치 '공갈빵' 같다"며 "며 "알이 찬 성게를 채취하기 위해서는 더 깊은 바다에 들어가야만 해 해녀가 성게를 잡는 데 시간이 더 소요될 수밖에 없다"고 말했습니다.

여기서 끝이 아닙니다.

성게는 무자비한 먹성에 강한 생존력으로 갯녹음 어장에서도 마지막까지 살아남습니다.

상위 포식자가 없는 갯녹음 어장에서 개체 수를 늘린 성게는 계속해서 서식지를 넓혀가며 해조류 뿌리까지 먹어 치워 갯녹음 현상을 가속화합니다.

그동안 해녀가 성게를 채취하면서 자연스럽게 개체 수 조정이 이뤄졌지만, 경제성이 없어 방치되는 갯녹음 어장에 성게가 늘면서 위기감이 높아지고 있습니다.

실제 제주해양수산연구원에 따르면 갯녹음 현상이 발생한 어장 1㎡에 '알 없는' 성게가 100마리 이상 서식하는 것으로 조사됐습니다.

양 연구사는 "갯녹음 어장에 서식하는 성게를 대상으로 양식 실증 실험을 한 결과 '알 없는' 성게라도 해조류나 양배추 잎사귀 등을 먹이니 4개월 만에 10% 이상 알이 차는 것을 확인했다"며 "다만 이 성게에서 알을 채취하고 가공할 방안이 마뜩잖다. 현재 수작업 외에는 방안이 없어 경제성이 낮다"고 말했습니다.

양 연구사는 "성게알 채취와 가공이 자동화될 수만 있다면 갯녹음 어장 성게 개체수 감소도 끌어낼 수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며 "갯녹음 현상이 심화해 앞으로 성게미역국을 더 보기 힘들어지기 전에 이와 관련한 연구나 사업 추진도 고민할 필요가 있다"고 제언했습니다.

(사진=연합뉴스)

댓글
댓글 표시하기
이 시각 인기기사
기사 표시하기
많이 본 뉴스
기사 표시하기
SBS NEWS 모바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