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1월 피습 이후 헬기 이송된 이재명 민주당 전 대표
지난 1월 2일,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전 대표가 부산 가덕도에서 괴한에게 피습을 당했습니다. 부상을 당한 이 전 대표는 피습 현장인 가덕도에서 헬기를 타고 부산대병원으로 옮겨졌는데, 그곳에서 응급치료를 받고 그 이후 또 헬기를 타고 서울대병원으로 전원 이송돼 수술을 받습니다. 이 과정에서 "이재명 전 대표가 아무나 타지 못하는 소방의료헬기로, 서울대병원까지 이송된 것은 특혜가 제공된 것"이라는 신고가 국민권익위원회로 접수됩니다.
과연 일련의 상황이 '청탁금지법 위반행위'에 해당하는지 여부에 대해 권익위가 지난 22일 전원회의를 거쳐 결론을 내놨습니다. 정승윤 권익위 부위원장 겸 사무처장은 저녁 6시 30분쯤 세종시 정부청사에서 한 짤막한 브리핑에서 부산대학교 병원과 서울대병원 의사 및 부산소방재난본부 직원들의 행동강령 위반사실을 확인해 통보하기로 결정했다고 말했습니다. 헬기이송 과정에서 문제가 있었던 것으로 판단했다는 뜻입니다.
준 쪽은 문제 있음, 받은 쪽은 문제없음그러나 이어 이렇게도 말했습니다. "전 야당 대표와 그 비서실장인 국회의원에 대한 신고는 국회의원에 대한 행동강령 위반이 적용되지 않기 때문에 종결하였으며, 청탁금지법 위반사실에 대한 자료도 부족하기 때문에 종결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
그러니까 '특혜'로 판단한 하나의 사건에서 줬다는 쪽은 문제가 있고 받았다는 쪽은 문제가 없다는 이중적인 판단이 나온 겁니다. 의결 이튿날인 어제(23일) 여러 의문점을 해소해 줄 것으로 기대되었던 질의응답 브리핑이 있었습니다. 결과적으로 권익위로서는 헬기이송 사건을 '특혜'로 판단했다는 건데, 그 근거가 무엇이냐는 상식적 수준의 질문이 거듭됐습니다.
조사 착수 시점부터 세간의 이목을 끌던 유력 정치인과 관련된 사건인 데다, 권익위가 특혜를 준 것으로 규정한 부산대와 서울대 의료진 그리고 부산 소방 관계자들의 입장에선 사실관계에 따라 충분히 이의제기를 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권익위 판단의 주요 근거인 이른바 '규정 위반'이 무엇인지, 그에 앞서 각 기관의 규정이 무엇인지 질문하는 것은 조사를 담당하고 결론을 내린 기관에 직접 물어봐야 하는 내용이었습니다. 하지만 권익위 정승윤 부위원장은 "구체적인 규정에 대해서는 언급이 어려우니 기자들이 직접 찾아보길 바란다"고 답했습니다. 공무원 또는 공직유관단체 직원들의 인사 기록과 징계 등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위반 사항을 통지하고 심지어 그 내용을 전 국민에게 공지하면서 동시에 무엇을 어떻게 위반했다는 것인지 밝히지 않은 일방적 통고에 가까웠습니다.
서울대병원과 부산대병원 측은 관련 규정 내용에 대해 묻는 SBS의 질의에 "권익위 측에서 아직 아무런 통지를 받지 않았고 언론을 통해서만 확인했기 때문에 규정을 비롯해 관련 사안에 대해 입장을 내기 어렵다"고 밝혔습니다.
'매뉴얼 위반'은 곧 특혜 제공? 판단 근거 보니문제가 된 구체적인 규정이 무엇인지 밝히지 않았지만 그나마 권익위가 밝힌 이번 사건의 판단 기준은 '부패방지 및 국민권익위원회의 설치와 운영에 관한 법률'에 근거하고 있는 제8조 공직자 행동강령 조항입니다.
이에 따르면 공무원 행동강령이라는 일종의 매뉴얼입니다. 이 매뉴얼은 공무원 또는 공직유관단체 소속 직원들의 특정 행동이 문제가 있는지 여부를 따지는 기준이 됩니다. 문제가 된 서울대병원과 부산대병원 의료진은 교육부 소속이자 해당 병원 소속이라 교육부와 각 병원 매뉴얼이 판단 기준이 되고, 부산소방재난본부 소방 공무원은 소방청과 부산광역시 소속이라 역시 두 기관 행동강령이 기준이 된 것으로 보입니다.
권익위 정승윤 부위원장은 먼저 부산대병원의 경우 전원에 대한 매뉴얼은 없다고 밝혔습니다. 다만 소방의료헬기 요청 관련해서는 매뉴얼이 있는데, 이번 사건의 경우 권한이 없는 의료진이 소방의료헬기를 요청했다는 점을 문제로 지적했습니다. 그리고 이 의료진의 권한 여부를 확인하지 않은 채 의료헬기를 출동시킨 소방 공무원도 매뉴얼을 위반한 것으로 봤습니다. 또 전원 규정이 까다로운 서울대병원이 이를 어기고 이재명 전 대표를 받아줬다는 점을 위반 사항으로 지적했습니다. 그러니까 이 전 대표의 경우는 서울대병원으로 옮겨질 만큼의 요건이 충족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규정도 권한도 없는" 권익위, 국회의원은 조사 안 해이렇게 의료진들과 소방 공무원은 여러 강령 위반 사실이 확인되면서 '특혜 제공자'로 각 소속기관에 통보되는 것으로 결론이 났습니다. 문제는 그 다음입니다. 특혜를 제공받은 쪽인 이 전 대표와 직접 헬기 전원을 요청한 것으로 알려진 당시 비서실장 천준호 민주당 의원에 대한 권익위의 처분은 '종결'로 처리한 겁니다.
똑같은 기준이라면 '특혜' 여부를 판단할 때 이 두 사람 역시 매뉴얼, 행동 강령을 지켰는지 따져 판단해야 하지만 권익위는 두 의원에 대한 조사조차 하지 않은 것으로 파악됐습니다. 권익위 관계자는 "국회의원들은 '공무원 행동강령'에 적용받지 않으니 강령이 없다, 그러니 판단할 필요조차 없어 조사를 안 했다"고 밝혔습니다. 행동강령 조항에 저촉되는 '국회 공무원'에 '국회의원'이 포함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특혜 사건 조사에서 중요한 것은 특혜가 오가는 과정에서 강요와 강압이 있었는지 여부입니다. 이를 위해서는 준 쪽과 받은 쪽 양자를 조사해 사실관계를 면밀하게 파악해야 합니다. 정승윤 부위원장은 브리핑에서 "국회의원들 두 분에 대해 진짜 조사하겠다고 덤비면 그분들이 직권남용이라고 저희를 고소하면 저희가 뭐라고 답을 하겠습니까? 규정도 없고 권한도 없는데 조사하겠다고 덤비면"이라고 말했습니다. 물론 타당한 우려입니다. 구속력 있는 수사기관이 아니다 보니 공직 내부의 비위를 조사한 결과를 발표할 때에도, 명확한 혐의점과 당사자를 특정하는 것조차 조심스러워 했던 것이 사실입니다. 요컨대 수사기관의 권한과 지위를 갖추지 않고 일정 부분 그 역할을 수행하다 보니 여러 부작용이 따랐던 겁니다. 각종 비위 사실과 제도상 허점을 발견할 때도 권익위가 할 수 있는 조치라는 '통보' 내지는 '권고' 뿐이라는 것도 근본적 한계로 지적됩니다. 하지만 그간 권한이 주어지지 않은 것에도 이유가 있습니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권익위는 늘 정권의 하수인이자 도구라는 의심에 시달렸습니다. 정치적 쟁점 현안이 발생하면 권익위는 '숙의기관'이 아닌 파행과 정쟁의 최전선에서 '정권을 대변하는 기관'이라는 비판을 받아왔습니다.
이번 전원위원회 회의에서는 "국회의원도 '국회 공무원'으로 의율해야 한다"는 2명의 소수의견이 나온 것으로 확인됐습니다. 범죄 피해 당사자인 이 전 대표는 아니더라도, 이송 전 과정을 보좌하고 헬기를 요청한 것으로 알려진 천준호 의원에 대해선 다른 공직자와 동일한 잣대로 조사를 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것이었습니다. 이 의견에 따르면 부산 가덕도에서 부산대병원까지 환자를 헬기로 이송한 것은 위급성 등을 판단해 문제가 되지 않지만, 응급처치를 끝낸 뒤 부산대병원에서 서울대병원으로 전원하는 과정에서 불필요한 행정력과 비용이 소모되었다는 겁니다.
특히 이번 전원회의의 경우, 의결에 앞서 비상임위원 2명은 해당 사안 자체가 청탁금지법 위반 및 특혜 시비를 가리는 안건으로 상정된 것 자체가 잘못됐다고 항의하며 회의장을 나간 것으로 확인됐습니다. 결국 '규정도 권한도 없는' 권익위에서 이뤄진 반 쪽 짜리 조사는, 그마저도 '전원'이 아닌 '일부' 위원들의 의결에 따라, 특혜를 받은 사람은 없는데 특혜를 준 쪽만 있게 된 기이한 결과를 도출하게 된 겁니다. 그리고 그 결과, 현재 권익위가 조치하기에 문제가 없고 상대적으로 방어 수단이 부족한 공무원들(국립병원 의료진, 소방 공무원)만 이번 사건에 따른 불이익을 받는 상황이 되어 버렸습니다.
심지어 당사자인 민주당 천준호 의원 역시 "이번 조사가 졸속이었다"고 비판했습니다. 천 의원은 자신은 "명백히 조사를 받겠다"고 의견을 밝혔지만 "권익위가 수요일에 공문을 보내 그 다음주 월요일에 서면 조사가 있으니 답을 달라며 조사를 졸속으로 추진했다"며 "과정 자체가 전반적으로 급조된 느낌을 받았다"고 SBS에 밝혔습니다. 그러면서 "생명이 위급한 상황에 있는 이재명 대표를 도왔다고 의료진과 소방 관계자를 처벌한 것인데 굉장히 부적절하고 이렇게 하면 사실상 국가기관이 정치 테러 행위를 조장하는 것"이라고 강하게 비판했습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 또 개인과 집단 사이, 그 외 사회 속에서 발생하는 여러 변화무쌍한 관계들 속에서는 무수히 많은 모호하고 애매한 상황들이 펼쳐집니다. 이를 법률과 규정으로 일일이 재단하기 어렵기 때문에 일상 속에서 놓치기 쉬운 부조리를 막고 사회적 논의 속에서 국민들의 '권익'을 보호하는 것, 그것이 2003년 설치된 국민권익위원회 존재의 이유일 것입니다. 달리 말하면 권익위의 역할은 대한민국 국민들의 '상식에 대한 신뢰'를 저버리지 않는 것입니다. 이런 권익위에서 소위 '더 센' 국회의원 조사는 '패스'하고, '더 약한' 의료진과 소방 공무원만 징계 및 인사 통보의 대상이 된 것은 아이러니한 일입니다.
그리고 피습 직후부터 이번의 의결에 이르기까지, 꼬리에 꼬리를 문 여러 논란과 정쟁 속에서 간과된 사실이 하나 더 있습니다. 부산대병원 권역외상센터는 지역 의료 환경이 녹록지 않은 상황에서도 보건복지부가 발표하는 '권역외상센터 평가'에서 4년 연속 최고 등급인 A등급을 받은 의료기관입니다. 이번 사건의 시시비비에서 등장한 '특혜'의 실체는 결국 이동 수단으로 값비싼 '헬기'를 이용했다는 점과 더불어, 총선을 앞두고 지역 유세를 위해 부산을 방문한 유력 정치인마저 지역 의료를 대표하는 기관인 부산대병원을 떠나 굳이 서울대병원으로 전원했다는 사실입니다. 이번 권익위의 기이한 결론엔 지금 대한민국의 의료 현실 단면이 담겨있다는 점도 씁쓸하기 그지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