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통의 제보 메일을 받았습니다.
"유튜브에 36주 차 태아 낙태 브이로그가 올라왔어요. 낙태 기사 쓰셨길래 제보합니다. 끔찍합니다."
이미 인스타그램, 유튜브 등에는 36주에 임신 중지를 했다는 여성의 영상이 화제가 됐고, 반나절도 지나지 않아 관련 인터넷 기사가 쏟아지기 시작했습니다.
자신을 20대라고 밝힌 한 여성이 임신 36주 차에 중절 수술을 받았다며 그 과정을 영상에 담았습니다.
영상 내용이 사실이라면 이 여성은 900만 원을 지급하고 제왕절개 방식으로 임신 중지를 했습니다.
36주는 임신 9개월, 만삭에 가까운 주수입니다.
'태아 살인'이라는 지적과 '영상 자체가 조작됐다'는 논란이 함께 불거졌습니다.
그리고 지난 15일, 보건복지부가 경찰에 이 여성과 수술을 해준 의사에 대해 수사 의뢰 진정을 넣었다는 보도가 나왔습니다.
이들을 살인죄로 처벌할 수 있을지 경찰에 사실 관계를 확인해 달라는 내용입니다.
낙태를 한 여성과 의사를 처벌하던 형법상 낙태죄에 대해 2019년 헌법재판소가 헌법 불합치 결정을 내린 이후 대체 입법이 되지 않으면서, 임신 24주 이후의 낙태를 금지하는 모자보건법 14조는 사실상 '식물화' 됐습니다.
복지부가 낙태죄가 아닌 '살인죄'로 수사 의뢰를 한 건 그런 이유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살인죄 적용은 가능할까요?
살인죄 적용이 쉽지 않은 이유결론부터 말하면, 쉽지 않습니다.
이 여성이 실존 인물이고, 실제로 임신 36주에 임신 중절 수술을 받았다고 전제를 해도 살인죄가 적용되려면 제왕절개로 낙태를 했을 당시 아이가 '살아있었다'는 '증거'가 필요합니다.
후기 임신 중지, 대체로 임신 30주 이후 임신 중절 수술을 받게 되면 흡입술이나 소파술로는 낙태가 되기가 어려워 제왕절개 방식으로 진행됩니다.
이 경우, 태아가 사망한 채로 배출이 돼야 합니다.
살아서 나오게 되면 출산이고, 이후에 어떤 방법을 이용해 사망에 이르게 하면 살인입니다.
'출산 당시 살아있었다'는 수술 당사자 또는 의료진의 진술, 또는 이 현장이 담긴 영상이나 녹취 등 증거가 있어야 합니다.
복지부는 이번 수사 의뢰 진정을 하면서 살인죄로 실형을 받았던 서울의 한 산부인과 사례를 참고했다고 밝혔습니다.
당시 사건은 2019년 서울의 한 산부인과 운영자가 임신 34주 차 산모의 임신 중절 수술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태아가 살아서 태어날 것을 알고도 제왕절개를 했고, 이후 아이를 물에 넣어 질식사시킨 후 사체를 의료폐기물과 함께 소각한 내용입니다.
병원 운영자는 징역 3년을, 수술을 보조한 산부인과 실장은 징역 2년에 집행유예 3년을 받았습니다.
애초 이 사건이 경찰 수사로 이어지고 살인죄 적용까지 가능했던 건, 수술을 받은 당사자 측과 수술에 참가했던 의료진 중 일부의 직접적 진술이 결정적이었습니다.
이 사건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산부인과 관계자는 "수술을 받은 환자와 병원이 갈등이 있었고, 수술에 참가한 의료진 사이에서도 이해관계가 달랐다고 알고 있다. 그 과정에서 증거가 나온 것으로 안다"고 말했습니다.
헌법재판소의 결정이 있기 전, 그러니까 낙태가 '불법'이었던 시절 불법 낙태 수술에 대한 내용이 사회에 알려지는 경우들이 있었는데 대부분 병원 내부의 이해관계 또는 갈등으로 인해 정보가 유출된 사례였습니다.
이 말을 뒤집어보면, 이해 당사자들이 서로 입을 닫아버리면 증거를 찾기가 쉽지 않다는 뜻입니다.
입법 공백 핑계 속 관리·제도 개선 '방치'…갑자기 수사 의뢰?그렇다면 36주 낙태는 처음일까요? 당연히 그렇지 않습니다.
SBS 뉴스토리 방송과 지난 취재파일에서도 밝혔듯이 30주 이상 "후기 임신 중지"를 해주는 병원으로 명성을 얻어온 일부 산부인과들이 있습니다.
기자가 확보한 자료에는 38주, 39주에 수천만 원을 내고 임신 중지를 한 사례들도 여럿 포함돼 있습니다.
한 산부인과의 이른바 '낙태 가격표'에는 40주도 포함돼 있었습니다.
정부도 이런 사례를 알고 있습니다.
기자도 취재 과정에서, 여러 행태를 정부에 알렸습니다.
하지만, 무력한 답만 돌아왔습니다.
후기 임신 중지 자체에 대해선 낙태죄가 폐지됐으니 처벌의 대상이 아니란 이유로, 일부 산부인과에서 비용을 비싸게 받으며 위험한 수술을 하고 있는 것에 대해선 비급여 의료행위라 관리의 대상이 아니란 이유였습니다.
이 사안을 두 달 가까이 취재해 온 기자로서 '36주 낙태 브이로그'에 대한 정부의 수사 의뢰가 당황스러웠던 건 그 때문입니다.
(남은 이야기는 스프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