낡은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글을 쓰는 동안에도, 글을 책으로 묶어낸 뒤에도 그런 생각이 들었다. 대형 서점의 한복판에 놓여 있는 책을 볼 때는 더욱 그런 생각이 들었다. 표지 디자인은 산뜻했지만 AI 챗봇이 새로운 세상을 열어가는 마당에 진보니 보수니 하는 이념 이야기를 한다는 게 스스로 생각해 봐도 낡았다. 그렇다고 이야기를 전달하는 방식이 새롭다 할 수 없었고 그 이야기를 하는 사람 역시 새롭다고 말할 수 없었다. 이렇게 낡은 이야기를 이렇게 낡은 방식으로 하고 있다는 자괴감을 숨기기 어려웠다. 이런 이야기를 담은 책을 누가 읽어줄까 싶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출판사 <개마고원>으로부터 강준만 교수에 대해 책을 써볼 생각이 없느냐는 제안을 받았을 때 별로 망설이지 않았다. 우선 필자가 살아온 시절을 말해줄 수 있는 사람을 만나고 싶었기 때문이다. 강준만이 공공지식인으로 살아온 세월과 필자가 언론인으로 살아온 세월은 겹친다. 강준만이 처음 월간 <말>지에 글을 쓴 것이 1990년, 그 이듬해 필자는 SBS 기자로 입사했다.
언론사 현역 기자의 자리에서 물러나는 즈음에 강준만의 삶을 정리해 보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겠다 싶었다. 얼굴 한 번 본 적 없고 말 한번 섞은 적 없지만 강준만은 같은 장(場) 안에서 살아온 느낌이 유별나게 강한 사람이다. 같은 시대를 살아왔다는 것, 비슷한 분야에 대한 경험을 공유하고 있다는 점에서 강준만은 다루기에 편한 인물이다. 더군다나 강준만이 살고 있는 전북 전주는 필자의 고향이다. 고향을 떠난 지 오래되었지만 돈 말고는 그리 부족한 게 없는 남도의 그 도시의 공기는 필자에게 익숙하다. 생각의 다름과 같음과는 무관하게 같은 세상, 같은 시대를 살아왔다는 느낌 때문인지 강준만의 이야기를 하다 보면 필자의 이야기도 자연스럽게 풀어놓을 수 있을 거 같았다. 그럴 수 있기를 기대했다.
강준만은 1990년 이후 근 30년이 훨씬 넘는 세월을 현역으로 살아온 드문 지식인이다. 한 시절의 증언자, 기록자인 동시에 때로는 주요한 플레이어이기도 했다는 점에서 강준만은 주목할 만한 인물이다. 이 사람이 원칙을 가지고 자신의 일관성을 지켜왔다는 것은 누가 뭐라 해도 부정할 수 없는 일이다. 지식인이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을 만나고 싶었다. 지식인이라는 말 자체가 남루해진 시대지만 그래도 그 말이 주는 매력은 그리 달라지지 않았다. 지난 1900년대 이후 시대의 한 특징을 지식인들의 몰락이라고 해도 그리 과하지 않을 것이다. 지식인들이 이렇게 푸대접을 받은 시대가 있었던가 싶다. '지식인의 지식인'으로 불렸던 강준만은 지식인의 영광과 상처를 모두 경험한 드문 인물이다.
*이 글은 강준만론이 아니라 최근 필자가 펴낸< 강준만의 투쟁-진보 반동의 시대에 맞서다>의 집필 후기로 읽어주면 좋겠다.
왜 지금 강준만인지, 왜 지금 강준만을 읽어야 하는지 설명하기가 쉬운 것은 아니다. 왜 하필이면 강준만을 쓰느냐는 말을 적지 않게 들었다. 강준만이란 인물을 누가, 얼마나 안다고 강준만에 대해 쓰느냐는 말을 듣고 나면 더더욱 기운이 빠졌다. 이제는 정치적으로 별 의미 없는 사람 아니냐는 것이다. 거기에 변절이나 배신이니 하는 말이 후렴처럼 따라붙었다. 그렇게 공을 들여서 쓸 만한 대상이 아니라는 뜻이었다. 그 말은 필자에 대한 격려이기도 했지만 때로는 필자에 대한 질책과 비판으로 들리기도 했다. 그럴 때일수록 더더욱 강준만에 대해 제대로 써야겠다는 생각을 다잡곤 했다.
어느 누구든지 할 말이 없는 사람은 없다. 그것은 자리의 높고 낮음이나 나이의 많고 적음, 돈과 권력의 많고 적음과도 무관한 것이다. 단지 그런 말을 들어주려는 사람이 없을 뿐이다. 한 사람의 삶에서 그 가치와 의미를 찾아내지 못하는 기록자의 둔함을 탓할 일이지 말하는 이를 타박할 일은 아니다. 더군다나 그 사람이 한 시대의 위선과 정면 승부를 벌여온 사람이라면 더더욱 귀 기울여 들을 필요가 있는 것이다.
강준만의 책을 열심히 본 것은 아니지만 이름 석 자를 모를 수는 없었다. 서점에서 새로 나온 강준만의 신간을 볼 때마다 감탄이 절로 나왔지만 정작 강준만의 책을 읽은 지는 꽤 되었다. 돌이켜보니 2004년 <인물과 사상>이 막을 내린 이후 강준만의 책을 진지하게 본 게 별로 없었다. <그 사람> 시리즈를 연재하는 동안 몇 사람에게 강준만에 대해 써보면 어떻겠느냐는 제안을 받았던 터였다. 한 번 쓰긴 써야 될 텐데 엄청난 저작을 읽을 생각 때문에 엄두가 나지 않았다. 강준만은 필자에게 미뤄둔 숙제 같은 느낌이었다.
강준만이 얼마나 큰 인물이었는지, 아니 얼마나 유명한 사람이었는지 설명해야 할 때마다 필자는 이렇게 표현하곤 했다. 1995년 이후 10여 년 동안 강준만은 지금으로 치면 유시민과 진중권과 김어준을 합쳐 놓은 정도의 인물이었다고, 김어준까지 더하는 것은 다소 과할지 모르지만 20여 년 전 강준만은 유시민과 진중권을 합쳐 놓은 수준의 정치적 사회적 영향력을 자랑하던 인물이었다고 말이다. 그것은 과장이 들어가지 않은 표현이다.
강준만은 <김대중 죽이기>, <노무현과 국민 사기극> 등의 책으로 김대중-노무현 두 진보 정권 출범에 기여했다. <인물과 사상> 시리즈로 출판 저널리즘의 새 장을 열고 실명 비판이라는 무기로 지식인 사회는 물론 정치, 언론계를 뒤흔들었다. 안티조선 운동도 사실상 강준만에게서 시작되었다.
강준만의 현재 처지를 몰락이라고 해야 할지 아니면 망각이라고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다. 멀쩡한 현역임에도 강준만은 확실히 그 존재감이 급속히 약해졌다. 강준만은 지금까지 잠시도 활동을 멈춘 적이 없다. 심지어는 미국에 교환교수로 갔을 때조차도 일 년에 서너 권씩 책을 써왔다는 점에서 강준만이 대중에게서 잊혀진 속도는 불가사의하다고 할 수 있다. 강준만의 책이나 칼럼에 붙는 댓글들은 욕설과 조롱, 비난 일색이다. 2005년 이후 강준만은 거의 20년 가깝게 그런 정치적, 사회적 환경 속에서 살아왔다. 박수와 찬사는 거의 없고 비난과 조롱, 무관심을 당연한 것인 양 받아들이며 살고 있다. 암묵적인 왕따이자 집단 몰매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정도다. 궁금했다. 강준만은 왜 이렇게 급속히 몰락(?)했을까? 그에 대한 답을 구하고 싶었다.
어떻게 어떻게 강준만이라는 산을 오르긴 올랐다. 그렇다고 등정이니 정복이니 하는 말을 쓸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본격적인 집필에 들어간 것은 지난 2023년 9월부터였다. 일 년여 남짓한 시간 동안 강준만 관련 자료를 읽으면서 메모를 했다. 강준만을 직간접적으로 접한 사람들-제자, 출판사 관계자, 정치인, 동료 교수, 시민운동단체 인물, 취재 기자-을 만났다. 그렇게 해둔 메모가 A4 용지 100매 정도가 되었고 인터뷰 자료가 있으니 마음먹고 달려들면 넉넉잡고 석 달이면 원고를 마무리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연말이면 원고를 넘기고 가벼운 마음으로 새해를 맞이할 수 있을 테고 <그 사람> 연재도 새해부터 시작할 수 있으리라 여겼다.
예상은 빗나갔다. 자료를 정리하면서 해둔 메모는 다시 읽어보니 중언부언이었다. 덜어내지 않으면 쓸 수가 없는 글이 태반이었다. 글을 덜어내고 정리하는 시간이 쓰는 시간에 못지않게 더 필요했다. 석 달이면 되려니 싶었던 원고 작업은 넉 달로, 다섯 달로 늘어만 갔다. 설 전에는 마무리하겠다고 했다가 그것이 2월 말이 되고 3월 말이 되었다. 결국 완성된 초고를 넘긴 것은 4월 초, 당초 생각했던 것보다 두 배의 시간이 걸렸다.
스스로 세워둔 마감을 지키겠다고 연말 모임도 최소화하고 밥 먹는 시간, 잠자는 시간도 아껴가면서 작업을 했다. 명절에도 시간을 나눠서 이 책을 쓰는 데 집중했다. 귀한 분들과 약속도 결례인지 잘 알면서도 취소하기도 했다. 책 한두 달 늦게 나온다고 세상이 달라질 것도 아니고, 이 책 나오기를 목 빼고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는 것도 아닌데 무슨 마음으로 그리했는지 모를 일이다. 하여튼 혼자 어지간히 유난을 떨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다만 그 과정이 그리 고통스럽지만은 않았다는 것은 꼭 말해두고 싶다. 강준만에 대해 생각하고 그 생각을 글로 표현하고 그렇게 쓴 글을 출력해서 보면서 다시 손보고 출력한 원고에 다시 가필하고 덜어내는 과정은 즐거웠다. 그런 작업을 할 때 시간 가는 줄 몰랐다. 힘들었지만 지루하거나 따분한 작업은 아니었다. 글을 쓰고 다듬는 일이 주는 희열이 있다는 것을 새삼스럽게 다시 확인했다. 거기에 더해 강준만이라는 인물은 알면 알수록 매력적인 사람이었다.
강준만은 1인 봉쇄 수도원에 사는 수도자 같은 삶을 살고 있다. 한때는 연구실에 전화도 두지 않고 오로지 팩스만으로 외부와 소통했다. 휴대전화도 미국 연수에 가기 전인 2011년에 처음 장만했다. 언론 인터뷰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 지명도에 비하면-특히 전기 지명도에 비하면 언론과의 접촉에 극히 인색한 사람이었다. 300권에 육박하는 강준만 저작을 다 읽을 수는 없었다. 정치, 언론 비평서와 역사책을 주로 읽었다. 훑어보듯 챙겨본 것이 100여 권, 그 가운데 밑줄 쳐가며 꼼꼼하게 읽은 것은 대략 40여 권 남짓이었다.
강준만을 굳이 만나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글로 세상과 승부한 사람이니 필자도 오로지 글로 강준만과 승부를 보고 싶었다. 몇몇 사람들은 인터뷰 요청을 거절하기도 했지만 강준만에 대해 말할 수 있는 제자와 지인, 동료들에게 강준만에 대해 들을 수 있었다. 그러는 과정에서 인간 강준만에 대해 새롭게 알 수 있었다.
외곽에서부터 취재를 하다 보면 강준만이 어느 시점에 가면 먼저 필자에게 만나자는 말을 하지 않을까 기대했다.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단 한 번도 강준만은 필자에게 어떤 식으로든 접촉해 오지 않았다. 다만 필자가 그의 주변 취재를 하는 것에 대해 출판사 개마고원을 통해 심히 불편하다는 반응을 보였고 그 이후 강준만 지인들과의 연락도 끊어졌다.
최종 원고가 나왔을 때 강준만에게 메일로 원고를 보냈다. 혹시 사실관계가 잘못된 부분이 있으면 바로잡고 싶었고 '진보 반동의 시대'에 대한 의견도 듣고 싶었다. 원고를 보내면서 너무 많은 것을 고쳐 달라고 하면 어찌하나 살짝 고민했다. 강준만을 잘 아는 개마고원 대표 장의덕은 아마도 아무 반응이 없을 것이라고 했다. 필자의 생각은 기우였고 장의덕의 예상이 맞았다. 강준만에게서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글을 쓰면서 가장 고심했던 부분은 공영방송 MBC를 다룬 부분이다. 몇 사람의 얼굴이 마음에 걸렸다. 이러저러한 인연으로 알게 된 사람들, 선하고 의롭다고 자부하는 사람들, 선함과 의로움을 위해 기꺼이 자신을 희생하였던 사람들, 그러나 지금은 더 이상 약자의 처지가 아닌 사람들의 얼굴이 글을 쓰면서 수시로 떠올랐다. 이미 유명을 달리한 후배 이용마도 글을 쓰면서 자주 생각이 났다. 선의를 가지고 비판한다는 말이 가능한 것인가 싶기도 했고 글 몇 줄 때문에 좋은 관계가 훼손되지 않을까 두려웠다는 것, 그럼에도 해야 될 말을 삼키지는 않았다는 말도 여기에 밝혀 두고 싶다.
전 MBC 사장 최승호는 필자의 간략한 질문에 대해 성의 있는 긴 서면 답변을 보내왔다. 그 성의가 고마웠고 그 자체로 많은 사람들에게 소개할 만한 글이기도 했다. 책 말미에 부록으로 실을까도 생각했고, 최대한 글을 요약해서 공영방송 MBC를 다룬 장에 실어볼까도 생각했다. 그렇지만 어떻게 해도 전체적으로 균형이 맞지 않는 편집일 수밖에 없었다. 아깝지만 대폭 덜어낼 수밖에 없었다.
책을 내는 게 처음이 아니지만 여전히 200자 원고지 800매 가까운 글을 쓰다 보면 자신의 글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 방향을 잃기 십상이다. 혼자 글을 쓰다 보면 내가 동으로 가는지 서로 가는지 헷갈린다. 때로는 여기가 섬인지 대륙인지, 대양의 어디쯤에 와 있는지 알 수 없다. 강준만과 너무 밀착해 있는 것은 아닌지, 거리 두기에 실패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종종 두려웠다.
그럴 때마다 마치 SOS를 치듯 옆자리에 있는 양만희 논설위원에게 조언을 구했다. 양만희 논설위원은 글을 시작할 때부터 글의 방향에 대해 상의하고 조언을 구한 사람이다. 그럴 때마다 그는 적절하고 날카로운 조언과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정명원, 심석태, 임승휘도 필자가 조언을 구한 동료이자 친구들인데 그런 친구들의 도움이 없었더라면 그 책은 나올 수 없었을 것이다. 만 33년에서 딱 한 달 빠지는 기자 생활을 마감하면서 몇 가지 아쉬운 것이 있는데 그중에 하나는 양만희 위원 같은 동료를 일상적으로 볼 수 없다는 점이다.
4. 사람에게도, 시대에게도 충성하지 않은 사람책을 낸 이후 지인들의 반응은 예상했던 대로였다. 책이 나오기 전 기대를 표시했던 사람들이 적지 않았고 그런 사람들에게서 시작되는 입소문을 내심 기대했지만 그런 사람들조차 책을 읽은 소감을 전해오지 않았다. 예상했던 반응이라고 해서 아쉽지 않은 것은 아니다. <진보 반동의 시대>라는 개념이 정교하지는 않지만 화두는 될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거의 묵살 수준이었다. 그 개념에 다양한 해석이 더해지기를 원했다. 그것은 과욕이었다. 달을 가리키려 했지만 사람들은 손가락을 보기 일쑤였다.
강준만을 통해서 그가 살아온 시대의 가치를 말하고 싶었는데 사람들은 강준만의 영향력을 먼저 보려고 한다. 강준만의 삶과 글을 통해서 내 생각을 말하려고 하였는데 사람들은 강준만이라는 이름 석 자만으로 글을 평가하려고 했다. 강준만이라는 소재를 통해서 진보의 반동 시대라는 개념에 대해 말하고 싶었는데 사람들은 강준만이라는 이름 석 자에서 좀처럼 벗어나려 하지 않았다.
강준만의 고립이 처음에는 무기였지만 후기로 갈수록 고립 때문에 강준만이 육지와는 다른 진화 과정을 겪은 것 아니냐는 생각이 들었다. 어떻게 봐도 강준만이 전기에 비하면 후기에 들어 대중의 관심을 받지 못한 것은 부인할 수 없는데 그 이유를 강준만의 고립에서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그렇지만 고립과 퇴보가 어떤 논리적인 연결 고리를 갖는 것인지를 밝히지는 못했다.
육지와는 다른 진화 과정을 겪은 것 아니냐고, 강준만이 갈라파고스섬의 새 같은 존재가 된 것 아니냐고 후기에 썼다가 지웠다. 논리적 근거를 제시하지 못한 채 그런 주장을 하는 것이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여전히 그 문제의식은 가지고 있다. 대중과의 불화, 진영 정치의 강화 등을 이유로 들었지만 그런 것들이 꼭 후기에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전기라고 해서 강준만이 대중 친화적이거나 대중들이 듣기 원하는 말만 했던 것도 아니고 그때라고 해서 진영 간의 대결이 지금보다 덜했다고 할 수도 없다.
생각이 변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문제는 이해관계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 문제일 뿐이다. 돈을 따라 생각이 달라지고 권력을 좇아 자신의 입장을 바꾸는 것은 매명이며 매문이라고 할 수 있다. 죄를 지은 사람을 잡아들이고 그들에게 형을 선고하던 사람들이 입장이 달라졌다고 죄지은 자를 변호하는 모습은 아무리 좋게 봐도 아름답지 않다. 같은 입과 같은 손으로 다른 일을 하는 것은 아무리 봐도 박수받을 일은 아니다. 기업을 감시하던 사람이 어느 순간 기업인으로 옷을 갈아입고 어제 했던 자신의 말을 오늘 부인하고 뒤집는 것은 아름답지 못하다. 결국은 정의도 챙기고 돈도 챙기고 권력도 챙기고 거기에 명예까지 챙기려 드는 것이 문제인 것이다.
전북대학교에서 퇴임할 무렵 당시 전북대 총장이 강준만에게 석좌교수 자리를 권했다. 석좌교수가 되면 연구실을 제공하고 몇 가지 혜택이 있다. 재직하는 동안 전북대학교를 대표할 만한 업적을 남긴 공로도 인정하고 앞으로 석좌교수로 전북대를 알리는 역할도 기대한 제안이었다. 나름 연구 업적이 있다는 자부하는 퇴임 교수들 중에는 이 타이틀을 얻기를 원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예우도 예우지만 석좌교수라는 타이틀 자체가 주는 매력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 강준만은 이 제안을 별로 고민해 보지도 않고 거절했다. 자신의 퇴직 후 직함은 명예교수라는 말로 충분하고 글 쓰고 책 보는 공간은 전주 시내에 있는 개인 연구실이 있으니 굳이 학교에 연구실을 둘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남은 이야기는 스프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