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주형 기자의 씨네멘터리

[씨네멘터리] 도쿄 공중화장실 청소부의 '완벽한 하루'

이주형 기자의 씨네멘터리 #113


도쿄의 새로운 랜드마크인 높이 634m의 마천루, '스카이트리'가 올려다 보이는 한 주택가. 매일 새벽이면 한 할머니가 골목길을 비질하고, 히라야마 씨는 그 소리에 눈을 뜨며 하루를 시작합니다.

혼자 사는 히라야마 씨는 간단하게 칫솔질과 세수를 한 뒤 푸른색 오버올 작업복을 입고 집을 나섭니다. 작업복 등판에는 'The Tokyo Toilet'이라고 크게 쓰여있습니다. 그는 문을 열고 마당에 발을 딛자마자 하늘을 한번 올려다봅니다.(이때 그의 표정이 중요합니다) 그리고는 집 앞 자판기에서 캔 커피 하나를 뽑아 들고 역시 파란색 미니밴을 운전해서 일터인 시부야로 향합니다.

골목길을 빠져나와 큰길에 접어든 히라야마 씨는 차창 너머로 스카이트리를 한번 슬쩍 올려다본 뒤 카세트 테이프를 넣어 음악을 틉니다. 1960년대 록의 명곡인 애니멀스의 '하우스 오브 라이징 선(House of Rising Sun)'이 흐릅니다. 히라야마 씨는 도쿄의 공중화장실 청소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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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카이트리에서 내려다 본 도쿄 시내 ⓒstoryd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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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김영하는 "읽을 책을 사는 게 아니라 산 책 중에 읽는 거"라고 했다는데, 저는 책을 살 때의 희망과 달리 독서가라기보다는 '츤도쿠'(積ん読, 책을 사서 읽지 않고 쌓아두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로 일본어에만 있는 표현이다)'에 훨씬 가깝습니다. 그런 제가 이른바 '메소드 연기'에 대해 한번 알아보겠다는 야심으로 몇 달 전 구입했던 700쪽에 육박하는 벽돌책, "메소드"(The Method)를 부랴부랴 펼쳐보게 된 건 순전히 이 영화 때문이었습니다.

"퍼펙트 데이즈".

(The Perfect Days)

일본의 국민 배우 야쿠쇼 코지("쉘 위 댄스"의 바로 그 주인공 회사원입니다)에게 76회 칸 영화제 남우주연상을 안긴 영화입니다. 이 영화는 표정 연기로 시작해서 표정 연기로 끝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특히 엔딩 씬에서 야쿠쇼 코지의 표정 연기는 그와 비슷한 걸 본 적도 없는 것 같습니다.

'메소드'-. 20세기 초반, 모스크바 예술 극장의 배우이자 연출가인 스타니슬랍스키가 '시스템'이란 이름으로 시작한 이 연기술은 1922년, 모스크바 예술극장의 미국 투어와 함께 브로드웨이와 할리우드에 입성했습니다.

거칠게 요약해서, 배우가 자신의 인생 경험을 깊이 탐색하는 이른바 '정서 기억'을 통해 캐릭터에 몰입하는 극사실주의 연기 스타일을 지칭하는 '메소드'는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1951)에서 말론 브란도의 연기를 통해 세상에 널리 알려지기 시작합니다.

"그는(말론 브란도) 사람들이 실제 말하는 것처럼 말한다. 대사를 툭툭 던지고 어눌하게 발음한다. 비비안 리가 연기하는 거짓과 허식으로 점철된 캐릭터인 블랑쉬와의 대조가 이보다 더 명확할 수 없다. 브로드웨이 무대 위 블랑쉬의 거짓된 모습은 고전적인 훈련을 받은 영국 여배우의 그것이었다." ("메소드", 400쪽)

할리우드에 이식된 메소드 연기를 훈련받은 배우들의 리스트는 놀랍습니다. 말론 브란도, 마릴린 먼로, 더스틴 호프먼, 워렌 비티, 잭 니콜슨, 알 파치노 그리고 로버트 드 니로…

1967년 작 "졸업"과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와 1969년 작 "이지 라이더", "내일을 향해 쏴라", 1972년 작 "대부" 등 '뉴 아메리칸 시네마'를 이끌었던 영화들에는 이 '메소드 배우'들이 대거 출연하며 할리우드 연기의 대종을 이룹니다.

'영원한 청춘' 제임스 딘도 UCLA를 자퇴하고 메소드 연기를 배웠습니다. 제임스 딘이 "에덴의 동쪽"으로 영화사 최초로 사후(死後)에 아카데미상 연기 부문 후보에 오른 1956년, 일본 나가사키에서는 야쿠쇼 코지가 태어났습니다.

60년이 훌쩍 넘게 흐른 뒤에 "퍼펙트 데이즈"로 칸 영화제 남우주연상 수상한 야쿠쇼 코지는 한 인터뷰에서 "전세계 사람들이 저를 배우가 아니라 화장실 청소부로 보면 좋겠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자신만의 메소드 연기를 펼쳤다는 뜻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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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 시부야의 공중화장실을 청소 중인 히라야마 씨(야쿠쇼 코지) / 티캐스트

야쿠쇼 코지가 연기하는 화장실 청소부 히라야마 씨는 매일의 루틴이 있습니다. 아침에 일어나 캔 커피 하나를 뽑아들고 출근해서 화장실을 청소한 뒤 도심 속 작은 공원을 찾아 샌드위치와 우유로 점심을 먹습니다. 차로 이동할 때는 주로 60-70년대 올드 팝을 듣습니다. 퇴근하면 동네 목욕탕에 들러 목욕을 한 뒤 아사쿠사 역 근처 허름한 지하상가 식당에서 간단한 안주에 하이볼 한잔을 들이키고 귀가해서 윌리엄 포크너나 패트리샤 하이스미스를 100엔짜리 문고판으로 읽다가 잠이 듭니다. 어찌보면 단조롭고 고독한 삶입니다. 하지만 편안한 얼굴의 히라야마 씨는 이 루틴을 차곡차곡 쌓아갑니다.

그의 화장실 청소는 매우 꼼꼼합니다. 잘 보이지도 않는 변기 밑에까지 돋보기를 들이대고 깔끔하게 닦습니다. 젊고 게으른 그의 동료 다카시가 "어차피 다시 더러워질텐데 뭐 그렇게까지 하냐"고 해도 히라야마 씨는 조용히 미소지을뿐입니다.

히라야마 씨는 미니멀리스트입니다. 세간은 단출합니다. 다다미방에 책장과 카세트테이프 진열장, 그리고 식물들을 기르는 상(床) 정도가 전부입니다. 그런 그를 유일하게 맥시멀리스트로 보이게 하는 것이 있으니, 바로 자신이 매일 찍은 사진을 모아두는 월별로 정리된 사진통들입니다.

그의 중요한 루틴 중 하나가 점심 먹으면서 공원에서 사진을 찍는 겁니다. 올림푸스 필름 카메라로 찍은 사진은 휴일에 사진관에 가서 현상한 뒤 맘에 드는 것만 골라 통에 넣어 보관합니다. 그가 찍는 것은 나뭇잎이 바람에 흔들릴 때 그 사이로 햇빛이 일렁이는 순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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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모레비'를 보고 있는 히라야마 씨와 그의 조카 / 티캐스트

'코모레비'.(木漏れ日) 히라야마 씨가 찍는 그 찰나의 순간을 일컫는 일본말입니다. '다른 나라 말로 옮길 수 없는 세상의 낱말들'이란 부제를 달고 2016년에 출간된 "마음도 번역이 되나요"라는 책에도 실려있는 단어입니다.

이 책을 번역한 싱어송라이터 루시드 폴은 '옮긴이의 글'에서 어떤 일본인이 자신의 음악을 두고 '코모레비'만큼이나 화사하다고 한 적이 있다며 "그 이후 오래도록 '이 아름다운 낱말을 우리말로 옮길 수는 없을까?'생각해 왔습니다"라고 적었습니다. (비슷한 뜻을 가진 우리말로는 '볕뉘'가 있습니다)

그런데, '코모레비'처럼 순간의 일상을

쌓.아.서.

'퍼펙트 데이즈'로 만들며 살아가는 히라야마 씨에게서는 솔직히 말하건대 어쩔 수 없는 먹물 냄새가 납니다. 고 홍세화 씨가 "나는 빠리의 택시 운전사"라고 했다면 히라야마 씨는 "도꾜의 화장실 청소부"인 겁니다.

감독 빔 벤더스는 말합니다. "과거에 아주 특권층이고 부유했지만 깊이 추락한 남자를 생각했다. 그러다 본인의 삶이 가장 저점에 떨어진 어느 날 자신이 깨어난 시궁창 같은 공간에 기적적으로 비쳐드는 햇빛에 나뭇잎이 반사되는 것을 보며 깨달음의 순간을 얻게 된 거다. 이렇게 갑자기 나타나 찰나로 사라지는 형상을 지칭하는 일본어가 있다, '코모레비'라고…. 바로 그 형상이 히라야마를 구원했고 그는 다른 인생을 살아보기로 한다. 단순하고 소박한 인생을. (제작사 제공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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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펙트 데이즈"의 각본가이자 제작자인 타카사키 타쿠마는 "야쿠쇼 코지 배우가 어떻게 그 경지에 이르렀는지 도저히 알 수가 없다. 몇 번이고 배우에게서 답을 이끌어내려 해봤지만 그 본질에 닿을 수 없었다."라고 말했습니다.

벽돌책 "메소드"를 후루룩 다 읽었지만 여전히 메소드 연기가 무엇인지 정확히는 모르겠습니다. 읽을수록 더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이건 압니다. 그게 메소드연기든 아니든 "퍼펙트 데이즈"에서 야쿠쇼 코지의 엔딩 씬 연기는 최고였다는 것을요. 연기의 신이 있다면 바로 그 순간에 강림했다는 것을요.

'나에겐 새로운 새벽, 새 날, 새로운 인생이라 기분이 좋아'라는 가사의 노래 '필링 굿'(Feeling Good)이 카세트 테이프로 재생되는 가운데, 출근길 운전석의 히라야마 씨는, 야쿠쇼 코지 씨는,

웃는 것도 아니고 우는 것도 아닌, 희망에 찬 것도 같기도 하고 회한에 잠긴 것도 같은, 행복해 보이기도 하고 동시에 슬퍼 보이기도 하는, 말 그대로 '천변만화'(千變萬化)하는 듯한 표정 연기를 2분 동안 컷 없이 롱테이크로 펼쳐냅니다.

"전세계 사람들이 저를 배우가 아니라 화장실 청소부로 보면 좋겠습니다"라고 한 야쿠쇼 코지에 대해 제작자는 "관객들이 히라야마 씨를 만나고 싶다는 생각으로 시부야의 공중화장실을 찾아오게 됐으면 좋겠어요"라고 답했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시부야에 가면 히라야마 씨가 된 야쿠쇼 코지 씨가 공중화장실을 청소하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을 것만 같습니다.

명망있는 건축가와 디자이너 16명이(그 중에는 '스카이트리'를 설계한 안도 다다오도 있습니다) 도쿄 시부야구에 있는 17개 공공화장실을 설계한 '도쿄 화장실 프로젝트'팀의 의뢰로 이 영화를 연출한 세계적인 거장 빔 벤더스는 촬영을 마치고 독일로 돌아가 히라야마 씨에게 이런 편지를 보냈습니다.

2022년 11월 5일 , 베를린.

히라야마 씨에게

제 나라 독일로 돌아온 지 일주일이 살짝 넘은 지금, 당신이 갈수록 그립다는 고백을 해야겠습니다. 당신의 조용한 존재감, 친근한 미소, 그리고 일에 대한 헌신은 제게 아주 소중해졌습니다.

(중략)

아내와 저는 이 나라 독일과 베를린의 일상 속에서도 항상 '코모레비'를 봅니다. 그리고 이 덕분에 당신을 생각하게 되고, 가끔 당신을 기억하며 코모레비의 사진을 찍습니다. 그리고, 또 때때로 그 코모레비를 향해 꾸벅 인사를 합니다.

매번 이 코모레비 덕에 나무와 잎새들, 그리고 이들 사이로 움직이는 바람을 통해 코모레비를 만들어주는 빛에 감사하게 됩니다.

당신이 그걸 제게 가르쳐주셨죠, 히라야마 씨!

당신이 '그저 허구의 인물'일 리가 없어요!

결국 스크린 위에서만 존재한다고 할지라도 당신은 분명히 존재하고 있습니다.

당신의 친구, 빔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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