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사가 김이나 씨는 언젠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자신을 지탱해 주는 힘은 '빠심'이라고요. '빠심'은 특정 연예인 등을 맹목적으로 좋아하는 마음을 낮잡아 이르는 말입니다. 즉, 그녀는 지금의 자신을 있게 한 원동력이 뮤지션들에 대한 순수한 동경과 애정이었다고, 스스로에 대해 겸손하게 이야기했던 것입니다.
어떤 존재를 열렬히 좋아하는 '빠심'을 우리 사회가 굳이 폄하할 이유가 있나 싶지만, 여전히 '빠심'에 대한 편견이 만연한 건 사실입니다. '빠심'에서 파생된 '빠순이', '빠돌이' 같은 표현은 무비판적, 맹목적으로 추종하는 행태를 비아냥거릴 때 쓰입니다.
하지만 김이나 씨의 '빠심'이 그녀를 존재하게 했듯, 우리 주변의 어떤 '빠심'은 사회의 편견을 깨부수며 올바른 시선을 요구합니다. 그들 스스로를 지탱하는 힘이 될 뿐 아니라, 기후위기에 맞서 '우리'를 지탱하는 원동력이 되고 있습니다. 바로 여러 기업들의 기후 행동을 촉구하고 실제 성과를 내온 케이팝포플래닛의 이야기입니다.
케이팝포플래닛은 전 세계 케이팝 팬들이 함께 '기후 행동'을 하는 온라인 플랫폼으로 2021년 3월 만들어졌습니다. "인종과 젠더, 신념을 뛰어넘어 전 세계 케이팝 팬들이 기후위기에 대해 배우고 토론하며, 기후 정의를 위한 행동에 함께 참여할 수 있는 플랫폼이 되겠다"는 당찬 포부로 4년째 '열일'해 왔습니다.
그들의 활동 여파는 엔터 기업 영역에만 국한되지 않았습니다. 현대자동차는 화석연료로 알루미늄을 만들고 석탄 화력발전소를 짓던 인도네시아의 알루미늄 공급사와의 계약을 중단했습니다. 구찌, 생로랑 브랜드를 보유하고 있는 케이링도 재생에너지 사용과 관련해 케이팝포플래닛 측과 협의 중입니다. 스트리밍 업체 멜론은 2030년까지 재생에너지를 100% 이용하는 클라우드 서비스로 이전하기로 했습니다.
이러한 결과를 이끌어낸 데는 케이팝포플래닛이 있었습니다. 전 세계에 흩어진 케이팝포플래닛의 고정 활동가(캠페이너)는 8명입니다. 또, 앰버서더 프로그램을 통해 많은 케이팝 팬들이 활동을 돕고 있습니다. 이들은 거의 매일 메신저나 화상회의 시스템을 활용해 온라인에서 만나, 각국의 기후위기 이슈를 공유하고, 캠페인 아이디어를 나눕니다. 이 케이팝포플래닛 활동 대부분의 중심에는 이다연 캠페이너(고정 활동가)와 누를 사리파 캠페이너가 있습니다. 이다연 캠페이너는 현재 일본에서 유학 중인 대학생이고, 누룰 사리파 캠페이너는 대학 졸업 후 전업으로 기후위기 대응에 전념하는 활동가입니다. 이들을 화상 인터뷰로 만나봤습니다.
Q. 이다연 캠페이너는 에스파를 가장 좋아하고, 누룰 사리파 캠페이너는 엑소를 가장 좋아한다고 들었습니다. 케이팝을 좋아하는 두 분이 어쩌다 기후위기 대응에도 한목소리를 내게 되었나요?
(이다연)
고등학생 때 신문을 읽는 게 하나의 취미였는데, 그 취미를 계기로 기후위기가 심각한 문제라는 걸 깨닫고 '청소년 기후 행동'이라는 단체에 가입했습니다. 그리고 그 단체에서 누룰 사리파와 연이 닿았는데, 기후위기와 케이팝 팬이라는 관심사가 겹치는 걸 알게 됐습니다. 그래서 이걸 잘 섞어서 케이팝 팬들을 위한 기후 행동 플랫폼을 만들어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같이 활동을 시작하게 됐습니다.
(누룰 사리파)
케이팝 팬들에 대해, 단지 노래만 즐기거나, 콘서트에 가는 것 외에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다는 오해들도 있지만 이는 사실이 아닙니다. 저희가 케이팝포플래닛을 결성하기 전에도, 이미 많은 케이팝 팬들이 나무를 심고, 동물을 입양하며 기후위기에 대응하는 방법을 찾아왔습니다. 그래서 저와 다연은 케이팝을 사랑하면서도 지구에 관심이 많은 이들 사이의 연대를 위한 포용적인 플랫폼으로 케이팝포플래닛과 같은 것을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엔터사는 물론 '현대차'와 '멜론'에도 영향Q. 케이팝포플래닛의 활동이 많은 변화를 일으켰습니다. 그동안 구체적으로 기업들에 어떤 노력을 요구해 왔고, 그 결과가 어떠했는지 독자분들께 소개 부탁드릴게요.
(누룰 사리파)
우리는 2021년에 출범한 이래 케이팝 산업, 기업들을 대상으로 8번가량의 캠페인을 진행했습니다. 또한 150개 이상의 국가에서 5만 7천 명 이상의 청원자를 모았습니다. 최근에는 방탄소년단의 노래 '마이크 드롭'(Mic Drop)에서 이름을 딴 '현대, 석탄 멈춰'(Hyundai, Drop Coal) 캠페인을 벌였습니다. 현대차에 석탄 발전으로 알루미늄을 생산하는 인도네시아 협력사인 아다로미네랄과 업무 협약을 철회할 것을 요구하는 캠페인이었습니다. (※ 최근 현대차는 이 요구를 사실상 받아들이는 결정을 내렸습니다.)
또, 저희는 BTS와 블랙핑크, NCT 등을 홍보대사로 섭외한 인도네시아의 대표 IT 기업 토코피디아에 환경을 위해 재생에너지를 쓸 것을 요청하는 캠페인도 진행했습니다.
(이다연)
제가 캠페인 리더를 맡아서 제일 처음 진행했던 건 '죽은 지구에 케이팝도 없다'는 앨범 캠페인이었습니다. 처음엔 온라인 청원으로 시작해, 150개국에서 1만 명 이상의 케이팝 팬들 서명을 모으고 국회 포럼을 통해 '4대 기획사'에 전달했고, 3주 안에 케이팝 팬들로부터 8천 장 이상의 앨범을 받아서 각 엔터사별로 분류, 포장해서 전달도 했습니다.
그 이후에 많은 변화가 생겼습니다. 예를 들어 모든 메이저 엔터사들이 전부 ESG 보고서들을 발간했고, JYP 같은 경우는 한국 엔터사 최초로 한국형 RE100을 달성했습니다. YG는 친환경 앨범을 발매하고 또 최근에는 지속 가능 공연 보고서도 발간해서 다방면으로 노력하고 있더라고요. SM 같은 경우도 UNGC 가입을 하고 친환경 앨범을 발매하고 있고요. 하이브는 BTS 솔로 멤버인 제이홉의 앨범을 디지털 플랫폼 앨범으로 해서, 앨범 쓰레기를 최소화할 수 있는 방안을 사용했습니다.
저희가 엔터사 외에도 팬들의 목소리를 다른 기업에 전달하기 위해서 '멜론은 탄소맛'이라는 스트리밍 캠페인을 또 진행했었어요. 팬들 사이에는 앨범을 대량 구매하는 것 말고도 '스밍'이라는 문화가 있는데, 스트리밍 플랫폼에서 계속 재생을 해서 음원 점수를 올려주는 문화예요. 그런데 국내 스트리밍 플랫폼들이 화석연료를 사용하는 데이터센터를 이용하다 보니, 음악을 듣는 과정에서 탄소가 배출되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래서 저희가 팬들이 죄책감 없이 음악을 듣고 가수를 응원할 수 있게, 재생에너지를 사용하는 데이터센터를 이용해달라는 요구를 전달했습니다. 국내 점유율이 가장 좋은 멜론에 주로 전달을 했었고, 여러 번 논의를 통해서 2030년까지 재생에너지 100%를 사용하는 클라우드센터로 이전하겠다는 약속도 받아냈습니다.
Q. 현재 다수의 해외 명품 브랜드들이 케이팝 아티스트들을 앰버서더로 선정하고 있습니다. 케이팝포플래닛에서는 이를 두고 '그린 워싱'에 빗댄 'K 워싱'이라고 비판하고 있는데, 그 이유는 무엇인가요?
(이다연)
그 캠페인이 패션 캠페인이었던 '명품 언박싱: 그린워싱 에디션'이라는 캠페인이었습니다. 최근 케이팝 아티스트들이 명품 브랜드 앰버서더가 되어서 젊은 고객층들을 타깃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저희가 살아갈 미래 환경은 전혀 고려하지 않고 있다는 느낌이 들어서 저희가 3가지를 요구했습니다. 첫째는 그린 워싱을 멈춰달라는 것, 둘째는 2030년까지 공급망에서 재생에너지 100%를 사용해달라는 것, 마지막으로 어떤 에너지를 쓰고 있는지 자세한 정보를 공개해달라는 것이었습니다.
Q. 온라인 청원뿐 아니라 전 세계 도시 곳곳에서 트럭 시위도 진행했죠?
(이다연)
네, 저희가 온라인 청원을 1만 1천 명 정도 모은 다음에 아무래도 글로벌 기업들을 대상으로 하다 보니 다양한 도시에서 액션을 진행하면 좋겠다 생각해서 트럭 시위 액션도 했는데요. 총 6개 도시, 파리, 런던, 뉴욕, 서울, 도쿄, 자카르타에서 진행을 했어요. 이들 도시에 '그린 워싱을 멈추라'는 팬들의 목소리를 담은 트럭을 보냈는데, 저희만 한 것이 아니라 블랙핑크의 팬덤인 '블링크', 특히 그중에서도 블랙핑크 멕시코라는 팬베이스, 트위터 계정이 있는데 저희가 다섯 군데랑 콜라보를 해서 이 블랙핑크 팬덤이 우리를 지지하고 있다는 걸 보여주는 트럭을 보냈습니다. 그리고 블랙핑크의 멤버들이 활동하고 있는 샤넬, 디올, 셀린느, 생로랑 매장이랑 각 도시의 랜드마크에서 사진도 찍었고요. 활동을 끝낸 이후에는 그동안 모았던 청원과 액션 사진을 다 모아서 브랜드들에 메일을 보냈습니다.
(남은 이야기는 스프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