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마스 가자지구 지도자 신와르
"신와르가 20년 전 저를 생명의 은인이라고 부르며 제 전화번호를 물어보기도 했죠. 그때 제 번호를 알려줬더라면…."
이스라엘 치과의사인 유발 비튼은 20년 전 그날을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합니다.
의대를 졸업하고 8년째 이스라엘 남부 베르셰바 교도소 의무실에서 의사로 일하던 2004년 당시 비튼은 하마스 수감자 중 한 명을 응급 상황으로 진단하고 재빨리 교도소 밖 병원으로 이송시켰습니다.
이 수감자는 뇌농양 제거 수술을 받고 간신히 목숨을 구했습니다.
비튼은 적이기 이전에 환자로서 생명을 구해줬던 이 수감자가 20년 뒤 하마스 수괴로 올라서 지난해 10월 7일 새벽 이스라엘 남부를 기습하는 장면을 TV 긴급 뉴스로 지켜봐야 했습니다.
이 수감자는 다름 아닌 하마스의 악명 높은 가자지구 지도자 야히야 신와르이며, 당시 기습에서 붙잡혀간 이스라엘 포로 중에는 비튼의 조카도 포함돼 있었다고 미 일간 뉴욕타임스(NYT)가 26일(현지시간) 전했습니다.
NYT는 비튼을 포함한 이스라엘 교도소 관계자 인터뷰와 당시 남겨진 신와르 관련 기록 등을 토대로 20년 전인 2004년 초반으로 거슬러 올라가 비튼과 신와르의 얽히고 설킨 악연을 추적했습니다.
당시 청년이던 신와르는 이스라엘에 협력했다는 의심을 품고 팔레스타인인들을 살해한 혐의로 1989년부터 수감 중이었습니다.
비튼은 2004년 문제의 그날 의무실에서 혼수 상태로 실려온 신와르를 보고 다른 의료진과 함께 '뇌에 문제가 있다'는 진단과 함께 그를 급히 병원으로 이송해 뇌농양을 제거하도록 했습니다.
비튼은 치과 뿐 아니라 일반 의학 수련도 받았기 때문에 종종 호출을 받고 상처 봉합이나 까다로운 진단 등의 업무에 있어 교도소 내 다른 의사들을 지원했고, 그날도 신와르에 매달리고 있던 의사들에 합류했습니다.
이를 계기로 신와르는 비튼에게 "생명을 빚졌다"며 감사를 표했고, 이를 계기로 두 사람은 '조심스럽게 상호 존중'하는 사이가 됐다는 게 NYT의 전언입니다.
이들은 의사와 환자인 동시에 서로에게서 정보를 캐내야 하는 적으로서 복잡한 관계를 이어나갔다고 합니다.
특히 신와르는 이전까지만 해도 이스라엘 교도소 당국자들과 대화한 적이 거의 없지만 비튼과는 정기적으로 만나 차를 마시고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고 NYT는 보도했습니다.
비튼은 "신와르와 대화는 개인적이거나 감정적인 것이 아니었다"면서 "하마스에 관한 대화를 나눴다"고 회고했습니다.
그들의 만남은 주로 감방 뒤편에서 이뤄졌으며, 나이에 비해 빨리 자라난 새치머리 등으로 공통점이 있었다고 합니다.
두 사람이 이어가던 '적과의 대화'는 2011년 신와르가 이스라엘 교도소에서 전격 석방되면서 끊겼습니다.
당시 2006년 하마스에 납치됐던 이스라엘 병사 길라드 살리트와 팔레스타인인 1천27명을 맞교환하는 협상에서 신와르도 풀려나면서 22년 간의 수감생활을 뒤로하고 하마스의 품으로 돌아갔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들의 얄궂은 인연은 여기에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로부터 12년 뒤인 지난해 10월 7일 하마스는 이스라엘 남부를 기습해 민간인 1천400여 명을 살해했고, 그 배후에는 하마스에서 승승장구해 가자지구 지도자가 된 신와르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비튼은 기습 당시 붙잡혀간 이스라엘 주민 중에 조카가 포함됐다는 비보에 "애간장이 녹는 심정이었다"며 "내 생각에는 그때 내가 적인데도 신와르의 생명을 구했던 것처럼, 신와르도 같은 방식으로 내 조카를 대할 것이라고 본다"고 말했습니다.
(사진=AP,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