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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프] 남성성을 상징하던 세 명의 죽음

[뉴욕타임스 칼럼] By 로스 두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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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스 두댓은 오피니언 칼럼니스트다.

최근 여러모로 중요한 인물 세 명이 죽었다. 테드 카진스키(Ted Kaczynski), 실비오 베를루스코니(Silvio Berlusconi), 그리고 코맥 매카시(Cormac McCarthy)다. 각각 자신을 대단한 철학자라고 생각한 살인마, 오늘날 서구 사회의 포퓰리즘을 만들어 낸 거물, 그리고 성경 구절을 전혀 성스럽지 않은 방식으로 차용해 이야기를 쓴 소설가의 죽음이다 보니, 이 죽음의 의미를 글 한 편에서 하나의 주제로 묶어내기란 어딘가 부자연스러워 보이기도 한다.

어쩌면 남성성의 소외라는 주제가 의외로 자연스럽게 셋을 묶어낼 수 있을 것 같기도 하다. 세 남자는 모두 후기 근대 문명의 규칙과 법칙으로부터의 소외, 특히 남성성의 소외를 상징한다. 다만 세 명이 대변하는 소외는 각각 조금씩 그 상징의 양식이 다르다.

최근 들어 이른바

남성성의 위기

를 둘러싼 이야기가 많다. 남성성의 위기는 젊은 남성이 교육, 사회적 야망 등 여러 지표에서 또래 여성에 뒤처진다는 통계에서도 드러난다. 이에 대한 해법으로 좌파는 사회에 깊이 뿌리내린 남성 중심 가치관을 해체하자고 주장하고, 우파는 전통적인 남성성을 회복하고 복원하는 방식을 선호한다. 이렇게 해법은 서로 다르지만, 문제의 근본적인 원인은 비교적 명확해 보인다. 바로 두 차례 세계대전이 끝난 뒤 후기 산업화 시대가 꽤 오래 지속되면서 남성이 비교우위를 가진 가치가 과거보다 갈수록 덜 중요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비교우위라는 표현에 생물학적인 요소가 어쩔 수 없이 포함되긴 하는데, 그 점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성별에 따른 사회화라고 표현할 수도 있다.)

흔히 전통적인 의미에서 남성성을 이야기할 때 우리는 보통 신체적 힘, 폭력을 행사하는 데 능한 주체와 같은 점을 언급한다. 힘과 완력은 역사에서 늘 중요한 요소이긴 했지만, 1870년보다 1370년에 훨씬 더 중요했을 것이고, 지금과 비교하면 1870년에 더 높은 가치를 인정받았을 것이다. 더는 쓸데없어진 가치는 억압되거나 길들여지거나 어떤 식으로든 교육을 통해 사회에서 자취를 감추는 게 순리다.

그럼, 순리대로 길들여질 운명을 받아들이기 거부하는 남성들은 어떻게 되나? 그들에게 주어진 한 가지 선택지를 테러리스트 카진스키는 삶을 통해 직접 보여줬다. 그들은 분노로 가득 찼고, 잔뜩 비뚤어진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며, "옛날이 좋았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산다.

그들은 과거의 삶이 더 진실하고, 자유로웠으며, 솔직했다고 미화하지만, 이는 사실과 다르다. 그들은 불만과 철학을 혼동한다. 카진스키의 선언문을 추종하는 이들이 온라인에 제법 많지만, 카진스키가 대단한 사상인 양 설교하는 내용은 실은 "파이트 클럽"처럼 웃자고 만든 영화에서 다루면 더 재미있을 수준의 공상에 가깝다. 혁명을 꿈꾼다는 이들이 하는 짓이 그저 무고한 이를 이유 없이 살해하는 범죄라는 것도 문제다. 학교에서 총기를 난사하는 이들, 종교의 이름으로 무차별 테러를 저지르는 이들, 온갖 '묻지 마 혐오 공격'을 벌이는 이들은 모두 카진스키의 추종자라고 할 수 있다.

베를루스코니는 이와 다른 방식으로 소외되는 남성성을 지키고자 했던 반항아다. 이탈리아 총리를 지낸 베를루스코니는 분노에 가득 차 폭탄 테러를 일으키던 카진스키의 방식을 택하지 않아도 됐다. 현대 사회가 남성성을 길들인 결과 위축된 남성성이란 가치의 지위를 베를루스코니는 어느 정도 받아들였다. 대신 그는 일종의 풍자, 오락 또는 윙크나 음흉한 시선, 낄낄거리는 웃음을 앞세운 나름의 반항으로 전통적인 남성성을 지켜내고자 했다.

그는 특유의 말재주를 앞세워 남성의 폭력은 누구나 사소한 실수 끝에 어쩌다 보면 저지를 수도 있는, 하지만 크게 문제 될 것 없는 일로 치부했다. 베를루스코니의 정치 역정을 보면, 그는 점점 더 남녀의 형평성을 고려하는 게 중요해진 정치 풍토 속에서 '나쁜 남자'로서 상당한 성공을 거뒀다. 군중 속에서 단연 돋보일 만큼 충격적이고, 현재 상황에 불만을 가진 사람들을 끌어모으기 충분하며, (누군가는 저급한 방식이라고 손가락질했지만) 어쨌든 살인마의 길 대신 주류에 남아 경쟁하는 길을 택했기 때문이다.

도널드 트럼프는 물론 보리스 존슨 같은 포퓰리스트 정치인들이 베를루스코니를 연상케 하는 천박한 농담이나 언변을 구사해 인기를 얻은 건 놀라운 일이 아니다. 또한, 베를루스코니의 이탈리아나 존슨의 영국이 모두 '정력왕 남성'을 앞세운 정책의 결과 막다른 골목길에 부닥친 듯한 것도 놀랍지 않다. 앞서 남성성의 위기에 맞서 좌파가 내놓은 남성 중심 가치관의 해체라는 해법을 떠올려 보면, '정력왕 남성'을 선출한 우파의 해법은 장기적으로 남성성의 부활을 가져오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남은 이야기는 스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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