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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드리포트] "아내도 모르게 하라"…한 · 중 수교 협상 뒷얘기


오는 24일은 한국과 중국이 수교를 맺은 지 30주년 되는 날입니다. 1992년 8월 24일 두 나라는 중국 베이징에서 한·중 수교 협정을 체결했습니다. 이에 앞서 4개월간 진행된 한·중 수교 협상은 '007 작전'을 방불케 할 정도로 극비리에 이뤄졌습니다. 이유가 뭔지, 어떤 식으로 진행됐는지 당시 실무 협상을 책임졌던 권병현 전 주중 대사로부터 협상 뒷이야기를 들어봤습니다. 권병현 전 대사는 올해 84세로, 한·중 수교 실무 협상 대표와 주중 대사, 재외동포재단 이사장 등을 거친 외교 원로입니다. 지금도 한·중 문화청소년협회 미래숲 대표와 유엔 토지 대사 등을 맡아 왕성한 활동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권 전 대사의 인터뷰 내용을 일문일답 형식으로 정리해 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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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년 한·중 수교 협정 체결 모습

Q. 한·중 수교 협상을 비밀리에 진행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A. 당시는 북한 김일성 주석이 살아 있을 때였습니다. 중국에 대한 김일성 주석의 영향력은 컸는데, 북한은 중국이 한국과 독자적으로 수교하는 것에 반대했습니다. 중국과 한국이 수교를 한다면, 동시에 북한도 미국·일본과 수교를 하는, 이른바 '교차 수교'를 원했습니다. 한국도 타이완(중화민국)과 국교를 맺고 있었기 때문에 타이완의 반발이 예상됐던 상황이었습니다. 또 중국 내에서도, 한국 내에서도 상당한 반대 세력이 있었습니다. 극비 상황 속에서 빠른 시일 내에 타결을 지어야 했습니다.

Q. 수교 협상 암호명이 '동해 사업'이었던데, 특별한 이유가 있나요.

A. 주지하다시피 한국과 중국은 서해를 사이에 두고 있습니다. '서해 사업'이라고 하면 누구든지 짐작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하나의 위장 전술이었죠. '동해 사업'은 극소수의 인원끼리만 부르는 코드 네임이었습니다. 서울 용산구 동빙고동에 있던 안기부장의 안가(安家)를 협상 사무실로 제공 받았습니다.

Q. 협상 사실을 가족에게도 비밀로 붙였다고요.

A. 이상옥 당시 외무장관이 내린 훈령 중에는 '마누라한테도 얘기하지 말라'는 내용이 있었습니다. 그만큼 비밀이라는 것입니다. 아내에게는 출장 간다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아내가 추운 지방으로 가는지, 더운 지방으로 가는지 물었습니다. 그것도 얘기할 수 없다고 했더니 아내는 여행 트렁크를 두 개 준비했습니다. 한 쪽에는 더운 지방의 옷이, 다른 한 쪽에는 추운 지방의 옷이 들어 있었습니다. 아내에게 미안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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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중 수교 실무 협상 대표를 맡았던 권병현 전 주중 대사

Q. 당시 수교는 중국과 한국 중 어느 쪽이 먼저 제안한 것입니까.

A. 우리는 1973년 박정희 대통령의 6·23 선언(평화 통일·외교 정책에 관한 특별 성명) 이후 문호를 개방했습니다. 특히 노태우 대통령은 북방 외교로 항상 문을 열어 뒀는데, 이 문을 연 것이 중국 덩샤오핑이라고 봅니다. 당시 중국은 톈안먼(천안문) 사태 이후 서방 세력이 중국에서 빠져나가 개혁·개방이 교착 상태에 있었습니다. 또, 타이완과 다른 나라의 관계를 끊고 싶어 했는데 타이완과 깊은 유대 관계를 가진 나라 중 하나가 바로 한국이었습니다. 즉, 중국 통일에 좋고 경제에도 좋다는 이른바 '무해 양득'설을 내세워 덩샤오핑이 결단을 내린 것으로 보입니다.

Q.

4개월 만에 협상이 성공적으로 진행됐던 이유는 뭐라 보십니까.

A. 두 나라의 이해 관계가 맞았기 때문입니다. 협상이 지체돼 비밀이 새 나갈 경우 한국은 (92년) 대선을 앞둔 시점이라 파장이 엄청났을 수 있습니다. 덩샤오핑도 중국 내 반대파와 북한 김일성의 반대를 무릅쓰고 협상을 추진했기 때문에 오래 끌어서는 성사될 수 없다고 봤을 것입니다. 김일성 주석도 협상이 진행 중임을 모르진 않았을 테지만, 그렇게 빨리 타결이 되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Q.

협상 과정에서 한국이 가장 중요시했던 분야, 관철시키려 했던 조건은 뭔가요.

A. 우리가 가지고 있는 카드는 타이완 카드 하나밖에 없었습니다. 이 카드를 내주기 전에 얻어야 할 것은 최대한 얻어야 했습니다. '하나의 중국'을 인정하는 대신, 한반도의 평화적인 통일을 조기에 달성할 수 있도록 중국에 확고한 지지를 요구했습니다. 결국 이 내용은 공동 성명에 병기됐습니다. 또, 중국과 북한의 혈맹 관계를 깨라고 강하게 주장했습니다. 한국이 타이완과 관계를 끊는 대신 중국도 북한과 혈맹 관계를 청산하라고 했습니다. 중국의 긍정적인 반응을 얻어 냈지만, 중국이 양해를 요청해 수교 문서에는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중국의 6·25 참전 사실도 뜨거운 감자였습니다. 우리는 어떤 식으로든 한국 국민에 대한 중국의 사과가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지만, 중국은 이미 냉전의 산물로 넘어간 것으로 수교와는 관계가 없는 것 아니냐고 했습니다. 많은 논쟁을 벌였지만 수교 문서에는 남기지 못했습니다.

Q.

반대로 중국이 요구했던 것 중에 한국이 받아들이기 어려웠던 것은 뭔가요.

A. 결국 타이완 문제였습니다. 중국은 협상 초반부터 '하나의 중국' 원칙을 수용하라고 압박했습니다. 우리는 다른 나라와 한국은 다르다고 맞섰습니다. 한국의 독립 과정이라든지, 임시정부, 건국 과정에서 타이완 정부로부터 받은 도움을 쉽게 저버릴 수 없다고 했습니다. 이에 중국은 한국이 아직 수교에 대한 준비가 안 된 것 같으니 준비가 되면 다시 만나자고 했습니다. 중국은 또 한국에 있는 타이완의 자산, 서울 명동에 있던 대사관 부지 등의 중국 환수도 요구했습니다. 여러 차례 결렬 위기까지 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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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병현 전 대사 인터뷰는 한·중 수교 30주년 기념일을 앞두고 화상으로 진행됐다.

Q.

교착 상태를 어떻게 해결했나요.

A. 마오타이주(酒)가 큰 역할을 했습니다. 중국은 타이완 문제에 대해 명쾌한 대답을 내놓기 전에는 다른 문제는 꺼내지도 말라는 입장이었습니다. 앞서 협상에 들어가기 전에 키신저 전 미 국무장관의 회고록을 읽었습니다. 회고록에 보면 미국도 중국과 협상이 잘 안 돼 마오타이주 오십 몇 잔을 마시면서 타결했다는 구절이 나옵니다. 우리도 이런 방식이 가능하지 않을까 싶었습니다. 외교부에 마오타이주를 보내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다음날 중국 수교 책임자들이 다 나와 함께 만찬을 했습니다. 마오타이주를 마시며 마음을 열기 시작했고 서로 수교에 대한 진정성이 있다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이후 협상은 상당히 순조롭게 진행됐습니다. 동양식 사교 방식으로 서로 마음을 열기 시작했다고나 할까요.

Q.

결과적으로 놓고 보면, 한반도 평화 통일은 아직 이뤄지지 않았고 중국은 여전히 북한과 강한 공조 관계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한국이 '하나의 중국'을 인정한 반대급부가 크지 않다는 지적이 나올 수도 있을 것 같은데요.

A. 앞에서 언급했듯이 북한은 '교차 수교'를 바라고 있었습니다. 실제 김일성은 2~3년 안에 그렇게 될 것이라 믿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미국과 일본이 북한과 수교를 하지 않았는데도 한국은 중국과 수교했습니다. 남북 관계에 큰 변곡점이라 할 수 있습니다. 또 수교 이후 중국도 발전했지만 우리도 교역량이 증대하고 경제가 발전하면서 선진국 반열에 올랐습니다. 한·중 수교와 무관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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