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은 우리와 똑같은 이웃이다.
9일 방송된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이하 '꼬꼬무')에서는 '1980 불량배 소탕 작전'이라는 부제로 43년 전 그날을 조명했다.
1980년 여름 서울, 18살 승호와 24살 이수 씨, 그리고 23세 일영 씨는 제각각의 이유로 어딘가로 끌려갔다. 누군가와 시비가 붙었다거나 사람들이 있는 곳에서 침을 뱉었다거나 팔에 문신이 있다는 것이 바로 그 이유였다.
그들이 끌려 온 곳은 산속의 이중 삼중 철조망으로 둘러싸인 군부대. 빨간 모자를 쓴 교관들은 그들이 도착하자마자 몽둥이 세례를 퍼부었다. 그리고 어디선가에서는 공포탄 소리까지 들렸다. 도망가면 사살한다는 이야기와 함께.
손주 볼 어르신부터 앳된 아이들, 거기에 여성들까지 이들이 끌려온 곳은 바로 삼청교육대였다. 말도 안 되는 이유로 불량배라 간주된 이들은 이곳에서 4주간의 교화 훈련을 받았다.
특히 23세 일영 씨는 10대 때는 선감학원, 20대 때는 삼청교육대에서 한 번도 겪지 못할 시간을 두 번이나 겪어야 했다. 가족과 함께 살던 초등학교 6학년 시절 친척집에 가던 길에 옷이 허름하다는 이유로 부랑아 교화시설 선감학원에 수용된 일영 씨.
선감학원은 아이들을 밤낮없이 구타하고 죽은 아이들을 암매장해 소년판 삼청 교육대로 불리던 곳이었다. 그곳에서 3년의 시간을 보낸 일영 씨는 어느 날 벽에 걸린 액자를 보고 얼어붙었다.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하지 말라
설움의 날을 참고 견뎌 나가노라면 곧 기쁨의 날이 오리니
현재는 언제나 슬픈 것 마음은 미래에 살고 모든 것은 순간이다
그리고 지나간 것은 곧 그리워하느니라
액자에 적힌 푸시킨의 삶이라는 시는 일영 씨가 버티는 힘이 되었다. 그는 지옥 같은 곳에서 자신에게 희망과 힘이 되어줄 삶이라는 시를 새기기 위해 팔에 연탄으로 삶이라는 글자를 새겼다. 힘들 때마다 그것을 보고 버텼고 직접 희망을 찾아 선감학원을 탈출해 가족의 품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불과 5년 만에 다시 삼청교육대로 돌아온 일영 씨. 그가 끌려온 이유는 바로 자신을 버티게 해 준 삶이라는 문신 때문이었다. 그것 때문에 지옥을 버텨냈는데 그것 때문에 또다시 지옥으로 끌려간 것.
당시 삼청교육대에 수용된 인원은 무려 4만 명. 그중 무전과가 40%에 달했다. 이들은 매일매일 유격훈련부터 목봉 체조 등 혹독한 훈련을 견뎌야 했고, 인간 이하의 취급을 받아야만 했다.
식사 시간에는 복명복창 후 10초 만에 먹도록 했는데 이들에게 지급되는 양은 극히 적은 양이었다. 이는 바로 자신들의 말에 복종하고 반항하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반항하는 이들은 굶기기까지 했는데 굶주림에 사정을 하면 짬통 앞으로 데려갔다. 짬통은 교관들이 먹다 남긴 잔반들을 모아둔 통으로 구더기가 바글댔다. 하지만 교육생들은 배고픔 앞에 이것 또한 견디고 먹을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었다.
이렇게 인간답지 못한 대우를 받으며 그곳에서 갖가지 이유로 사망자도 발생했는데 공식적으로 확인된 인원만 54명에 달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돌아온 후에는 후유증이 생기거나 삼청교육대 출신이라는 낙인이 찍혀 일상으로 돌아갈 수 없는 이들이 대부분이었다. 야구장에서 줄을 서 있다가 침을 뱉었다는 이유로 삼청교육대에 끌려간 이수 씨는 극심한 후유증으로 결국 요양원으로 보내졌다. 또한 18세 승호는 학교는 퇴학 처리되고 주변의 시선 때문에 방황하게 됐고 이를 보는 그의 어머니는 자식을 지키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괴로워하다 결국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일영 씨는 삼청교육대를 나오는 일 마저 힘들었다. 그는 삼청교육대에서 나오지 못하고 무려 6개월간 근로 봉사까지 해야 했다. 그리고 그는 다시 탈출을 감행했으나 발각되어 군사 재판에 회부됐다. 그러나 일영 씨는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본인은 죄가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재판 결과 징역 1년형을 받고 복역해야만 했다. 그의 믿음과 희망은 그렇게 꺾이고 말았던 것.
그가 출소 후 그가 가장 먼저 했던 일은 삶 문신을 지우는 일이었다. 그는 글씨를 지우기 위해 굵은소금으로 살이 찢어지도록 문질렀고 그 위에 세제 가루를 뿌렸다.
이후 어렵게 공장에 취직한 일영 씨. 하지만 경찰이 걸핏하면 찾아왔다. 경찰은 삼청교육대 정보를 전산화해 10년 가까이 수사에 활용했던 것이다.
삼청교육대의 끔찍한 일, 이는 모두 전두환이 지시한 것이었다. 12.12와 5.18을 거쳐 대통령을 꿈꾼 그는 명분이 필요했고 그 명분으로 정의사회 구현을 외쳤다. 전국의 불량배를 소탕하겠며 삼청교육대를 창설 했고 거짓과 연출에 가려진 실상 때문에 전두환은 민심을 얻었다.
그렇게 대통령이 된 전두환, 시간이 흘러 그가 물러난 뒤 5공화국 청문회가 열렸다. 여기에서 전두환은 삼청교육대와 관련해 "고질적인 상습 범죄에 대하여 예방적 차원에서 특별 교육을 통해 교정함으로써 민생안정을 도모하자는 것. 시행 과정에서 선의의 피해자가 없지 않았던 것으로 알고 있는 바 이는 매우 유감으로 생각한다"라고 끝까지 사과는 하지 않았다.
후유증으로 인한 사망자 397명, 정신장애 등 상이자 2,768명. 이것이 공식적으로 드러난 삼청교육대의 피해자 수치이다. 18세의 승호 씨는 아직도 수면제를 먹어야만 잠이 들었고, 야구를 좋아하던 24세 이수 씨는 형은 기억하지 못하지만 야구장에서 침을 뱉지 않았다는 것은 또렷이 기억했다.
삼청교육대의 일을 아이들에게만은 끝까지 비밀로 하고 싶었던 일영 씨. 그는 "당신은 죄인이 아니다"라는 아내의 말에 용기를 얻었고 그렇게 재심을 청구했다. 그리고 40여 년 만에 징역 1년 형을 받았던 것에 대한 무죄를 선고받았다.
이날 용기를 내서 카메라 앞에 선 이들은 세상 사람들의 오해를 풀기 위해 나섰다고 밝혔다. 그리고 이들은 우리와 똑같은 평범한 이웃이었음을 잊지 말아 달라고 부탁했다.
마지막으로 방송은 우리 모두 모르는 사이 그들에게 낙인을 찍지는 않았는지, 또 그들의 이야기를 가볍게 생각하지는 않았는지 반성하게 했다.
또한 진실 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 위원회에서 삼청교육대에 관한 피해를 접수 중이니 더 곪기 전에 새 살이 돋아날 수 있게 용기를 내고 더 많은 이들이 한 걸음 앞으로 나와 주기를 부탁해 눈길을 끌었다.
(SBS연예뉴스 김효정 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