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쉽 - 뉴스를 더 쉽게

[뉴스쉽] 대체로 평화로웠던 시대의 종언…'러시아의 침공'이 바꾼 세계


 결국 푸틴의 러시아군은 우크라이나를 전면적으로 침공했다. 수도 키예프 함락도 시간문제라는 관측이 나온다. (*이 기사는 25일(금) 저녁에 작성되었다. 상황이 시시각각 바뀌고 있어서 작성시점을 밝혀둔다.) 푸틴은 침공 전, 우크라이나에 대한 군사작전의 목표로 우크라이나의 비무장화(demilitarization), 그리고 탈 나치화(denazification)를 내걸었다. 

오프라인 본문 이미지 - SBS 뉴스

비무장화하겠다는 건 우크라이나가 자국만의 힘으로든 나토(NATO)의 지원을 받아서든 러시아에 군사적으로 저항하지 못하는 무력한 나라로 만들겠다는 뜻이다. 푸틴의 역사관에서, 독립국가로서 우크라이나의 주권은 인정되지 않는다.

 ‘탈(脫) 나치화’는 약간의 설명이 필요하다. 푸틴은 우크라이나의 반러 친서방 젤렌스키 정부를 ‘네오나치이자 서방의 간첩’이라고 선동해 왔다. 이 ‘나치 딱지 붙이기’는 노골적인 거짓말이다.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은 유태계다. 그의 할아버지 형제들 가운데 세 명이 2차대전 중 유태인 학살에 휩쓸려 목숨을 잃었다고 워싱턴포스트가 보도했다. 수도 키예프 북부 바비야르(Babi Yar)는 최악의 유태인 학살이 벌어졌던 장소 중 하나다.

그런데도 푸틴이 이런 주장을 하는 것은 러시아와 우크라이나가 2차대전 당시 나치 독일에게 입은 피해가 워낙 컸던 탓이다. 이런 거짓 선동을 믿는 사람들이 더러 있다는 것이다. 푸틴은 소련이 수백만의 인명피해를 감수하며 나치와 혈투를 벌이는 동안 서방은 수수방관했다고 생각하며, 2014년 우크라이나에서 친러 독재자가 민주화시위 끝에 쫓겨난 일도 친서방 네오나치에 의한 정권찬탈이라고 우기고 있다. 그래서 푸틴이 침공의 목적 중 하나로 ‘탈 나치화’를 내건 것은 심상치 않다. 우크라이나의 젤렌스키 정부를 무너뜨리고 친러시아 정부를 세우겠다는 시사로 읽히기 때문이다.

오프라인 본문 이미지 - SBS 뉴스

 한 국가가 다른 주권국가에 이런 식으로 정규군을 몰아서 쳐들어가는 전쟁은 20세기 후반 이후 보기 어려웠다. 2000년대 들어 미국이 이라크나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할 때는 종족 학살 또는 비인도적 행위 방지, 대량살상무기, 테러에 대한 응징 등을 명분으로 삼았다. 반면 러시아의 이번 우크라이나 침공은 ‘너네 땅 원래 우리 땅이니까’가 이유다. 

오프라인 본문 이미지 - SBS 뉴스

 그 결과, 미국과 러시아가 냉전 종식 후 30년 만에 다시 힘과 힘으로 맞붙는 국제정세가 되었다. 소련 붕괴 이후의 러시아는 시리아 내전 등을 통해 미국과 신경전을 벌여 왔지만 이번처럼 노골적으로 ‘덤빌 테면 덤벼 보든가’ 라는 식의 군사력 전개를 한 적은 없었다. 이 자체가 ‘미국의 약화와 서방의 균열’이라는 국제질서 변화의 산물인 동시에, 앞으로 더욱 큰 국제질서의 변화를 초래할 가능성이 크다. 게다가 지금은 30년 전과 달리 ‘강력한 중국’이라는 변수마저 있어서, 세계의 불안정성은 더욱 높아졌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이번 사태는, 20세기 전반기 두 차례의 참혹한 세계대전을 치르며 인류가 얻은 교훈이 잊혀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분쟁은 당사자끼리 폭력 쓰지 말고 다자기구에서 말로 해결하자는 다자주의(multilateralism)가 이제 효력을 다해가고 있는 것이다. 세계가 다시 대(大)전쟁의 시대로 퇴보할 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지구촌을 휘감고 있다.

오프라인 본문 이미지 - SBS 뉴스
목숨마저 위태로워진 대통령의 호소...'2차대전의 기억을 잊지 말라'

우크라이나의 젤렌스키 대통령은 이제 정권이 문제가 아니라 목숨마저 위태로운 상황이다. 스스로 화상연설을 통해 그렇게 말했다. 미국은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반러세력 제거를 위한 살생부를 만들었다는 첩보를 공개했다.

오프라인 본문 이미지 - SBS 뉴스
[캡처] 25일(금) SBS 8뉴스 보도

 러시아는 그 전에도 국내외 반 푸틴 지도자나 언론인 등의 암살에 나선 사례가 꽤 있다. 방사능물질을 넣은 녹차 등 방법도 다양하고 음험했다. 살생부 제일 위에 이름이 적혀있을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이 지난 19일 뮌헨안보회의에서 했던 연설이 있다. 당시 그는 더 이상 유화책으로는 러시아를 제어할 수 없다며 2차세계대전 발발의 역사를 상기시켰다.

오프라인 본문 이미지 - SBS 뉴스

 단치히 (폴란드 이름 그단스크)는 독일과 폴란드 사이의 주요 항구였다. 1차대전의 승전국들은 독일을 약화시키고 폴란드에게는 해상교통로를 열어주기 위해 단치히를 자유시로 독립시켰다. 나치 독일은 오스트리아, 체코슬로바키아를 별 전투 없이 병합한 데 이어 1939년엔 단치히를 침공했다. 독일계 주민이 다수인 지역이고 원래 독일의 땅이며 단치히 주민들이 독일의 지배를 원한다는 이유였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동부의 친러 분리독립 인민공화국에 군사력을 투입한 명분과 비슷하다. 당시 영국과 프랑스는 1차대전 전후질서를 정면으로 뒤집는 히틀러를 무력으로 응징해야 했지만 전쟁의 상흔과 세계경제 대공황의 여파로 시달릴 때여서 또다시 피를 보기가 싫었고, 주춤거리며 히틀러의 야욕을 눈감아줬다. 히틀러는 ‘떡 하나 주면 안 잡아먹지’ 해놓고 나중엔 떡 뿐 아니라 할머니를 통째로 잡아먹은 호랑이처럼 유럽 나라들을 차례차례 집어 삼켰다. 젤렌스키는 나토 회원국들에게 그 역사를 상기시키며 ‘(러시아의 공격을 받는 것이) 다음은 당신들 차례가 될 수 있다’고 경고한 것이다.

오프라인 본문 이미지 - SBS 뉴스
[사진] 나치독일 수중에 떨어진 단치히. 1939. 히틀러 군대가 이곳을 침공하면서 폴란드 침공으로, 2차세계대전으로 이어졌다. (사진: 미국 홀로코스트 박물관)
강대국이 앞장서서 국제사회 파괴... 퇴행적 민족주의의 위험

 “거긴 원래 우리 민족 땅이다.” 힘센 나라가 이런 소리를 하면 듣는 옆나라는 섬찟하다. 동아시아에서는 시진핑 중국 주석이 트럼프 당시 미국대통령과 회담하면서 이런 소리를 했다. “한국은 원래 중국의 일부였다.”

 생각만으로도 곤란하지만, 그런 식의 이유로 상대의 영토를 무력침범해선 안된다. 그게 또다른 세계대전의 참극을 막기위해 세계가 합심해서 만든 UN의 기본정신이기도 하다. UN헌장 2조는 다음과 같이 규정하고 있다.

[유엔헌장 제2조]
1항. 기구는 모든 회원국의 주권평등 원칙에 기초한다.
4항.  모든 회원국은 그 국제관계에 있어서 다른 국가의 영토 보전이나 정치적 독립에 대하여 또는 국제연합의 목적과 양립하지 않는 어떠한 기타 방식으로도 무력 위협이나 무력 행사를 삼간다.

 이번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은 유엔의 가장 중요한 회원국 중 하나가 유엔 헌장을 정면으로 위반한 사건이다.

 잘 사는 나라들이 입으로는 러시아를 비난하면서 뒤로는 자신들에게 미칠 피해를 계산하느라 바빴던 지난 21일, 인류의 양심을 대변해 러시아를 준엄하게 꾸짖는 발언이 아프리카 케냐의 유엔대사로부터 나왔다. 마틴 키마니 UN주재 케냐 대사는 UN안전보장이사회에서 아래와 같은 연설을 했다. 케냐가 이번 사태에 중요한 영향력을 행사할 나라는 아닐지라도, 국제사회의 미래에 매우 의미있는 내용을 담고 있어서 요지를 소개한다. 

오프라인 본문 이미지 - SBS 뉴스
1) 아프리카 국가들은 제국의 종말과 함께 탄생했다. 우리의 국경은 우리가 직접 그린 것이 아니며, 저 멀리 제국의 수도에서 원래의 나라들과 무관하게 그어졌다.

2) 아프리카 각국이 독립 당시 민족 · 인종 · 종교적 동질성에 기반해 나라를 만들려 했더라면, 수십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피의 전쟁을 계속하고 있을 것이다. 대신 우리는 주어진 국경에 맞추어 살기로 동의했다. 미래를 향해 아프리카 대륙 차원의 정치적 경제적 법률적 통합을 추구해 나갈 것이다. 위험한 향수(노스탤지어)를 갖고 과거만 돌아보는 대신, 우리는 미처 알지 못했던 위대함을 향해 앞을 내다보기로 했다.

3) 제국이 붕괴되면서 형성된 모든 국가에는 국경 넘어 다른 나라에 사는 동포들과 합쳐 살아가기를 바라는 이들이 있다. 그러나 그러한 갈망을 무력으로 추구하는 것에 반대한다. 어떤 이유로든 실지회복주의(‘잃어버린 땅을 되찾자’)나 팽창주의를 추구하는 것을 거부한다.

4)  그러므로, 우크라이나의 국경과 영토 보전이 지켜져야 한다. 국제사회가 도네츠크와 루한스크의 친러 인민공화국을 승인해서는 안된다. (안보리 뿐 아니라) UN 회원국 모두가 단결해 다자주의(multilateralism)를 회복해야 한다.

 러시아는 유엔 안보리의 의사결정에 거부권을 가진, 5대 상임이사국 가운데 하나다. 유엔 안보리 차원의 러시아 제재는 불가능하다. 대신 총회를 통해서 유엔 전체회원국이 러시아에 압력을 가할 수는 있다. 러시아의 거부권은 총회에는 적용되지 않기 때문이다. 미국의 대표적인 외교전략가 중 한 명인 리처드 하스 미국외교협회(CFR) 회장이 최근 뉴욕타임스 기고에서 지적한 게 이 점이다. 어떤 나라가 광범위한 비인도적 행위를 자행하면 유엔은 총회 결의로도 군사개입까지 나설 수 있다. (상대가 러시아 같은 강대국이었던 적은 없지만, 일단 이론적으로는 가능성은 열려 있다.)

군사적 충돌 외에 러시아를 막을 방법은? 미국 외교전략가의 제언
오프라인 본문 이미지 - SBS 뉴스

리처드 하스가 제안하는 해법은, 시간이 걸리더라도 러시아가 치러야 할 대가의 총합을 늘려야 한다는 것이다. 푸틴은 침공에 대한 서방의 제재, 우크라이나의 저항 등 비용을 따져보고 실보다 득이 많다고 계산해 침공을 결행한 것인데, 예상 밖으로 손실이 더 커지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 방법으로는 우크라이나가 보다 오래 항전할 수 있도록 돕는 정보, 군수 등 지원 강화, 그리고 러시아 서쪽 나토회원국들에 대한 군사지원 강화를 언급했다. 아래 지도에 강조 표시된 국가들은 독일 통일 이후 나토의 회원국이 된 동유럽 국가들이다. 이 나라들에서 서방의 군사력을 철수하라는 게 이번 침공 전 러시아의 요구였다. 이 나라들에 서방의 군사력을 오히려 증강배치함으로서 이번과 같은 러시아의 군사행동을 예방하고, 러시아가 군사력을 전선에 대거 유지하도록 함으로써 러시아의 체제에 부담을 주자는 것이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이 장기적 소탐대실로 끝나도록 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오프라인 본문 이미지 - SBS 뉴스
(그래픽) 러시아가 안보우려 해소를 위해 나토(NATO) 군사력 철수를 요구하는 나라들. 역으로 이 나라들에 나토 군사력을 증강배치해서 러시아 체제가 받는 스트레스를 늘려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군비의 증강은 러시아와 직접 맞닿은 동유럽 국가들만의 일로 끝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그동안 서부와 남부 유럽 대부분의 국가들은 국방을 사실상 미국에 외주주다시피하고 남은 국력으로 평화를 구가해 왔는데, 그런 시대는 이제 끝나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중부유럽 최강 국력을 지닌 독일까지 다시 무장을 강화해야 하는 상황은 가까운 미래에 오지는 않겠지만 매우 주의해야 한다. 서양의 역사에서 지나치게 강한 독일군의 등장은 늘 뒤끝이 좋지 않았다.

중국의 우크라이나 딜레마

 리처드 하스는 뉴욕타임스 기고문에서, 러시아와 중국 사이를 떼어놓아야 한다고 지적했다. 미국에 대항해 각자의 세력권을 강화하려 한다는 점에서 러시아와 중국은 동지다. 그러나 공산화 이후의 현대사만 떼어놓고 봐도, 러시아와 중국은 그리 좋은 이웃이 못 된다. 미국은 냉전시대에도 전격적인 미중수교를 통해 중국과 소련을 갈라놓음으로써 소련과의 체제 경쟁에서 유리한 구도를 만들었던 경험이 있다. (지금의 미국이 그때의 미국과 같은 나라인지는 별개의 문제다.)

오프라인 본문 이미지 - SBS 뉴스
(베이징 AFP/스푸트니크=연합뉴스) 2월4일 베이징. 동계올림픽 개막을 앞두고 정상회담을 갖는 푸틴과 시진핑. 밀월이라고 하기에는 우크라이나를 보는 두 정상의 속내가 복잡하다.

 하스가 러-중 이간책을 말하는 건, 실제로 중국이 노골적으로 러시아를 편들고 나설 처지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미 서방과 갈등을 겪느라 상당한 국력을 쓰고 있는 중국으로선 공개적으로 러시아를 응원해서 얻을 실익이 별로 없다. 또, 중국은 미국에 대항하는 새로운 질서를 만들기 위해 ‘일대일로’ 프로젝트를 추진해 왔다 중국 서부에서 중앙아시아, 동유럽을 잇는 거대한 인프라 프로젝트다. 우크라이나는 중국 일대일로의 유럽쪽 관문이었다. 우크라이나 뿐 아니라 카자흐스탄, 조지아 등 중국이 눈독들이던 나라들에 러시아의 통제력이 강화되는 건 중국에겐 그리 반가운 일이 아니다. 

신장-위구르 자치구 문제가 연상된다는 점도 중국에겐 부담이다. 우크라이나 동부 도네츠크-루한스크 지역에 러시아계 주민이 많이 사니 분리독립하겠다는 주장을 인정하면, 신장-위구르가 중국에서 독립하겠다는 주장도 인정해야 한다. 그런 고민이 반영된 게 시진핑의 외교책임자 왕이 외교부장의 최근 연설이다. 

오프라인 본문 이미지 - SBS 뉴스

 다만 러시아가 서방의 압력에 굴복하는 건 중국에게 이익이 되는 구도가 아니므로, 중국은 러시아가 서방의 제재 때문에 고사하지 않도록 막후에서 조용히 도움을 줄 것으로 보인다. 이란이 석유수출 금지 등 강한 제재를 받을 때 이란 석유의 주요 구매자가 돼 준 것이 중국이다. 

실제로 러시아와 중국은 최근, 새로운 파이프라인을 통해 중국에 천연가스를 공급하는 30년 계약에 동의했다. 새로운 가스 판매는 달러가 아니라 유로로 결제한다. 이 계약은 지난 2월4일 동계올림픽 개회식 참석차 베이징을 찾은 푸틴과 시진핑의 정상회담을 통해 알려졌다.

문제는 에너지 의존... 난처한 서방국가들

 그래서, 하스의 대 러시아 전략 제언 중 가장 효과가 클 것이지만 가장 까다로운 부분은, 러시아가 에너지 수출로 벌어들이는 돈을 줄여야 한다는 것이다. 이 문제는 서방의 대 러시아 제재에 있어서 최대의 난점이다. 러시아는 미국, 카타르 등과 함께 LNG(액화천연가스)의 세계 최대 수출국 중 하나다. 지리적으로 인접한 유럽 국가들이 1차 주요 고객이다. 유럽국가들의 러시아 천연가스 의존도를 보면 독일과 이탈리아는 천연가스 수입량의 거의 절반을 러시아에 의존하고 있고, 러시아군을 막는 중요한 방패 역할을 하는 폴란드의 경우도 의존도가 40%에 이른다. 

오프라인 본문 이미지 - SBS 뉴스

 이러니, 나토 회원국들은 러시아의 석유-천연가스 수출을 막아서 푸틴의 침략자금줄을 조이는 건 엄두를 못 낸다. 오히려, 러시아가 에너지 수출을 줄일까 봐 걱정이다. 서방은 추가제재에서도 러시아의 에너지 수출을 건드리지 못했다. 독일이 노르트 스트림(Nord stream) 2 가스관 사업을 ‘중단(halt)’시켰지만, 2는 아직 개통되지 않은 파이프라인이다. 2를 통해 서방으로 수출되는 가스는 아직 없다. 같은 규모로 2012년 이미 완공된 노르트 스트림 1 가스관은 지금도 러시아산 천연가스를 서방 각국으로 공급하고 있다. 

오프라인 본문 이미지 - SBS 뉴스

 이런 사정을 잘 아는 하스는 그래서, 러시아 천연가스나 석유의 수출을 막자는 게 아니라 ‘가격을 떨어뜨려야 한다’고 제언한 것으로 보인다. 국제유가가 높으면 세계 최상위권 에너지 수출국인 러시아가 벌어들일 수 있는 이익이 그만큼 커진다. 국제유가를 떨어뜨리면 러시아의 팽창-침략행위에 타격을 줄 수 있다. 이번보다 약한 제재가 실시됐던 2014년 러시아의 크림반도 병합 당시 러시아는 화폐(루블화) 가치가 절반으로 추락하고 금리가 17%까지 치솟는 등 심각한 경제 충격을 경험했는데, 당시에는 여러 요인이 결합해 국제유가가 급락했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러시아는 크림반도에서 물러나지 않았다.)

오프라인 본문 이미지 - SBS 뉴스
[사진] 급등한 전기 가스요금 고지서를 들고 항의시위에 나선 터키 수도 앙카라 시민들. 2월9일. (로이터-연합)

2022년의 사정은 좀 다르다. 먼저 천연가스의 경우, 에너지경제연구원에 따르면 전 세계 LNG 생산시설 가동률이 88%에 달해 추가 생산 여력은 거의 남아 있지 않다. 유럽 내 LNG 재고량은 20년 만에 최저치로 떨어졌다. 세계2위 LNG 수출국인 카타르는 당장 대폭 증산이나 수출대상국 변경이 어렵다는 입장이다. 미국이 셰일가스를 대폭 증산하면 어느 정도 공백을 메울 수 있을 것이지만, 미국내 셰일 산업은 그동안 환경규제, 재생에너지 드라이브, 코로나19에 따른 노동력 감소 등으로 취약해져 당장 대폭 증산은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미국은 우방국들에게 올해 LNG 수입하기로 한 물량의 일부를 유럽에게 양보해 줄 것을 요청하고 있다. 일본은 응했고, 한국은 곤란하다고 했다.

LNG 대신 석유를 찾는 나라가 늘어나니 국제유가도 치솟는다. 현재 배럴당 100불에 육박하는 유가는 올해중 150달러를 넘어갈 수 있다는 비관적 전망도 나온다. 세계 최대 석유 수출국인 사우디아라비아 등 석유수출국기구(OPEC) 국가들은 국제유가를 끌어내릴 증산 요청에 뜨뜻미지근한 반응이다. 트럼프 미국대통령 시절까지만 해도 사우디는 미국에 협조하는 차원에서 종종 원유공급을 늘려 국제유가를 끌어내렸지만, 바이든 행정부와 사우디의 지배자 빈 살만 왕세자는 그리 좋은 사이가 아니다. 2018년 10월 터키에서 사우디의 반체제 언론인 자말 카슈끄지가 살해된 사건이 계기가 됐다. 

오프라인 본문 이미지 - SBS 뉴스

당시 미 정보당국은 카슈끄지 살해의 배후로 빈 살만 왕세자를 지목했다. 트럼프 당시 대통령은 국제사회가 비난하거나 말거나 빈 살만 왕세자를 감싸고 사우디 왕가와 밀월을 지속했다. 명목상 인권의 가치를 내세우는 바이든 대통령은 빈 살만 왕세자를 살인자 취급하며 냉대했다. 미국이 중동지역 국가간 세력다툼에서 사우디의 편을 드는 일도 바이든 정부 들어 중단됐다. 바이든 행정부는 사우디에 대한 무기판매를 중단했고, 이란과의 핵협상도 재개했다. 이란은 이슬람의 교파도 다른데다 페르시아만 일대에서 영향력을 다투는 사우디의 주적이어서, 이란에게 숨통을 터 주는 협상을 지켜보는 사우디의 시선은 곱지 않았다.

오프라인 본문 이미지 - SBS 뉴스

바이든 미국대통령은 치솟는 기름값과 그로 인한 물가인상 때문에 민심이 악화돼 중간선거를 참패할 판이다. 이렇게 될 것이 눈에 보이던 지난해 가을부터 빈 살만의 마음을 사기 위해 공을 들였다. 상당한 '매력 공세'를 벌이고서야 지난 연말 일부 증산을 끌어낼 수 있었다. 빈 살만은 웃었을 것이다. 이제 사우디의 힘을 알겠느냐고. 더 많은 석유를 원한다면 사우디의 절대자인 자신을 달리 대접해야 할 것이라고. 

"우리 도움이 필요해?"...배짱 부리는 권위주의 국가들

 이와 비슷한 현상은 다른 지역으로도 확대될 것이다. 예를 들어 유럽에서 러시아의 서진을 막는 보루 역할을 하는 나라는 구 공산권인 헝가리와 폴란드다. 이들 국가의 국민들은 역사적 경험떄문에 반러 성향이 강한 편인데, 집권세력은 민주주의 절차를 악용해 권위주의로 퇴행하는 양상을 보이고 있으며, 민족감정을 이용하는 포퓰리스트 성향도 보인다. 러시아의 지중해 진출을 억제하는 데에 중요한 나라 터키에서도 같은 일이 벌어지고 있다. 예전 같으면 미국이나 서유럽 국가들이 자유민주주의 가치를 내세우며 말리기라도 했겠지만, 이제 이들은 러시아를 막아주거나 친러진영으로 넘어가지 않는 것을 대가로 체제 불간섭을 요구할 것이다. 

오프라인 본문 이미지 - SBS 뉴스

 민족주의 포퓰리즘 성향의 독재국가가 늘어난다는 것은 바람직한 변화가 아니다. 이런 나라들에서는 지도자가 민족 갈등을 조장함으로써 자신의 권력을 강화할 수 있고, 그 과정에서 상대적으로 쉽게 전쟁을 결정할 수 있으며, 국내 반대여론이 이를 막기도 어렵다. 자유민주주의의 퇴조가 전쟁위험 증가로 이어지는 것이다.

험난해지는 세계...동맹의 중요성 커진다

 힘 없이 말로만 평화를 지킬 수 없다는 게 분명해진 세상에서, 나라를 지키려면 동맹이 필수다. 우크라이나가 러시아군에게 유린당하는 반면 우크라이나보다 작은 발트3국이 침공을 면한 건 발트3국이 군사동맹 나토의 회원국이기 때문이다. 우크라이나도 그걸 아니까 나토 가입을 추진했던 거다. 나토에 가까이 가지 않았더라면 푸틴이 우크라이나를 그냥 놓아뒀을까? 푸틴 집권 20년을 살펴보면 그렇게 말할 수 없다. 스스로 러시아의 괴뢰국가가 되는 치욕을 받아들이지 않는 한, 우크라이나는 러시아군의 침략을 피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우크라이나의 비극이다.

오프라인 본문 이미지 - SBS 뉴스
AK소총을 들고 수도 키예프 거리에서 인터뷰하는 포로셴코 전 우크라이나 대통령. 2019년 우크라이나 정교회를 러시아에서 분리하는 등 반러시아 정책을 추진했다. (CNN 캡처, 한국시간 25일 밤)

대한민국은 한미동맹을 갖고 있다. 위기상황에서 동맹이 완전한 효과를 내려면 평소에 서로가 관리를 잘 해야 한다. 동맹의 기본 정신은 서로의 이익을 위해, 또는 서로의 부담을 덜어주기 위해 같은 행동을 하는 것이다. ‘너는 나를 위해 피를 흘려야 마땅하고 나는 너의 단물만 빨겠다’는 식으로 유지되는 동맹은 없다. 개인간의 관계나 나라간의 관계나 마찬가지다.

[구성 : 이현식 선임기자(D콘텐츠 제작위원), 장선이 기자 / 디자이너 : 명하은 이현영]

Copyright Ⓒ SBS.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및 AI학습 이용 금지
오프라인 광고 영역
댓글
댓글 표시하기
뉴스쉽 - 뉴스를 더 쉽게
기사 표시하기
러시아, 우크라이나 침공
기사 표시하기
이 시각 인기기사
기사 표시하기
많이 본 뉴스
기사 표시하기
SBS NEWS 모바일
오프라인 광고 영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