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앵커>
내일(28일)은 일본군 위안부로 끌려갔던 아픔을 딛고 평화와 인권운동에 앞장섰던 고 김복동 할머니가 세상을 떠난 지 1년 되는 날입니다.
할머니는 우리 사회를 어떻게 바꾸었고 또 지금 남은 숙제는 무엇인지 김형래 기자가 짚어봅니다.
<기자>
[김복동/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지난 1992년) : 일본에 가면 군복 만드는 공장이라 그러대, 공장에. 16살에 들어갔다가 한국에 오니까 23살이래, 23살.]
[김복동/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지난 2011년 1000번째 수요집회) : 이 늙은이들이 다 죽기 전에 하루빨리 사죄하라고. 알겠는가, (일본) 대사?]
김복동 할머니가 생전에 머물던 쉼터에는 여전히 고인의 흔적이 가득합니다.
'앞장서 목소리를 내줬던 사람' 남은 할머니들은 고인을 그렇게 그리워합니다.
[이옥선/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 같은 데 갔다 온 사람이니까 같이 생각하지. 딴 사람으로 생각 안 하지. 말하는 사람들이 자꾸 돌아가니까, 우리는 좋지 않지 마음이….]
1992년 일본군의 만행을 고발하며 세상을 향해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 할머니는 노년의 삶을 평화 인권 운동에 바쳤습니다.
함께 활동했던 이들에게는 몸을 사리지 않는 투사였고 2015년에는 국제 언론단체가 뽑은 '자유를 위해 싸우는 영웅'에도 선정됐습니다.
[손영미/'평화의 우리 집' 소장 : '나는 희망을 잡고 살아, 나를 따라라', 평생 못 잊을 것 같아요, 그 말씀….]
전쟁 성폭력 피해를 입은 여성들을 돕는 '나비기금'과 '김복동 장학금'도 할머니가 세상에 남긴 유산입니다.
나흘 전 또 한 분이 돌아가시면서 일본군 '위안부' 피해 생존자는 이제 19분 만이 남았습니다.
[윤미향/정의기억연대 이사장 : 보여줬으면 좋겠어요, 김복동 할머니가 '죽었지만 죽은 게 아니다'라는 것, 가해자에게 '일본군 성 노예 피해를 올바르게 해결하라'라는 목소리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를 넘어 평화 인권 운동의 상징으로 남은 김복동.
할머니의 뜻을 이어가는 건 우리의 숙제로 남았습니다.
(영상취재 : 박현철, 영상편집 : 원형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