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파일] 美, 환경오염·소음피해 배상 '0건'…근거 살펴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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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뜩이나 미국의 '방위비 분담 증액' 요구 등으로 한미동맹을 둘러싼 우려가 많은 요즘입니다. 이번에는 방위비 문제보다 규모가 작긴 하지만 결코 간과해선 안 될 손해배상 청구권 문제에 대해 살펴보고자 합니다. 본격 거론에 앞서, 하나의 사례를 먼저 가정해보려 합니다. 주한미군 기지 인근에 사는 주민 A씨가 있습니다. A씨는 주한미군의 비행훈련 소음에 수년 간 노출돼 난청에 시달렸습니다. 만약 A씨가 손해배상을 청구해 100만 원의 배상금을 받게 된다면, 그 중 미국이 내야할 금액은 얼마나 될까요.

이론적으로는 75만 원이 정답입니다. 주한미군 지위협정, 소파(SOFA) 제23조 제5항은 주한미군의 전적인 과실로 피해가 발생하면 미국 정부가 75%, 한국 정부가 25%를 부담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한·미 양측의 과실이 인정된다면 절반씩 책임져야 합니다.) 물론 이 자체만으로 부당하게 느껴질 수 있겠지만, 이는 미·일 소파, 미·독 소파에도 동일하게 규정된 내용입니다. 말하자면 미국이 이미 오래 전 일본, 독일과 소파 협상을 했을 때부터 이 조항을 관철시켰던 거죠. (미·일 소파 제18조 제5항, 미·독 소파 제41조 제1항에 동일한 내용이 포함돼있습니다.) 어쨌든 절차적으로 A씨는 한국 정부로부터 배상금 100만 원을 받게 됩니다. 그 이후에 미국이 책임져야 할 75%, 75만 원을 받아내는 건 한국 정부의 몫으로 남습니다.

● '75% 책임' 방기한 美…환경오염·소음피해 배상 '0건'

현실은 어떨까요? 일단 매향리 사격장, 오산비행장, 군산비행장, 평택 K-55 비행장 등 소음피해는 물론 녹사평역, 캠프킴 기지, 캠프험프리 기지, 캠프롱 기지 등 유류오염 피해까지 'A씨'의 실제 사례는 많습니다. 한국 정부는 사례들이 발생할 때마다 배상금을 전액 지급해왔습니다. 그러나 미국 정부는 소음피해, 환경오염 피해의 배상금을 한국 정부에 지금껏 단 한 번도 내지 않았습니다.

더불어민주당 박병석 의원실을 통해 받은 법무부와 외교부 자료를 보면, 2011년부터 올해 8월까지 9년간 주한미군의 잘못으로 발생한 손해배상 건수는 소음 피해 42건, 환경오염 피해 16건입니다. 이들 피해에 대한 배상금 지급 총액은 약 666억 9천만 원입니다. 여기엔 미국 몫인 75%, 약 500억 2천만 원이 포함돼 있지만, 미국은 아직 한 푼도 지급하지 않았습니다.

● 공식 협의만 32차례…美 '위법한 사용'도 면책 대상?

물론 한국 정부가 아예 손 놓고 있는 건 아닙니다. 이 문제를 다루는 분과위원회는 한·미 소파 민사청구권 분과위원회인데, 회의는 2004년 4월과 5월, 12월, 그리고 2009년 6월까지 총 4차례 열렸습니다. 한·미 양측간 실무자 간담회는 2000년 3월부터 올해 6월까지 총 28번 진행됐습니다. 한국 당국자들은 지난 2000년부터 32차례 공식 테이블에서 미국 당국자들과 마주앉았고, 계기마다 미국측 몫인 75% 배상금을 달라고 요구한 겁니다.

그럼 미국의 반응은 어땠을까요. 미국은 지금까지도 배상 책임이 없다며 모르쇠로 일관하고 있습니다. 미국이 근거로 내세우는 조항도 과거와 같습니다.

"대한민국 정부는, 이러한 시설과 구역에 대한 합중국 정부의 사용을 보장하고, 또한 합중국 정부 및 그 기관과 직원이 이러한 사용과 관련하여 제기할 수 있는 제3자의 청구권으로부터 해를 받지 아니하도록 한다. " <소파 제5조 제2항의 일부>

이 조항은 말하자면, 주한미군이 국내 시설·구역을 쓸 때 민간인인 제3자가 소송을 걸지 않도록 한국 정부가 조치해야 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좀 이상하지 않습니까. 이 조항 어디에도 주한미군이 국내 시설·구역을 '위법하게 사용해 문제가 발생하더라도' 라는 전제 조건은 적혀있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미국은 이 조항을 근거로 '주한미군이 소음피해, 환경오염 피해를 유발시킨 데 대한 배상금을 지급할 책임이 없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국방 분야 법률 전문가는 "소파 제5조 제2항은 조문 체계상 청구권 조항의 항변 조항으로 내세울 수 있는 게 아니"라며 "법률 체계에 익숙치 않은 이의 항변이거나, 알면서도 우격다짐식으로 주장하는 걸로 밖에 볼 수 없다"고 했습니다.

대법원 판단도 같았습니다. 대법원은 지난 2009년 12월 10일 해당 조항이 '시설과 구역의 적법한 사용으로 인한 보상금 청구로부터 면책된다는 것이지, 위법한 행위로 발생한 손해배상청구 경우까지 면책된다는 취지는 아니'라는 판결을 내렸습니다. 정부도 이같은 대법원 판례 (2009다72384)를 근거로 미국 측에 분담금 지급 의무가 있음을 강조하고 있는데, 양측의 입장차가 좁혀질 기미는 전혀 보이지 않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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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미 국기, 주한미군

● '방위비 증액' 압박하는 美…청구권 문제도 간과 말아야

청구권 문제는 방위비 문제보다 규모가 작긴 하지만 결코 간과해선 안 될 문제입니다. 동맹국이 위법 행위와 그로 인한 손해 배상 책임을 인정하지 않는 한, 같은 문제가 확대·재생산될 게 불 보듯 뻔하기 때문입니다. 박병석 의원은 "정부는 우리의 사법주권을 지키고, 주한미군의 손해배상 책임을 강화하기 위한 근본적인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고 제언했습니다. 법무부는 "미군을 지속적으로 설득하고, 관련 부서와도 긴밀히 협력해 문제 해결을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이라고 답했습니다. 정부가 보다 적극적으로 근본 대책을 모색해 실제 성과로 이어질 수 있기를 기대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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