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북 영동에서 2만여㎡의 복숭아 농사를 짓는 안모(55)씨는 요즘 밭에 들어설 때마다 한숨이 앞선다.
황도 계통인 '재황'과 '중생 엘바트' 수확이 시작됐지만, 개화기였던 지난 4월 냉해에 이어 최악의 폭염이 겹치면서 덜 익은 열매가 우수수 떨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가까스로 나뭇가지에 매달린 복숭아도 가뭄과 찜통더위 속에 제대로 자리지 못해 값나가는 대과(大果)는 눈을 씻고도 찾아볼 수 없다.
10년 넘게 한 우물을 판 그는 인근에서 '복숭아 박사'로 불릴 정도로 이름난 농사꾼이다.
농협의 생산자 단체도 이끌고 있다.
그러나 롤러코스터를 타는 올해 날씨는 베테랑인 그조차 혀를 내두르게 한다.
지난 1월 영하 15도를 밑도는 초강력 한파가 장기간 이어지면서 50여 그루의 복숭아나무가 동해(凍害)를 입은 상태에서 개화기인 4월 7∼8일에는 영하의 기습한파가 몰아닥쳐 꽃이 얼어붙는 등 수정 장애가 발생했다.
이후 짧은 장마를 거친 뒤 비 한 방울 없는 메마른 환경 속에 35도를 넘나드는 가마솥더위가 이어지고 있다.
그의 밭은 다행히 물을 대는 관수시설이 잘 돼 있어 가뭄 걱정은 덜한 편이다.
그러나 가마솥 폭염 속에 나무들이 제대로 숨을 쉬지 못하면서 낙과가 이어지고 있다.
이 지역에는 지난달 11일 내려진 폭염주의보가 이튿날 경보로 강화된 뒤 34일째 폭염특보가 발령돼 있다.
밤사이 최저기온이 25도를 웃도는 열대야 현상도 추풍령 기상관측소 기준 5일이나 나타났다.
장선화 영동군 농업기술센터 지도사는 "식물의 경우 낮에 광합성으로 모은 에너지를 밤이 되면 영양분(포도당)으로 바꾸는 데, 폭염과 열대야가 반복되면서 이런 과정이 사라진 대신 호흡하는 데 모든 에너지를 쓰고 있다"고 설명했다.
나무가 영양분을 제대로 축적하지 못하다 보니 열매가 떨어지거나 매달려 있더라도 성장이 멎는 현상이 나타난다는 말이다.
안씨는 매년 7월부터 두 달간 4.5㎏들이 복숭아 1만 상자가량을 출하한다.
올해도 이에 맞춰 복숭아 상자 1만개를 미리 준비했지만, 물량이 급감하면서 절반이나 채울 수 있을지 걱정이다.
그는 "낙과량이 워낙 많아 일일이 주워내기도 힘든 상황"이라며 "남은 것들도 굵기가 잘아 상자 수 기준 출하량은 작년의 절반 정도에 그칠 전망"이라고 내다봤다.
노지 출하가 시작된 캠벨얼리 포도도 알이 굵어지기 전 성장이 멎거나 포도 고유의 보랏빛 대신 붉은빛이 감도는 열매가 많다.
폭염 때문에 착색이 불량해 생긴 현상이다.
비닐을 덧씌워 비가림 시설을 해놓은 밭에서는 일소(日燒·햇볕 데임) 피해까지 나타나고 있다.
1만㎡의 포도농사를 짓는 박모(78·옥천군 옥천읍)씨는 "햇볕이 너무 강해 포도 잎이 돌돌 말리면서 누렇게 타들어 가고 심지어 포도 알까지 화상을 입어 말라비틀어지고 있다"며 "30년 넘게 포도농사를 지었지만, 올해 같은 경우는 처음"이라고 탄식했다.
그는 이어 "알 굵은 포도는 9송이 정도면 5㎏ 상자를 채우는 데, 올해는 12∼13송이를 담아야 겨우 찬다"며 "가뭄과 폭염으로 제대로 된 송이 찾기가 드물다"고 덧붙였다.
사과는 상황이 더욱 심각하다.
두 달 전 충주와 제천에서 발생해 사과밭 29㏊를 휩쓴 화상병은 폭염 속에 소멸됐지만, 일소 피해가 광범위하게 나타나고 있다.
보은군 삼승면에서 '추석 사과'라고 불리는 홍로 농사를 짓는 이모(57)씨는 "햇볕에 덴 사과는 껍질이 누렇게 변하면서 딱딱해져 출하할 수 없게 된다"며 "7월 중순까지 작황은 그럭저럭 괜찮았는데, 폭염이 몰아치면서 농사가 엉망이 됐다"고 하소연했다.
13일까지 충북 시·군에 접수된 농작물 피해면적은 372.6㏊다.
이 중 햇볕에 데이거나 알이 갈라지고 낙과하는 등 과일 피해는 167.9㏊에 달한다.
종류별로는 사과 155.2㏊, 복숭아 9.9㏊, 포도 2.8㏊ 순이다.
충북도 관계자는 "이 통계는 농민 신고를 기준으로 한 것이어서 전수조사가 이뤄지면 가뭄과 폭염 피해가 눈덩이처럼 불어날 가능성이 있다"고 설명했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