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말레이시아 공항에서 발생한 김정남 독살사건에 연루된 혐의로 조사를 받다 추방된 북한인 리정철(46) 씨의 문자메시지와 이메일 등을 통해 북한이 어떻게 국제사회의 제재를 피해 외화벌이와 무역을 하고 있는지가 드러났다고 미 일간 월스트리트저널이 보도했습니다.
이 신문은 '북한의 비밀 군대:해외 공작원들이 어떻게 북한체제를 돕고 있나'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말레이시아 당국이 리 씨에게서 압수한 랩톱 3대와 휴대전화 4대, 태블릿 컴퓨터 1대 등의 내용을 세세히 분석했습니다.
신문은 리 씨가 말레이시아에서 평범한 무역인 행세를 했지만, 국제사회의 대북 제재를 피해 외화벌이와 비밀무역을 하는 공작원이었다고 주장했습니다.
저널에 따르면 리 씨는 수십만 달러 상당의 야자유와 비누 등을 북한 군부가 통제하는 회사에 수출하고, 유엔의 사치품 제재를 피해 25만 달러 상당의 이탈리아산 와인 5만 병도 조달해 북한으로 보냈습니다.
또 북한이 중거리 미사일 발사에 이용할 수 있는 산업용 중고 크레인 구입을 시도하고, 러시아를 경유한 북한산 석탄 수입이나 말레이시아 북서부 지역에서의 쌀 재배 등 다양한 돈벌이 구상을 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리 씨는 지난 2013년 말레이시아 한 약재상의 신원보증으로 취업비자를 받아 가족과 함께 입국했습니다.
이 약재상은 종양치료 버섯추출물을 개발한 리 씨의 삼촌을 만나러 북한에 갔다가 리 씨와 처음 인연을 맺었으며, 버섯추출물 수출을 돕겠다는 제안을 받고 리 씨의 신원보증을 서게 됐다고 합니다.
처음에는 현지에서 야자유와 비누, 기타 상품을 도매로 사들여 북한에 보내는 일을 했습니다.
이 물품들은 제재대상 품목은 아니지만 이를 수입하는 신광경제무역총회사는 북한 군부 운영회사로 미국과 유엔의 제재를 받았기 때문에 불법입니다.
이 때문에 리 씨와 현지 업자 간에 오간 문자메시지에는 '1만 달러 이상은 송금하지 말라', '서류에는 기념품 구입 대금으로 적으라' 등 당국의 감시를 피하기 위한 내용이 포함돼 있다고 저널은 밝혔습니다.
신문은 북한이 우호 관계에 있는 국가와의 무역을 위해 수십 년간 공작원을 파견해왔으며, 보통은 대사관 소속으로 활동하고 있다면서 미국과 유엔 당국은 파키스탄 내 불법 주류 판매와 아프리카에서의 무기판매, 방글라데시 금 밀수 등도 이들의 소행인 것으로 의심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신문은 다음 달 12일 북미정상회담이 성공하면 북한이 세계 경제에 통합돼 이런 조직의 중요성이 떨어지겠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 북한은 국제사회의 압력을 피해갈 수 있는 시스템이 이미 만들어져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대니얼 러셀 전 미 국무부 동아시아태평양 담당 차관보는 저널과의 인터뷰에서 "리 씨는 이례적인 사례가 아니며, 북한은 이런 사람들의 군대가 있다"고 했습니다.
리 씨는 말레이시아 수사당국으로부터 김정남 암살범들의 도주차량을 조달했다는 의심을 받았지만, 증거불충분으로 기소하지는 않았습니다.
그의 휴대전화에서 도주차량과 같은 모델의 차량 사진이 나오고 그의 이름으로 등록된 것이 근거였습니다.
말레이시아 경찰은 또 그의 아파트에서 신경가스를 제조할 수 있는 장비를 발견한 것으로 밝혔지만 김정남 독살에 사용된 VX 가스를 실험하지는 않았다고 전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