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화 '100만 번 산 고양이'로 이름을 날린 일본인 작가 사노 요코. 1938년 중국 베이징에서 태어난 그녀는 2010년 도쿄에서 작고했다. 한국과 한국인에 관심이 많았던 작가는 오래 알고 지낸 한국인 친구가 있었고, 몇 차례 서울과 남이섬을 찾기도 했다. 노년엔 우연히 '욘사마'를 보고 '덕통사고(갑자기 오타쿠 생활에 빠짐)'를 당하기도 했다. '겨울연가'부터 '호텔리어' 아니 그 위쪽 계보로 이어지는 그녀의 한국 드라마 편력은 방대하고 깊었다. 모두 그녀가 암 투병 중에 쓴 에세이 '사는 게 뭐라고'에 남긴 얘기다.
"일본인은 사랑을 믿지 않으나, 한국 사람은 열렬히 사랑을 믿는다." 연로한 작가의 통찰은 어떤 거리 두기에서 나오는 것일까. 이 책을 쓸 당시 저자는 죽음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모르겠으나,마치 일본인도 한국인도 아닌 시점에서 양쪽을 꿰뚫어 보듯 이야기한다. '겨울연가' 속 박용하며, '가을동화' 속 원빈이며, 하나같이 기어이 사랑을 위해 몸도 던진다며 감탄한다. 스토리는 아무래도 좋단다. 그저 그 자세에 흠뻑 빠졌다고 고백한다. 한국인이 매사를 대하는 그 자세. 한 단어로 압축해 '집념(執念)'이라고 적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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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념과 한국인
의지의 한국인. 포기를 모르는 불도저. 위기 극복의 화신. 우리 안에 이런 DNA가 있는 걸 우리도 잘 안다. 그러나 급기야 '사랑'이라는 지극히 내면적인 영역까지도 '집념'이 자리한 것이다. 국어사전은 '집념'을 이렇게 정의해 놓았다. '한 가지 일에 매달려 정신을 쏟음. 또는 그 마음이나 생각.' 분주한 느낌도 섬뜩한 기분도 든다.
한국인들은 항상 어딘가에 집념을 쏟아붓고 산다. 현재의 집념 거리란? '개방형 블록체인의 미래'(정재승 박사)지만, 동시에 '신묘하고 위험한 장난감'(유시민 작가). 비트코인, 이더리움, 리플 같은 가상화폐다. 아니 정확히 말해 이름난, 유명 혹은 인기 가상화폐다. 엄밀히 따지면, 그 시세 곡선인지도 모른다. 투기를 향한 집단 '집념'이 아니고 무엇인가.
물론 신문과 TV 뉴스 속 가상화폐 논쟁에서 전선은 조금씩 이동하고 있다. 현 정부가 국내 가상화폐 시장을 강도 높게 규제하는 게, 블록체인 기술 발전을 저해할 것이라 보느냐. 이 문제를 따지기에 이르렀다. 미래 국가 경제와 삶의 풍요를 위해 마땅히 필요한 논의다.
투기꾼 대다수는 '논쟁거리'라는 사실을 마치 규제 불가론의 논거로 삼기를 즐긴다. 그러나 그것은 엄연히 다른 얘기다. 실제로 논쟁의 중심에 있는 어떤 인물도 '유명 가상화폐' 시장의 과열을 부정하지 않는다. 투기 광풍. 공무원도, 기자도, 교수도, 거래소(정부는 취급업자라 부르고, 유시민 작가는 중개소라 부르길 제안했다.)들의 이익단체 대표 논객도, 심지어 일부 투자자도 이런 호명에 이견이 없다.
● 시세 차익은 나의 것
그럼에도 상당수의 투기세력이 시세곡선의 등락에만 모든 시신경과 뇌세포를 사용하는 게 현실. 심지어 여행경비엔 상한액이 없다는 사실을 악용해, 거액을 휴대한 채 홍콩이나 태국까지도 나간다. 얻고자 하는 건 오로지 시세 차익이다. 기자는 지난 19일, 올 들어 17일 동안 인천공항을 통한 원정투기 자금으로 추정되는 반출액만 121억 원에 달한다고 보도했다. 세관 공무원 앞에선, 이걸 굳이 여행경비라고 우기고 우겨, 비행기에 오르고 있다. 오직 15~30%대 김치프리미엄 덕을 보고, 차익을 통장에 남기겠다는 한 가지 마음. 투기를 향한 '집념'.
매일 이런 집념의 화신 6명이 공항을 뜨며, 대부분 20대 후반에서 30대 중반 젊은이다. 기자가 만난 일부는 직장을 그만두고 전업 투기꾼이 될 고민까지 하고 있다. 하루 평균 7억 1천만 원이 기내에 반입돼 해외 거래소로 나가고, 이 돈은 유명 가상화폐의 구매 자금으로 쓰이며, 취득된 가상화폐는 국내에 전송돼 다시 팔리고 있다. 그 결과 한국 시장엔 가상화폐가 자꾸 쌓여만 가고, 국내 통화는 속수무책 해외로 빠져나간다. 지난 9개월 동안 암암리에 급증한 '원정투기계'의 사정이다. '집념'의 결과다.
투기의 이문을 쫓는 자에겐 집념이 있다. 누가 갖추라고 하지 않았어도 저절로 갖춘 기질이다. 반대로 그저 업무로 단속하는 쪽은 집념 따위가 있을 리 없다. 외국환 관리를 통해 국내 통화의 가치를 수호하는 게 임무인 조직, 관세청의 지난 한 달이 그랬다. 지난해 12월 3일 '원정투기' 실태를 처음 보도했지만, 지금껏 뚜렷한 단속 성과는 없다. 오히려 새해가 되자 태국과 홍콩 여행객의 일일 현금 반출액은 19배로 늘었다. '집념'이 승부를 가르고 있는 것인가.
● 집념의 대가
말(馬)은 시야가 350도나 된다고 한다. 혈통이 좋아 어쩌다 경주마가 된 말은 시야를 가린 채 달려야 한다. 시야를 가릴 때만, 앞만 보고 달릴 수 있다. '집념'이 싹트라고 본성을 제약하는 것이다. 경주마는 그러나 집념을 얻는 대가로, 남들이 보는 건 못 본 채 살아가야 한다. 그런데 경주마는 누구를 위해 달리나. 생면부지인 자들의 투전판 놀음을 위한 경주 아닌가. 경주마야 억지로 달린다지만, 우리는 왜? 그것도 '유명 가상화폐' 시세 곡선이 점점 투기 심리를 닮아가고 있는 지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