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운의 북한 황태자' 김정남의 시신 인도를 놓고 말레이시아에서 북한 당국과 가족 간 줄다리기가 시작됐다.
김정남 피살 사건 직후부터 증거 인멸과 사태 조기 수습이 목적인 듯한 북한의 시신 인도 요구와 "남편과 아버지의 시신이라도 모셔야겠다"며 중국을 지렛대로 시신을 넘겨받으려는 유족 가운데 어느 쪽이 시신을 받을지 주목된다.
북한은 자국 국적자에 대한 관할권을 주장하는 반면, 사실상 탈북해 북한 당국의 미움을 사는 가족은 인륜을 내세우며 호소하고 있어 보인다.
17일(현지시간) AFP통신에 따르면 '김정남 암살 사건'을 수사 중인 말레이시아 경찰은 김정남의 시신을 받으려면 유족의 DNA 자료가 있어야 한다고 밝혔다.
압둘 사마흐 마트 셀랑고르 경찰서장은 "이제까지는 어떤 유족이나 친족도 신원을 확인하거나 시신을 요구하지 않았다"며 "우리는 사망자 프로필과 가족 구성원의 DNA의 샘플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시신 인도 과정에서 원칙을 강조한 발언이었지만 자세한 설명이 없어 시신 인도 주체를 놓고 다양한 뒷말이 나왔다.
말레이시아 당국이야 수사에 차질을 빚지 않는 이상 부검이 끝난 시신을 주말레이시아 북한 대사관에 넘겨주면 되겠지만 북한과 김정남 사이 '특수관계'를 고려할 때 간단한 문제만은 아니다.
북한 김정은 노동당 위원장은 그동안 몇 차례 '백두혈통'의 장자인 이복형 김정남을 암살하려고 시도한 것으로 알려진다.
이 때문에 김정남이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 공항에서 피살되자 북한이 암살의 유력한 배후로 떠올랐다.
북한이 부검 전에 김정남 시신의 관할권을 주장하며 서둘러 시신 인도를 요구한 것을 두고 범행 은폐 목적이 아니냐는 관측도 나왔다.
말레이시아 정부 관계자를 인용해 부검 전 북한이 시신의 화장을 요청했다는 보도까지 있었다.
북한이 시신 확보에 열을 올린 만큼 시신이 북한 대사관으로 인도되면 김정남의 직계가족들이 다시 넘겨받을 가능성은 희박하다.
김정남이 비명횡사했지만 직계가족들은 장례를 치르러 북한에 갈 수 없는 처지다.
장례는커녕 자신들도 신변의 안전을 걱정하며 숨어 지내야만 하는 상황에서 북한 대사관과 접촉해 시신을 넘겨받기란 어려운 일이다.
김정남의 본처와 아들 1명은 현재 중국 베이징에, 후처 이혜경과 한솔·솔희 남매는 마카오에 있는 것으로 알려진다.
김정남 가족들은 순순히 시신을 북한에 넘겨줄 수 없다며 대응에 나섰다.
북한으로 시신이 가면 장례조차 제대로 치르지 못할 가능성이 크다는 걸 뻔히 알기 때문이다.
말레이시아 매체 프리말레이시아투데이(FMT)는 전날 정부 관계자를 인용해 김정남의 둘째 부인인 이혜경이 김정남의 시신을 받을 수 있도록 말레이시아 주재 중국 대사관을 접촉했다고 보도했다.
남편 시신 인도를 위해 중국 정부에 도와달라는 요청을 한 셈이다.
중국 정부가 시신 인도 향배를 결정하는데 영향력을 행사할 가능성도 있다.
중국은 권력투쟁에서 밀려나 해외를 떠돈 김정남의 신변을 2000년부터 보호했다.
김정남의 아버지 고(故) 김정일 전 국방위원장이 살아있을 땐 인질 성격이었고 김정은 시대에선 북한 급변사태 발생 시 최고 지도자로 옹립할 수 있는 후보였기 때문이다.
화교 자본이 지배하는 말레이시아가 최대 교역국인 중국의 입김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점도 눈여겨볼 만 하다.
김정남 유족이 중국을 움직여 시신을 받으려는 조짐을 보이자 북한 대사관도 바빠졌다.
더군다나 시신 인도 전 유족 DNA를 요구한 말레이시아 경찰의 발언으로 상황이 복잡하게 돌아갈 가능성도 나오는 상황이다.
상황이 변한 탓인지 이날 기자가 찾은 북한 대사관은 분주한 모습이었다.
쿠알라룸푸르 고급 주택가인 부킷 다만사라에 자리 잡은 북한 대사관에는 오전부터 강철 북한 대사 등 대사관 관계자들의 바깥출입이 활발해졌다.
말레이 매체인 더스타 온라인은 이날 중 부검이 끝난 김정남의 시신이 인계될 가능성이 있다면서 강 대사의 오전 외출이 이와 관련이 있을 것으로 전망했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