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파일] '두루미와 함께 살자' 철원 농민 자연생태 배려 농법 실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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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루미와 함께 살자’ 자연생태 배려하는 철원 농민들 

논에 볏짚 깔고 물 채워 철새 모이터 잠자리 조성

철새가 편안하면 흩어지지 않는다 - AI 확산 방지 효과도

뭔가에 쫓기듯 허둥허둥 날아가는 두루미 재두루미 모습이 확실히 줄었다. 철새들이 한곳에 빼곡하게 모여 부대끼며 다투는 광경도 보기 드물다.  2마리 부부, 3~4마리 가족 단위 두루미 재두루미는 들판 여기저기 띄엄띄엄 흩어져 한가로이 논바닥을 헤집는다. 어린 새 표지인 머리와 목의 갈색이 다 사라져 성년으로 독립한 젊은 녀석들은 수십 마리씩 무리를 지어 모였다. 역시 별 불안한 기색 없이 들판을 서서히 거닐거나 머리를 숙여 부리로 논바닥을 쪼아댄다. 지난 12월  2,3일 국제적인 철새 도래지 강원도 철원 민통지역 농경지 분위기는 예년과 다르게 비교적 평온했다. 서울시립대학교 한봉호 교수와 환경생태연구실의 철원 철새 도래지 생태환경 조사에 동행하며 받은 느낌이다. 철원은 세계적으로 알려진 두루미 재두루미 월동지로 지난 10년 동안 해마다 취재나 탐조 관찰로 찾던 곳이다. 사람들의 무분별한 출입과 겨울철 잦은 농수로 공사, 경지 정리 공사 따위로 어수선한 상황이 벌어져 두루미가 쫓긴다고 자주 비판하며 보도하던 현장이기도 하다. 어떻게 된 까닭일까?

● 볏짚 깔린 논에서 편안하게 지내는 겨울 철새

“힘들게 농사지어봐야 쌀값은 계속 떨어지고, 본전 건지기도 어렵잖아요, 볏단이라도 소먹이로 내다 팔고 싶지만 그래봤자 봄에 화학비료 더 써야 하고, 그러느니 차라리 우리 논에 오는 두루미들한테 좋은 일 해 주자, 볏짚 썰어서 깔아주면 낙곡은 두루미 밥이 되고, 볏짚은 봄에 비료가 되는 거고요. 두루미가 많이 오면 우리 철원 쌀이 친환경 쌀이라는 걸 널리 알릴 수 있지 않겠느냐 이거죠. 두루미 재두루미가 철원에서 겨울 잘 보내고 건강해져서 시베리아 번식지로 돌아가 새끼 잘 치고 가을에 또 찾아와주면 고맙죠. 철새 보러 관광객이 와 주시면 지역 경제도 그만큼 좋아질 것이니까요. 그저 소출만 많이 올리자고 할 게 아니라 논도 지키고 자연도 지키면 우리에게도 이익이 된다는 걸 농민들이 알고 실천하는 겁니다.”  충남 태생으로 철원에 25년째 살고 있는 철원 생태관광협의회 최종수 사무국장은 힘주어 설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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볏짚 깐 논을 살폈다. 볏단을 헤치니 볏짚에 달리거나 바닥에 깔린 이삭이 심심치 않게 보인다. 3천 평(100m×100m =1만㎡=1ha)논에서 보통 벼 7.5톤(7천500kg)을 거두면 땅에 떨어지는 낟알이 최소 3%, 225kg쯤이라고 최종수 국장은 말한다. 철원 민통지역 논 가운데 농민들이 자발적으로 볏짚 깔아준 논이 680ha이니 낙곡은 15만3천kg, 볍씨 kg당 1천5백원으로 계산하면 2억2천9백만원 어치의 볍씨를 농민들이 두루미 재두루미 기러기 오리의 겨울 양식으로 양보했다는 얘기다. 볏짚을 소 사료용으로 둘둘 말아 내가는 논에는 철새가 올 수 없다. 진정으로 추위와 배고픔에 떠는 철새를 위한다면 철원 농민처럼 그저 논에 볏짚을 깔아주기만 하면 된다. 보여주기 식 행사로 예산 세워 볍씨를 사서  모이주기 행사한다고 예산 따로 세우고 공무원 시민 학생 동원해서 들판에 나락 뿌려주고 증빙 사진 찍는 식의 번거로움을 벌일 이유가 없다. 조류인플루엔자 AI 확산을 막기 위해서라도 겨울 들판은 야생 철새의 공간으로 남겨둘 필요가 있다. 겨울 추위에도 볏짚 속은 포근해서 거미를 비롯해 다양한 곤충이 산다. 두루미에겐 동물성 단백질 공급원이다. 농사에 도움되는 미생물도 많아 비료를 따로 사지 않아도 땅심을 돋워준다. 희귀한 철새를 보러 사람들이 찾아오면 지역 경제에도 도움이 된다. 1석2조가 아니라 3조 4조의 효과를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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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논으로 모여드는 재두루미 떼

최종수 국장의 안내로 3일 새벽 철원 동송읍 대마리 백마고지 전적비 언덕에 올랐다. 북쪽으로 가로 누운 긴 산더미가 유명한 백마고지다. 6.25 전쟁이 지지부진하던 휴전협상으로 다시 불타오르던 1952년 10월 국군이 중공군의 맹공을 물리치고 지켜낸 ‘백마고지 전투’의 무대다. 언덕 아래 북쪽으로 300m 쯤 떨어진 들판 무논에 재두루미와 두루미 합쳐 7백 마리가 모여 있었다. 안전하게 밤을 보내고 아침을 맞는 두루미 무리의 모습은 장관이었다. 국내에서는 처음 보는 광경이다. 세계 최대 흑두루미 재두루미 월동지안 일본 큐슈 이즈미나 국내 최대 흑두루미 월동지 순천만도 무논을 만들지만 육안으로 가깝게 관찰하기는 쉽지 않다. 두루미들은 삵이나 너구리, 들개와 같은 천적으로부터 몸을 지키기 위해 발목쯤 잠기는 얕은 물에서 밤을 보낸다. 하천의 여울이나 습지가 자연의 잠자리다. 개발 명목으로 자연의 잠자리가 사라지는 현실을 보면 물을 채운 겨울 논은 인공습지로 훌륭한 대체 잠자리인 셈이다. 낮에 살펴본 민통 지역 여러 무논에서는 크고 작은 물고기, 올챙이, 우렁이를  볼 수 있었다. 낙곡이 두루미의 식물성 양식이면 이것들은 동물성 단백질 양식이다. 잡식성인 두루미에게 무논은 요긴한 쉼터이며 간식 사냥터이며 잠자리인 셈이다. 올 겨울 철원 농민들이 물 채워준 논은 213ha에 이른다. 현무암 지형의 특징으로 자연스럽게 솟아오르는 지하수를 이용하기에 따로 에너지나 비용을 들이지도 않는다. 두루미의 야생 본성을 존중해 자연스런 월동 환경을 지켜주는 철원이 인공적으로 모이를 뿌려주는 일본 이즈미와는 차원이 다르다고 한봉호 서울시립대 교수는 평가했다. 겨울 철새들이 한 자리에서 편안하게 지내지 못하고 이리저리 쫓겨 다니며 흩어지면 AI 확산 가능성도 그만큼 높아지는 만큼 철원 방식의 철새 배려 농법은 주목할 만하다고 다른 야생 조류 전문가들도 반가움을 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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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철원 두루미류 12월 현재 4천20마리…지난해의 2.6배

야생 동물도 사람과 마찬가지로 생활 여건이 좋아지면 굳이 멀리 떠나지 않는다. 올해 12월 3일 현재 철원의 두루미류는 6종 4천20마리로 1년 전인 지난해 12월 14일 시점의 4종 1,543마리에 비해 2.6배나 많았다. 월동 조건이 개선된 만큼 일본으로 남하하는 재두루미 무리가 남하 시기를 늦추거나 철원에 머물고 있는 것으로 서울시립대학교 환경생태연구실은 분석했다. 두루미들이 잠자리와 먹이터를 오가는 거리가 줄고 서식 여건이 좋아진 것은 곧 ‘두루미류 생태복지 개선’이며 이듬해 번식 활동에도 좋은 영향을 줄 것이라고 연구팀은 내다보고 있다. 두루미는 지구상에 3천 마리, 재두루미는 4,5천 마리 정도밖에 남지 않았다. 사람이 이들의 생존 여건을 세심하게 보살피지 않으면 영영 사라지고 만다. 전문용어로 ‘생물다양성(Biodiversity)'을 높인다며 국제회의까지 끌어들인 정부다.  환경부 당국자들은 당장이라도 철원으로 달려가 농민들과 함께 볏짚 깐 논과 무논을 돌아보길 권한다. 삶의 터전에서 생물다양성을 지키기 위해 나선 철원 농민 여러분께 박수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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