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ll them all"…미국이 숨겼던 72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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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이 숨겼던 72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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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이 발발하고 1년 뒤 7월의 더운 여름 날 충북 영동 한 마을에 살던 10살 소년 해찬이는 처음으로 미국인을 만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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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피시켜주겠다" 미군의 말에 해찬이는 할머니,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4남매와 함께 피난길에 올랐습니다.마을 사람 대부분이 미군을 따라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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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미군이피난 행렬을 막아섰습니다. 짐 검사를 한다는 이유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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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순간, 하늘 위로 전투기가 날아가더니 피난 행렬을 향해 폭탄이 떨어졌습니다.해찬이는 그날 할머니, 아버지, 동생의마지막 순간을 눈 앞에서 지켜봐야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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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신히 살아남은 해찬이는 헐레벌떡 쌍굴다리 밑으로 들어가 숨었습니다. 그러자 이내 쌍굴을 향한 사격이 시작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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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 속에 널부러진 시신과 생존자가뒤엉켜 누워있는 쌍굴 안은지옥보다 참혹했습니다.총을 쏜 군인들을 본 주민들은 경악했습니다."미군이다. 미군이 우릴 죽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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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굴 안 어둠 속으로 사흘간 총격이 쏟아졌습니다.그 사이 한 아기가 태어났습니다.젖을 먹이느라 몸을 일으켜 세운 어머니는총에 맞아 세상을 떠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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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기 울음소리가 들릴 때마다 미군이 총격을 가하자아버지는 울면서 아기를 죽여야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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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찬이는 그렇게 3일을 버티고 미군 눈을 피해 간신히 대피했습니다.충북 영동군의 민간인 200명 이상이 미군에 의해살해된 이 사건의 이름은 노근리 학살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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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이 끝나고 46년이 지나도록 미국은 이 사실을 쉬쉬했습니다. 어른이 된 양해찬 씨는 가족들과 이웃들의 죽음을 알리기 위해 백방으로 뛰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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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근리 유족회는 노근리 실화 소설<그대 우리의 아픔을 아는가>를 출간했지만 큰 관심을 받지는 못했습니다.미 정부에 사과와 손해배상을요구하는 진정도 냈지만 기각 당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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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17년 전인 1999년의 오늘(9월 30일). AP통신이 처음으로 노근리 학살 사건에 대해 보도했고 마침내 전 세계에 알려지게 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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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민을 사살하라는 명령을 받았으며 이 명령은 그들 속에북한 인민군이 숨어있다는 이유 때문.”- AP 통신 1991년 9월 3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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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ll them all." 이 한 마디 명령으로 수 백명의 마을 사람들은 아무런 잘못 없이무참히 살해돼야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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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미국의 배상을 거부했어. 그건 돌아가신 분들에 대한 예의가 아니거든." -양해찬 유족회장 AP통신 보도가 나가자 미국정부는그제서야 배상을 하겠다고 접촉해왔습니다.하지만 논의 끝에 노근리 유족회는미국의 배상을 거부하기로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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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순히 추모비석을 세워주고 장학재단을설립해 준다는 소극적인 제안이었습니다.사과와 배상의 진정성이 없다고 본 생존자들은미국으로부터 아무것도 받지 않기로 한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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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뿔뿔이 흩어지기도 했고... 이제 생존자들도 정말 얼마 없어..." 생존자들은 최소한의 배상도 받지 못한 채평생을 회한과 트라우마로 살다대부분 세상을 떠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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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년 전 오늘 세상에 처음 알려진노근리 양민 학살 사건. 절대 잊어서는 안 될 그리고 아직도 해결되지 않은우리 현대사의 가장 아픈 역사입니다.

한국전쟁 발발 1년 후 충북 영동의 한 마을 주민을 대피시키겠다던 미군이 돌연 그들에게 폭격을 가했습니다. 수백명이 목숨을 잃었지만 미국은 46년간 쉬쉬했습니다. 17년 전 오늘은 노근리 학살 사건이 처음 전 세계에 보도된 날입니다.

기획 하대석 / 구성 김민성 인턴

(SBS 스브스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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