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항공이 한진해운에 대한 자금 지원을 최종 확정하지 못하고 정부와 채권단도 강경한 입장을 유지하면서 물류대란을 조기에 진화할 '골든타임'을 놓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
긴급 자금을 투입해 미국에서 선박 압류를 금지하고 하역 작업을 일부라도 정상화하지 않으면 사태가 겉잡을 수 없이 커질 수 있다는 지적이다.
9일 대한항공에 따르면 회사 측은 이날 오전 이사회를 열어 한진해운에 대한 600억원의 자금 지원 안건을 논의했으나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
전날 이사회에서 현격한 의견 차이가 생기자 이날 속행한 것이었지만 역시 이견이 좁혀지지 않았다.
이사들은 다른 채권자와의 차별 문제와 배임 소지 등을 우려하는 것으로 전해진다.
앞서 한진그룹은 조양호 회장의 400억원 사재 출연과 함께 대한항공이 한진해운 자회사 TTI가 운영하는 해외 터미널 지분과 채권 등을 담보로 600억원을 빌려주겠다고 밝힌 바 있다.
회사 측은 10일 이사회를 속행하기로 했으나 이미 두 차례 헛물을 켠 상태여서 전망은 부정적이다.
조양호 회장이 보유 중인 주식을 담보로 대출을 받아 지원하기로 한 400억원은 일러도 다음 주 초에야 집행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정부와 채권단은 먼저 지원하지는 않겠다는 강경한 입장을 여전히 고수하고 있다.
채권단 관계자는 이날 대한항공 이사회 소식이 전해진 뒤에도 "담보 없이는 지원하지 않는다는 방침은 변함이 없다"며 "오히려 더욱 지원할 수 없게 된 상황"이라고 말했다.
지원에 앞장서야 할 한진그룹과 대한항공도 어려울 것 같다며 난색을 표하는 상황에서 채권단이 도울 이유가 더더욱 없다는 것이다.
정부와 채권단은 앞서 한진해운에 금융 지원(DIP 파이낸싱·회생 기업에 대한 대출)을 해달라는 법원 요청에도 거부 의사를 밝힌 바 있다.
현재 비정상 운항 중인 한진해운 선박에는 약 140억달러(약 15조원) 상당의 화물이 적재돼있다.
당장 공해상을 떠도는 컨테이너선의 하역만이라도 해놓아야 피해를 줄일 수 있는데, 여기에 들어가는 비용은 약 1천700억원으로 추산된다.
한진그룹의 지원 계획이 발표된 뒤 1천700억원에는 못 미쳐도 일단 세계 곳곳에 발이 묶인 한진해운 선박의 숨통이 트일 것이라는 기대가 많았다.
그러나 대한항공 이사회와 정부·채권단이 서로 자신의 손해를 막기 위해 방어하는 데만 급급하면서 이런 기대는 물거품이 될 가능성이 커졌다.
업계에서는 물류대란 해소의 물꼬를 틀 시간적 여유가 얼마 남지 않은 상황에서 자금 집행 지연이 악영향을 줄 것이라는 우려가 나온다.
미국 뉴저지 연방파산법원은 지난 7일(현지시각) 한진해운의 파산보호 신청을 임시로 승인하면서 9일 오전 10시(한국시각 9일 오후 11시)까지 미국 내 채권자 보호를 위한 자금조달 계획을 제출하라고 명령했다.
법원이 이를 검토해 파산보호 신청을 최종 승인하면 압류금지명령(스테이오더)이 정식 발효돼 미국 내에서 한진해운 선박에 대한 압류가 불가능해진다.
현지 항만의 하역 작업 정상화를 위한 기반이 마련되는 것이기도 하다.
우리 정부는 이런 상황을 가정해 미국 롱비치·시애틀·뉴욕을 거점항만(세이프티존)으로 삼아 선박을 유도하겠다는 대책도 세웠다.
그러나 자금조달 계획이 제대로 세워지지 않는 바람에 자칫 파산보호 신청이 거부되면 미국 내 채권자들이 한진해운 소속 선박 등에 대한 압류에 나서고 배에 실은 화물은 볼모로 잡혀 되찾기 어려워진다.
해운 전문가들은 미국이 한진해운의 최대 시장인 만큼 현지에서 선박 압류가 시작되면 다른 국가에도 도미노 파장을 일으킬 것으로 우려한다.
법무법인 세경의 김창준 변호사는 최근 한국해법학회 주최로 열린 좌담회에서 "최대 시장인 미국부터 풀리면 그 선례가 전 세계적으로 파급 효과가 있을 것"이라며 미국 내 사태 해결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서울=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