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일 오후 2시, 기자는 일찌감치 서울 광화문 포시즌스호텔에서 뻗치기(취재를 위한 대기)에 들어갔습니다.
이 호텔에서 오후 4시쯤 현대중공업 최고경영진과 사우디아라비아 에너지장관 및 국영석유회사 '아람코' 경영진이 회동을 할 것이라는 정보를 얻어 취재에 들어간 겁니다. 현대중공업이 아람코와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조선소 건설 등 사업협력을 하기 위한 협의가 있을 것이란 내용입니다.
일찍 움직인 덕일까요. 회동 시간이 많이 남은 상황인데 예상치 못한 인물을 만났습니다. 고 정주영 명예회장의 손자, 현대중공업 정몽준 대주주의 아들인 정기선 전무(사진)를 만난겁니다.
몇 가지 질문과 대답이 오갔지만, 예상치 못한 대면이라 큰 소득을 얻지는 못했습니다. 그런데, 정기선 전무와 헤어지고난 뒤 커다란 나무상자 하나가 회동장소로 들어가는게 목격됩니다.
비즈니스에서 매우 중요한 손님이 온 지라 "선물이려니"했는데, 알아보니 '은거북선'이라 합니다.
조선업계에서는 거북선하면 고 정주명 명예회장의 조선소 수주를 떠올립니다. 500원짜리 지폐에 그려진 거북선 그림을 보여주며 조선소를 짓기도 전에 해외에서 선박 수주를 따왔다는 일화는 유명합니다.
현대중공업-고 정주영 명예회장-은거북선...무언가 '감' 잡히는 관계입니다.
'은거북선' 역시 고 정주영 명예회장에서 시작됩니다. 명예회장 시절부터 현대중공업은 가로·세로·높이 15cm정도 크기의 은으로 된 거북선을 매우 특별한 손님에게 선물해왔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이날 만남은 어떤 인연이길래 '특별한' 은거북선이 출동을 했을까요.
지난해 11월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칼리드 알 팔리 에너지장관은 당시 사우디 국영석유회사 아람코의 회장 겸 CEO를 맡고 있었습니다. 이때 현대중공업과 아람코가 전략적 협력관계를 구축하는 MOU를 체결했습니다.
사우디에서 조선, 엔진, 플랜트 등 다양한 분야에서 합작 사업을 함께 추진하자는 내용입니다. 당시 사우디는 석유에만 의존하는 경제에서 벗어나기 위해 조선과 자동차를 정책적으로 육성하려는 목표를 세운 상태입니다. 조선분야 협력파트너로 현대중공업을 선택한겁니다.
협력이 잘되면 현대중공업은 선박수주에 유리한데다 현지 합작 조선소 건설, 운영 참여 등을 통해 부가수익을 창출 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 조선과 연관성이 높은 선박용 엔진분야, 정유, 전기전자 등 다양한 분야로 협력을 확대해 나갈 수도 있다 합니다.
업황부진과 대규모 손실로 3조5000억원대의 고강도 자구안을 이행중인 현대중공업에겐 경영정상화와 관련해 매우 중요한 이슈입니다.
정기선 전무가 두어시간전에 회동장소에 나와 상황을 둘러본 이유도 이해가 갑니다. 정기선 전무가 아람코와 협력프로젝트를 이끌어왔기 때문입니다. 아람코 프로젝트는 정기선 전무가 주도한 첫 해외사업이기도 합니다.
정기선 전무는 지난해 11월 아람코와 협력MOU를 체결하면서 고 정주영 명예회장의 과거 업적을 거론하며 의미를 부여했습니다. 세계 건설업계가 20세기 대역사로 평가했던 사우디아라비아의 주베일 산업항 공사처럼 이번 아람코와의 협력이 현대중공업에 제2의 도약을 할 기회가 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날, 정기선 전무의 마음을 말없이 대변했을 '은거북선'을 받은 알 팔리 에너지장관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SBSCNBC 김선경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