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우 취재파일⑧] '수영 불모지'의 깜짝 금메달…수리남의 흑진주 네스티


[편집자 주]

오는 8월5일(현지 시간) 브라질의 세계적 미항인 리우데자네이루에서 ‘지구촌 축제’인 제31회 하계 올림픽이  화려한 막을 올립니다. 남미 대륙에서 처음으로 개최되는 올림픽이어서 의미가 남다릅니다.

SBS는 지난 120년 동안 올림픽이 낳은 불멸의 스타, 감동의 순간, 잊지 못할 명장면, 지금도 인구에 회자되는 각종 에피소드를 담은 특별 취재파일을 마련했습니다. 이번 특별 취재파일이 올림픽에 대한 독자의 상식과 관심을 확대시켜 리우올림픽을 2배로 즐길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으로 기대합니다.

1988년 9월 21일 서울올림픽 수영 남자 접영 100m 결승. 이 경기는 당시 수영 최고 스타였던 미국의 매트 비욘디와 서독의 미하엘 그로스의 라이벌 대결로 관심이 집중됐습니다.

비욘디는 1972년 뮌헨올림픽 남자 수영에서 미국의 마크 스피츠가 달성했던 7관왕이라는 최다관왕 기록에 도전했고, 그로스는 1984년 LA올림픽 2관왕으로 비욘디의 독주를 견제할 선수로 꼽혔습니다. 관중의 시선은 당연히 5번 레인의 비욘디와 6번 레인의 그로스에게 쏠렸습니다.

초반 레이스에서 비욘디는 그로스에 근소하게 앞서며 50m 구간을 1위로 통과했습니다. 이후 그로스와 격차를 점점 벌렸고, 마지막 10m를 남겨 놓고 1위를 지켜 우승이 확실해 보였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이변이 일어났습니다.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던 3번 레인의 흑인 선수가 막판 무서운 스퍼트로 치고 나왔고, 비욘디와 거의 동시에 터치 패드를 찍었습니다. 결과는 0.01초 차! 비욘디의 패배였습니다.

당대 최강 비욘디를 상대로 역전극을 펼친 이 선수는 수리남에서 온 ‘앤서니 네스티’라는 무명 선수였습니다. 올림픽 수영장의 관중도, 비욘디도, 그리고 무엇보다 네스티 본인도 이 결과가 믿기지 않는다는 반응이었습니다. 네스티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고, 비욘디는 결과가 찍힌 전광판을 외면해버렸습니다. 그리고 비욘디를 열렬히 응원했던 미국 응원단에도 한동안 침묵이 흘렀습니다. 서울올림픽 최대의 이변이 연출된 순간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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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리남은 남아메리카 북동쪽에 있는 나라로 400년 가까이 네덜란드의 식민지였다가 1975년 11월 독립했습니다. 1988년 당시 인구 39만 명의 신생국가로 스포츠 불모지나 다름 없었습니다. 전국에 길이 50m 규격의 수영장이 한 개 밖에 없었습니다. 서울올림픽에는 6명의 선수단을 파견했는데, 네스티는 이 가운데 유일한 수영 선수였습니다.

네스티가 우승했을 때 수리남이라는 국가가 워낙 생소해서 당시 국내 언론에서는 ‘아프리카’의 수리남이라고 잘못 소개하기도 했습니다. 1967년 카리브해 연안에 있는 트리니다드 토바고에서 태어난 네스티는 9살 때 가족과 함께 수리남으로 이주했습니다.

17살 때 수리남 수영 국가대표가 됐고, 1984년 LA올림픽에 출전해 국제무대에 데뷔했지만 접영 100m에서 예선 탈락했습니다. 당시 순위는 21위였습니다. 이후 훈련 환경이 열악한 수리남을 떠나 미국 플로리다주 고등학교에서 체계적인 수영 훈련을 받으며 기량이 급성장했고, 1987년 팬 아메리칸게임에서 접영 100m 금메달을 차지하며 두각을 나타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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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1987년 접영 100m 세계랭킹 7위였던 네스티가 서울 올림픽에서 비욘디와 그로스를 제치고 금메달을 목에 걸 줄은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네스티 자신도 서울올림픽에서 금메달까지는 기대를 안 했고, 내심 동메달을 기대했었다고 밝혔습니다.

네스티는 예선 3위의 기록으로 결선에 진출했고, 결선에서 50m 지점은 5위로 통과했습니다. 하지만 중반 이후 놀라운 스퍼트를 발휘하며 10m를 남겨 놓고 2위까지 치고 올라온데 이어, 마지막 터치 동작에서 극적으로 전세를 뒤집었습니다. 네스티와 비욘디의 메달 색깔은 ‘마지막 2m’에서 갈렸습니다.

1위를 확신한 비욘디는 방심한 나머지 마지막 스트로크 동작을 생략하고 미리 물에서 머리를 들어 올린 반면, 네스티는 터치패드를 찍기 직전까지 스토로크 동작을 유지했습니다. 최종기록은 네스티 53초 00, 비욘디 53초 01. ‘100분의 1초 차’ 거리상으로는 1.8cm에 불과했습니다. 결국 방심한 비욘디와 끝까지 최선을 다한 네스티의 차이였습니다.

비욘디는 경기 후 기자회견에서 “터치패드에 코를 부딪힐까봐 마지막에 움찔했다”며 자신의 실수를 인정했습니다. 반면, 네스티는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다”라는 야구의 격언처럼 “터치패드를 찍는 순간까지 끝난 게 아니다”라는 코치의 가르침을 가슴에 새기고 실천했다고 밝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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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스티 서울올림픽 시상식

네스티의 금메달은 여러 모로 큰 의미가 있었습니다. 백인들이 절대 우위를 보이고 있는 수영 종목에서 흑인 선수가 획득한 첫 번째 올림픽 금메달이자 조국 수리남에게도 건국 이후 첫 번째 올림픽 금메달이었습니다. 28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수리남이 올림픽에서 딴 유일한 금메달로 남아 있습니다.

당연히 네스티는 수리남에서 국민적인 영웅이 됐습니다. 수리남 정부는 당시 15만 달러의 포상금과 국가 최고 훈장을 네스티에게 수여했습니다. 또 그의 금메달을 기념하는 우표와 주화를 발행했고, 수리남 국영 항공사는 네스티의 이름을 딴 항공기를 운항했습니다. 수도 파라마리보에 있는 실내 체육관 이름도 ‘앤서니 네스티’ 체육관으로 지었습니다.

네스티는 4년 뒤인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에도 출전해 접영 100m에서 동메달을 목에 걸었고, 이후 현역에서 은퇴했습니다. 은퇴 후에는 수리남 수영 국가대표 코치를 맡았고, 1996년 애틀랜타 올림픽과 2008년 베이징 올림픽 때 수리남 선수단 기수를 맡기도 했습니다. 1998년에는 국제수영연맹 명예의 전당에 입회했습니다. 네스티는 현재 자신의 모교인 미국 플로리다 대학에서 코치를 맡아 후진 양성에 힘쓰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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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플로리다대 코치 맡고 있는 네스티

서울올림픽에서 ‘언더독의 반란’을 보여준 네스티처럼 다가오는 리우올림픽에서도 스포츠 변방국에서 열악한 환경을 딛고 이변과 감동을 선사하는 모습을 볼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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