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영화, 이 대사] 영화 '스티브 잡스'…"다시 생각해 봐. 인생은 이진법이 아니야!"

영화 '스티브 잡스'


재승박덕(才勝薄德). 스티브 잡스라는 인물을 설명하는 데 이보다 더 적절한 표현이 있을까? 손바닥만한 전화기 한 대로 새 세상을 연 인물. '시대의 패러다임을 바꿨다'는 표현이 결코 넘치지 않는 이른바 '혁신의 아이콘.' 하지만 그 화려하고 천재적인 재능 뒤에 냉혹하고 무책임하고 이기적이고 독선적인, 수많은 인간적 흠결을 함께 갖고 있던 이중적인 인물. 많은 배우와 감독들이 끊임없이 잡스를 스크린에 담고 싶어 하는 건 잡스의 삶이, 아니 잡스라는 인물 자체가 너무나도 '영화적'이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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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리우드의 손꼽히는 스타일리스트 대니 보일 감독의 영화 '스티브 잡스'는 그 형식부터 잡스의 삶만큼이나 혁신적이다. 잡스의 삶에서 중요했던 세 가지 사건을 골라 연극의 3막 형식으로 선보인다. 1984년 맥킨토시 런칭, 1988년 넥스트 큐브 런칭, 1998년 아이맥 런칭을 위한 프레젠테이션 현장이 무대다. 영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각각의 프레젠테이션을 앞둔 마지막 40분 동안의 분주한 런칭쇼 현장에서 거의 벗어나지 않는다.

그 세 번의 40분 동안 잡스는 쉴 새 없이 움직이며 수많은 사람을 만나 쉬지 않고 대사를 쏟아낸다. 동료와 친구, 가족, 기자, 부하직원 등을 상대로 얘기하고 의논하고 다투고 지시하고 분노하고 부딪치고 갈등한다. 그 과정에서 속사포처럼 쏟아내는 대사들은 듣는 이가 지칠 정도로 엄청난 양이다. 거의 모든 장면에 등장해 그 많은 대사들을 완벽하게 소화한 것만으로도 잡스 역의 마이클 패스밴더는 LA 비평가협회가 준 남우주연상의 충분한 자격이 있어 보인다.

특별한 사건도 없이 한정된 공간에서 오직 잡스와 주변인들의 대화만으로 영화는 잡스라는 인물의 삶 전체를 놀라울 만큼 생생하게 그려낸다. 천재적인 재능과 박덕한 인품, 잡스의 두 얼굴을 관객들 앞에 동시에 드러낸다. 잡스를 그린 이전의 영화들과는 분명히 대비되는 대목이다. '천재 잡스' '영웅 잡스'만 기억하고 싶은 열성팬들에겐 불편할 수도 있을 만큼 적나라한 균형 감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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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티브 잡스(좌), 스티브 워즈니악 (우)

그 중에서도 하이라이트는 애플의 공동창업자였던 스티브 워즈니악과 잡스가 벌인 두 번의 설전이다. 첫 번째는 1984년 맥킨토시 런칭쇼 현장에서, 두 번째는 1998년 아이맥 런칭쇼 현장에서다. 10년 넘는 세월을 사이에 두고 두 사람은 똑같은 주제로 입씨름을 벌인다. 워즈니악은 잡스에게 프레젠테에션에서 애플2의 개발자들 이름을 한 번만 언급해 달라고 부탁한다. 하지만 잡스는 두 번 모두 냉정하게 거절한다.

맥킨토시와 아이맥 모두 애플의 제품인 만큼, 애플의 오늘을 이룬 배경엔 애플2 개발자들의 노고가 있었다는 게 워즈니악의 주장이다. 하지만 잡스의 생각은 다르다. 잡스에게 애플2는 실패한 제품이다. 애플의 오늘은 애플2 덕분에 있는 게 아니라 애플2의 실패를 극복했기 때문에 있는 것이다. 애플2는 경사스러운 신제품 런칭쇼 무대에서 자랑할 대상이 아니라 숨기고 부정해야할 대상이다.

애원에 가까운 친구의 간절한 부탁을 끝내 거절하는 잡스를 워즈니악은 결국 이기지 못한다. 설득에 포기한 워즈니악은 실망과 분노, 배신감이 교차하는 표정으로 한 마디를 남기고 돌아서 행사장을 떠난다: "어떤 사람들은 재능과 인품을 동시에 갖추기도 해."

영화에서 한 문장으로 번역된 대사의 원문은 두 문장이다. "It's not binary. You can be decent and gifted at the same time." 두 문장을 달리 번역하면 "(인생은) 이진법이 아니야. 재능만큼 인품도 동시에 갖출 수는 없는 거니?" 쯤이 될 것이다.

이진법(binary)은 0과 1만으로 모든 수를 표현한다. 컴퓨터 언어의 기본을 이루는 체계다. 인간의 언어로 말하면 이분법이 될 것이다. 네/아니오, 맞다/틀리다, +/-, 올/나씽으로 모든 것을 구분하는 것이다. ‘이진법,’ 인생을 성공과 실패, 양립할 수 없는 가치의 투쟁 속에 살다 50대에 암으로 요절한 스티브 잡스라는 인물을 표현하는 데 이보다 더 적합한 단어가 있을까? 그러나 아직 끝이 아니다.

떠나는 워즈니악의 등을 비추던 카메라가 다시 무대로 돌아 잡스를 잡는다. 객석 쪽에서 멀찌감치 내려다보이는 잡스는 한 방 맞았다는 듯, 아니면 개의치 않는다는 듯, 알 수 없는 표정으로 고개를 돌린다. 그 뒤로 프레젠테이션을 위해 준비해 둔 스크린이 배경처럼 걸린다. 그 속에 이렇게 적혀 있다: '다르게 생각하라(Think Differ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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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티브 잡스를 아는 이라면 누구나 아는 한 문장이다. "다르게 생각하라." 잡스가 이룬 모든 신화를 대변하는 한 문장이다. "다르게 생각하라." 스티브 잡스의 다른 이름이라고 해도 될 만한 문장이다. "다르게 생각하라." 그런데 이 익숙한 한 문장이 ‘이진법’이라는 단어와 만나 더 이상 생경할 수 없는 낯선 문장으로 다가온다.

대니 보일 감독은, 각본을 쓴 아론 소킨은 누구를 위해 그 장면에 그 문장을 넣었을까? "다르게 생각하라."는 잡스의 대사일까, 아니면 워즈니악의 대사일까? 어떻게 생각하는 것이 ‘다르게’ 생각하는 것일까? 영화를 본 지 여러 날이 지났지만 좀처럼 답이 찾아지지 않는다.

영화를 봤든 보지 않았든 오늘 이 시간을 살고 있는 지구상의 수많은 사람들은 스티브 잡스에게 빚을 지고 있다. 그가 이룬 성취 덕분에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상상도 못했던 일들을 일상으로 누리는 행운 말이다. 그런데 달리 생각해 보면, 정작 엄청난 성취 뒤에 감춰진 '인간'으로서 잡스의 삶은 성공한 것이었을까? 나아가, 잡스가 만들어 준 새 '패러다임' 속에서 우리는 반드시 이전보다 더 행복한가?

정답은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다. 이 역시 '이진법'이 아니므로. 혹시라도 정답이 있다면, 그것을 찾는 건 오롯이 관객들 각자의 몫이다. 

(사진=게티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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