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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드리포트] '영변 폭격론'의 진실…"대통령에게 보고된 계획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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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년 1차 북핵 위기 때 대책 마련을 주도했던 윌리엄 페리 전 국방장관이 미국의 대응 과정을 회고록을 통해 공개했습니다.

북한이 IAEA 국제원자력기구의 사찰을 거부하자 당시 페리 장관은 게리 럭 주한미군 사령관 등 군부에 '서지컬 스트라이크(surgical strike)' 즉, 영변 핵시설에 대한 외과수술식 공습 계획 마련을 지시합니다.

미군 피해의 위험이 없고 방사능 문제도 공습을 해도 안전할 것으로 결론지었습니다.

페리는 그러나, 북한이 남한을 공격할 가능성이 있어 공습은 외과수술적일 수 없었다고 술회했습니다.

따라서 영변 폭격 방안은 자신이 주재한 회의에서 논의 테이블에 오르긴 했지만, 테이블의 저만치 뒤쪽에 있었으며 결론은 외교를 통한 해결이었다고 밝혔습니다.

[1994년 북한의 영변 핵 시설에 대한 외과수술식 공습을 언급하셨는데, 얼마나 진지한 방안이었습니까?]

[윌리엄 페리/전 미 국방장관 : 영변에 대한 전략적 외과수술식 공습 계획은 하나의 계획일 뿐이었습니다. 외교가 실패할 경우의 대안이었죠. 하지만 그 계획은 테이블의 저 뒤쪽에 있었습니다.]

워싱턴에서 SBS 취재진과 만난 페리 전 장관은 따라서 영변 폭격 방안은 빌 클린턴 대통령에게 보고하지 않았다고 증언했습니다.

[빌 클린턴 대통령의 반응은 어땠습니까?]

[(영변폭격안을) 그에게 결코 제안하지 않았습니다. 절대 제안하지 않았죠. 가용한 안이었고 외교가 실패할 경우에야 클린턴 대통령에게 제안했을 겁니다.]

백악관에 보고된 행동 계획은 대북 제재와 한국 내 미국 민간인 대피, 그리고 주한미군 병력을 2만 명 증강하는 방안이었습니다.

당시 병력의 50% 수준입니다.

클린턴 대통령이 보고를 받고 결단을 내릴 시점 평양에서 김일성 주석을 만난 지미 카터 전 대통령의 전화가 걸려왔고, 북핵 위기가 뜻하지 않게 해소되면서 북미 대화의 문이 열렸습니다.

이후 페리는 1998년 북한의 대포동 미사일 발사 뒤 대북정책조정관으로 다시 전면에 등장합니다.

이른바 '페리 프로세스'가 가동돼 북한의 조명록 인민군 차수가 백악관을 방문하고 북미 수교가 눈앞에 보이는 듯했던 상황이었습니다.

페리는 임기를 석 달 남겨둔 클린턴이 중동 평화와 북미 관계 정상화를 놓고 저울질하다 둘 다 성공 시킬 시간이 안 돼 중동을 택했다고 밝혔습니다.

이후 바통을 이어받은 조지 W. 부시 행정부가 북한과 대화 단절을 선언하고 그동안 진행돼 온 외교 노력을 일거에 날려 무척 화가 났다고 페리는 회고했습니다.

페리 전 장관은 북한의 핵 포기와 북미 관계 정상화의 기회가 있었는데 결국, 실현되지 않았다며 북핵 외교는 미국 역사에서 가장 성공적이지 못한 외교였다고 결론지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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