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4월 중순 미일 정상회담과 외교.국방 ‘2+2’ 회의를 앞두고 워싱턴 DC가 한미일 3각 외교로 바쁘게 돌아갔다. 한미일 군사 당국자 회의가 잇달아 열리고, 한미일 외교차관 3자 협의까지 처음 열렸다.
# 장면 하나
현지 시간 4월 15일 저녁 워싱턴 근교. 국방부 당국자가 미일 방위협력 지침 개정과 한미일 3자 군사협의 과정을 워싱턴 특파원들에게 설명하는 자리를 마련했다.
일본 자위대의 집단적 자위권 행사, 유사시 한반도 진입 문제가 초미의 관심사였다.
이 당국자는 "사전 동의, 요청 없이 우리의 국익, 주권에 영향을 미치는 집단적 자위권 행사는 안 된다는 점을 미일 양측에 몇 차례 전달했다"고 소개했다.
SBS 취재진이 다시 물었다.
"거기에는 당연히 북한도, 한반도의 북한 지역도 포함됩니까?"
"당연히 그렇게 생각합니다."
# 장면 둘
다음날인 4월 16일 오후. 워싱턴을 방문한 정부 고위 당국자에게 SBS 취재진이 물었다.
"우리나라 영역이라고 하면 당연히 한반도, 북한까지 포함하는 것입니까? ... 당연히 전제되어야 하는 것 아닌가요"
"저희로서는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 장면 셋
현지 시간 10월 20일 낮 워싱턴의 미 하원 덕슨 빌딩 북한 청문회장 앞. 미 국무부의 성김 대북정책특별대표 겸 동아시아태평양 담당 부차관보가 한미일 기자들 앞에 섰다.
SBS 취재진이 물었다.
- 서울에서 한일 국방장관 회담이 열렸습니다. 북한 지역 유사시 일본 자위대가 미군을 지원해 작전할 경우, 한국 정부의 동의가 필요합니까?
=일본 자위대가 한반도에서 그 어떤 것을 하든, 한국 정부 동의 없이 하지는 않을 것임이 분명합니다.
성김 대표는 개정된 미일 방위협력지침의 '제3국 주권 존중'을 거론하면서, 이를 고려하면 일본이 한국 정부 동의 없이 한반도에서 작전하지 않을 것임이 명백하다고 거듭 확인했다.
"거기에 북한 지역도 포함되느냐?"고 묻자 "제3국 주권 존중"이라고 답하는 선에서 매듭을 지었다. ‘한반도’라고 두 번 답했으면 됐지, 북한의 실명까지 거론하기는 곤란했을 것이다. 누구보다 먼저 반발할 게 북한일텐데..
▶ [관련 기사] 日, 한국 동의 없이 北 진출?…"그런 일 없을 것"
맨 위 ‘장면 하나‘의 군사 당국자가 이야기했듯이, 일본 자위대의 집단적 자위권 행사는 우리의 국익, 주권과 직결된 문제다.
'과거사 왜곡에다 한반도를 강점했던 일제의 식민 청산도 제대로 안 됐는데, '일본군'의 군홧발이 다시 한반도에?'
한국민 누구도 용납할 수 없는 일이다.
이 문제가 더욱 민감한 이유는 휴전선 이북 북한 지역 때문이다. 헌법상 대한민국의 영토는 한반도와 그 부속도서다. (헌법 제3조)
최악의 경우를 가정한다면 이런 시나리오를 그려볼 수 있겠다.
북한에 군사 쿠데타가 일어난다. 주민들은 보따리를 싸들고 남쪽으로는 휴전선을, 북쪽으로는 두만강, 압록강을 무작정 넘는다. 핵무기 통제권을 누가 쥐고 있는지 오리무중이다. 내전 상황으로 빠져들면서 휴전선 너머 주한미군 기지를 향해 포탄이 날아든다. 미군을 주축으로 한 유엔군이 1953년 정전협정 위반을 근거로 교전을 재개하며 북진한다. 북한의 핵무기와 핵물질 확보를 위해 미군 특수작전부대가 투입된다. 두만강, 압록강변에 진을 친 중국군도 국경을 넘는다. 일본도 가만히 있을 수 없다. 미군이 공격을 당했으니 집단적 자위권을 발동해 유엔사 후방기지의 주일미군을 도와 반격, 한반도 작전에 나선다. 북한 정권이 사실상 붕괴해 자위대가 북한 지역에 '진출'하려 해도 동의나 승인을 받을 수도, 그럴 필요도 없다.
물론 실제로 현실화되기 어려운 가상의 시나리오다. 끔찍하다.
그러나, 지난 20일 4년 9개월 만에 서울을 방문한 나카타니 겐 일본 방위상이 불씨를 지폈다. '실효적 지배'를 거론하며 휴전선 이북에 대해서는 한국이 목소리를 낼 근거가 없다는 취지였다.
'도대체 군사 외교를 어떻게 했길래 반년이 지나 저런 소리가 나오나?' 싶어 다음날 워싱턴에서 성김 대표를 상대로 취재에 나선 것이다.
한국과 일본을 담당하는 고위 외교 당국자가 '한반도'와 '동의'를 두 차례나 언급했다면 미국 정부도 양해를 했다고 보는 게 타당할 것이다.
2015년 4월 17일자 국방부 보도자료를 살펴봤다. 제 7차 한.미.일. 안보회의(DTT) 공동 언론보도문에 이렇게 적혀 있다.
"미·일 방위협력지침은 미.일동맹의 틀 내에서 개정될 것이다. 3국 대표들은 이러한 노력이 역내 평화와 안정에 기여하고 투명하게 이루어지며, 제 3국의 주권 존중을 포함한 국제법을 준수하는 방향으로 추진되는 것이 중요하다는데 동의하였다."
'제3국 주권 존중'이 들어있지만 '국제법'의 함의가 뭔지 궁금하다.
일본으로서는 납북자 문제 등 북한과의 특수 관계가 있고 쓸데없이 북한을 자극할 소지가 있는 문제이기 때문에, 물밑 논의에서 양해가 이뤄졌으리라 믿고 싶다.
그러나, 우리 외교 당국, 군사 당국이 한미일 3자 대화 채널에서 이를 분명히 관철하지 못하고 일본에 이제 와서 딴소리를 할 빌미를 줬다면 이는 큰 외교적 실책이다. 일본의 집단적 자위권을 용인하고 그 영향이 한반도에까지 미치는데도, 이리저리 끌려 다니며 들러리만 선 꼴이기 때문이다.
지난 4월 우리 정부 군사, 외교 당국자가 확언하지 못하고 '그렇게 생각한다' '그렇다고 생각한다'며 얼버무린 이유를 곱씹어보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