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세난 서민들, 보이스피싱 '1회용 인출책'으로 전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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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세자금 필요하시죠? 대출받는 길을 열어 드리겠습니다."

전세 대란에 떠밀린 서민들이 전세자금 대출을 해준다는 말에 속아 자기도 모른 채 보이스피싱 인출책 역할을 하다가 피소되는 사례가 잇따르고 있습니다.

대포통장에 대한 단속이 강화되자 사기단들이 인출책마저 보이스피싱으로 낚아 충당하는 새로운 사기수법을 개발한 것입니다.

서울 강동경찰서에 따르면 서울 광진구에 사는 이 모(70)씨는 지난 6일 갑작스레 'B대부'란 업체로부터 신용등급을 올려 주겠다는 전화를 받았습니다.

회삿돈으로 인위적인 거래실적을 쌓아줄 테니 신용등급이 올라 원하는 만큼 대출을 받게 되면 대출금의 3%를 수수료로 지급하라는 제안이었습니다.

결혼을 앞둔 아들에게 전셋집을 마련해줘야 하지만 대출이 쉽지 않아 마음을 졸이던 이 씨는 사흘 뒤인 9일 오전 동작구 이수역앞 커피숍에서 B대부 직원이라는 '김 대리'를 만나 계약서를 작성했습니다.

김 대리는 이 씨에게 "거래실적을 쌓기 위해 통장에 회삿돈을 넣어줄 테니 출금을 해 오라"고 지시했고, 이 씨는 이후 이틀간 7차례에 걸쳐 자신의 통장에 들어온 1억6천900만 원을 인출해 김 대리에게 넘겼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순진한 서민을 '1회용 인출책'으로 써먹으려는 보이스피싱 사기단의 함정이었습니다.

이 씨는 16일 느닷없는 경찰의 출석 통보를 받았고, 믿음직하기만 했던 김 대리는 연락이 끊겼습니다.

인천에 사는 또 다른 이 모(42)씨도 마찬가지 상황에 처했습니다.

전세금이 올라 이사를 고민하던 그는 같은 내용의 전화를 받고 이달 2일 김 대리를 만난 뒤 5차례에 걸쳐 1억7천만 원을 뽑아 건네줬습니다.

경찰에 따르면 김 대리 일당에 속아 보이스피싱 인출책 역할을 하게 된 이들은 4명이 더 있었습니다.

지난달 26일부터 이달 11일까지 불과 보름여만에 피해자 27명으로부터 10억8천900여만 원을 뜯어낸 사기단은 이런 수법으로 피해액의 80%가 넘는 8억9천여만 원을 인출해 중국으로 송금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경찰은 대대적인 단속으로 대포통장 수급에 어려움을 겪게 된 사기범들이 단번에 최대한 많은 돈을 뜯어내려고 새로운 인출 방법을 고안해 낸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현금자동인출기(ATM) 1일 출금한도가 600만 원이란 점을 감안하면 대포통장 한 개로 낼 수 있는 '매출'은 600만 원으로 제한되기에 예전에는 수천만 원을 뜯어도 대포통장 한 개당 600만 원씩 나눠서 송금시켜야 했습니다.

하지만 창구에서 계좌 명의자가 직접 돈을 인출하게 하면 ATM 출금한도와 출금횟수 제한, 지연인출제도 등 보호장치가 모두 무력화되는 것입니다.

경찰 관계자는 "예전 방식대로 돈을 인출하려 했다면 피해금 10억8천900여만 원 중 1억 원도 제대로 빼내지 못했을 테고, 애초 이렇게 짧은 시간에 11억 원 가까이 가로채려고 시도하지도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이들의 범행이 꼬리를 잡힌 것은 과욕 때문이었습니다.

김 대리가 속한 조직은 지난달 13일 금융감독원을 사칭해 강동구에 사는 A(70·여)씨에게 전화를 걸어 "당신의 계좌가 범죄에 이용됐으니 돈을 국가정보원 안전계좌에 보관해야 한다"고 속였습니다.

감쪽같이 속은 A씨는 4천500만 원을 송금했고, 이에 신이 난 사기범들은 아예 직접 A씨 집에 찾아가 2억8천만 원을 더 뜯어냈습니다.

하지만 이들은 돈을 더 챙기려는 욕심에 A씨를 다시 용산으로 불러냈다가 잠복 중이던 경찰에게 붙잡혔습니다.

김 대리는 실상 중국에 거점을 둔 보이스피싱 사기단의 하부 조직원인 중국동포 한 모(23)씨로 밝혀졌습니다.

지난해 입국한 한 씨는 역시 중국동포인 정 모(24)씨, 서 모(24)씨와 함께 송금책 역할을 해 온 것으로 조사됐습니다.

경찰은 한 씨 등 3명을 사기 등 혐의로 구속했습니다.

판단능력이 떨어지는 지적장애인을 인출책으로 활용한 조직도 나왔습니다.

송파경찰서는 자기 계좌로 송금된 보이스피싱 피해금 7천700만 원을 인출해주고 500만 원을 받아챙긴 혐의(사기 등)로 지적장애 3급인 박 모(53)씨를 구속했습니다.

박 씨는 2009년부터 보이스피싱 조직에 자기 명의의 대포통장을 만들어주고 용돈을 챙겨오다, 최근 인출책으로 고용돼 이같은 범죄를 저질렀습니다.

경찰은 "박 씨 역시 '한 방'을 노린 범죄자들에 의해 1회용 인출책으로 이용당한 셈"이라고 말했습니다.

(SBS 뉴미디어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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