넴초프 피살 미궁 빠지나…"고문 당해" 피의자들 혐의 부인

인권단체, 감찰 요구…체첸군인 배후설은 '꼬리자르기'


러시아 유력 야권 지도자 보리스 넴초프(55) 살해 사건의 주범으로 스스로 혐의를 인정한 것으로 알려졌던 체첸 내무군 출신 장교가 무죄를 주장하고 나서면서 사건 수사가 미궁으로 빠져들고 있다.

수사 당국이 피의자 조사 과정에서 고문을 통해 자백을 강요했다는 주장까지 제기되면서 강압 수사 논란도 일고 있다. 야권은 수사 당국이 정치 보복 살해설을 잠재우기 위해 범행 동기를 이슬람 연계설 쪽으로 몰아가고 있다고 비난했다.

◇ 피의자들 혐의 부인…고문 흔적

11일(현지시간) BBC 방송 러시아어 인터넷판에 따르면 넴초프 살해 사건의 핵심 피의자로 지목돼 구속 수사를 받고 있는 체첸 자치공화국 내무군 부대대장 출신 자우르 다다예프가 구치소를 방문한 인권운동가들에게 무죄를 주장했다고 전했다. 방송은 또 다다예프의 몸에서 고문 흔적도 발견됐다고 소개했다.

보도에 따르면 구치소 및 교도소 내 인권 상황을 감시하는 '시민감시위원회' 위원들은 전날 모스크바 시내 구치소에 수감중인 다다예프와 또다른 피의자인 안조르 구바셰프와 그의 동생 샤기트 구바셰프 등을 면담했다.

인권운동가들과의 면담에서 다다예프는 자신이 넴초프를 살해하지 않았다고 주장하면서 경찰에 함께 체포됐던 내무군 근무 시절 부하 루슬란 유수포프를 석방해 주는 대가로 범행을 인정하도록 강요받았다고 폭로했다. 다다예프는 지난주 체첸 수도 그로즈니에서 체포돼 모스크바로 압송됐다.

그는 만일 체포 당시 혐의를 인정하지 않았으면 자신도 또 다른 용의자 베슬란 샤바노프처럼 살해됐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샤바노프는 그로즈니에서 경찰과 대치하다 수류탄을 터뜨려 자폭한 것으로 알려졌다.

수사 당국은 앞서 다다예프가 혐의를 인정했다고 밝혔고 영장 실질 심사를 맡았던 모스크바 지역 법원 판사도 다다예프가 혐의를 인정해 구속을 허가했다고 설명한 바 있다.

다다예프는 또 인권운동가들에게 수사관들의 가혹 행위에 대해 불만을 제기하며 몸에 남은 수갑, 족쇄, 쇠고랑 흔적 등을 보여줬다.

구바셰프 형제도 면담에서 무죄를 주장하면서 수사관들이 폭행을 하며 자백을 강요했다고 폭로한 것으로 알려졌다.

◇ 피의자 면담 인권단체, 수사과정 감찰 요구

인권운동가들은 면담 결과를 토대로 연방교정국장과 연방수사위원회 위원장, 검찰총장 등에게 수사 과정을 점검해 줄 것을 요구하는 신청서를 보냈다.

서한에서 인권운동가들은 "피의자들의 신체에 대한 육안 검사를 통해 구바셰프 형제와 다다예프의 팔과 다리에서 타박상, 혈종, 수갑 및 족쇄 흔적 등을 확인할 수 있었다"고 지적했다. 인권운동가들은 그러면서 피의자들에 대한 고문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법의학 감정을 실시하고 피의자들의 안전을 보장할 것을 요구했다. '시민감시위원회' 위원들과 함께 다다예프를 만난 현지 신문 '모스코프스키 콤소몰레츠' 기자도 다다예프가 자백을 강요받고 고문을 당했다는 진술을 했다고 전했다.

신문에 따르면 다다예프는 "체포 당시 내무군 복무 시절 부하였던 유수포프와 함께 있었으며 만일 내가 혐의를 인정하면 그를 풀어주겠다고 해 동의했다"고 말했다. 다다예프는 "유수포프를 먼저 구하고 모스크바까지 나를 산 채로 호송해 가면 법원에서 진실을 밝히겠다고 생각했지만 판사는 발언 기회도 주지 않았다"고 불만을 토로했다.

다다예프는 지금까지 알려진 것과는 달리 넴초프 피살 다음날인 지난달 28일에야 내무군 부대에서 전역했다고 주장했다. 내무군 북캅카스 지역 사령부도 이를 확인했다.

◇ 반정부 성향 신문 "살해 대상 목록있다"

반정부 성향 신문 '노바야 가제타'는 살해 대상 야권 인사 목록이 존재한다고 전하면서 이 목록에는 넴초프 외에 크렘린을 비판해온 라디오 방송 '에호 모스크비' 보도국장 알렉세이 베네딕토프, 거대 석유회사 유코스 전(前) 회장 미하일 호도르콥스키, 야권 성향 여성 TV 아나운서 크세니야 소브착 등이 들어있다고 주장했다.

수사당국은 현재 다다예프와 구바셰프 형제, 람차트 바하예프, 타메를란 에스케르하노프 등 5명을 붙잡아 넴초프 살해 사건의 피의자로 구속수사하고 있다.

현지 인터넷 통신 '로스발트'는 전날 수사 당국 관계자를 인용해 체첸 내무군 부대 '세베르'(북방)에서 근무했던 다다예프와 샤바노프가 넴초프 살해를 기획하고 실행한 것으로 파악됐다고 전했다.

통신은 이들이 러시아에 거주하는 무슬림과 예언자 무함마드에 대해 넴초프가 비판적 발언을 하는 것을 참을 수 없어 범행을 저질렀다고 진술한 것으로 보도했다.

◇ "체첸 군인 배후설은 꼬리자르기"

야권은 그러나 과격 이슬람 세력 범행설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

넴초프의 가까운 동지였던 미하일 카시야노프 전 총리는 넴초프가 반(反) 이슬람 발언을 해 피살됐다는 주장을 일축하면서 "넴초프는 결코 무슬림에 반대하는 어떠한 입장을 취한적이 없다"고 강조했다.

넴초프와 함께 자유주의 성향의 야당인 '공화-국민자유당'(RPR-PARNAS)을 이끌어온 일리야 야쉰은 넴초프 살해가 정치적 동기에 따른 것으로 러시아 정부나 보안기관의 지원 속에 이루어졌다고 거듭 주장했다.

야권은 수사 당국이 지난 2004년 포브스 모스크바 지국 기자 폴 흘레브니코프, 2006년 노바야 가제타 여기자 안나 폴리트콥스카야 피살 사건 때와 마찬가지로 체첸 출신들을 범인으로 몰아 서둘러 수사를 종결하려 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분리주의 이슬람 반군 활동으로 지금도 정세가 불안정한 체첸 지역을 사건의 배후로 몰아 진상 규명을 어렵게 함으로써 크렘린과 연계된 실제 배후를 가리고 도마뱀 꼬리 자르기 식으로 서둘러 수사를 마무리하려 한다는 비판이다.

(모스크바=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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