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늪축구'부터 '차두리 폭풍질주'까지…亞컵의 반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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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10월 초. 독일출신 외국인 감독 울리 슈틸리케가 부임했을 때 우리는 아무도 그에게 4개월 만에 반전 드라마를 써 달라고 부탁하지 않았다. 이번에야말로 참고 기다리겠다고 했다. 한국 축구계에서는 좀처럼 보기 드문 광경이었다. 그런데 불과 4개월 만에 축구대표팀이 다시 숱한 화제를 뿌리고 있다.

슈틸리케호는 22일(이하 한국시간) 열린 2015 호주 아시안컵 우즈베키스탄과의 8강전에서 2-0 승리를 챙기고 준결승에 진출했다. 비우고자 했던 55년 만의 아시아 정상을 향한 야심도 어느새 숙였던 고개를 들었다. 준결승 상대로 예상되는 이란, 그 경기 승리보다 치명적인 유혹이다. 물론 대표팀이 4강 진출에 성공하기까지는 수 많은 우여곡절이 뒤따랐다.

# 키워드 하나 : 늪축구

우리 대표팀은 오만, 쿠웨이트, 이번 대회 개최국인 호주와 A조에 속해 있었고, 조별리그 첫 경기 오만전에서 조영철의 결승골로 1-0 승리를 거뒀다. 그런데 그 내용이 숨막힐 정도로 답답했다. 90분 내내 횡패스와 백패스가 난무했고, 심지어 공허한 슈팅조차 몇 번 나오지 않았다.

누구보다 슈틸리케 감독이 놀랐는지 기자회견장에서 우리는 우승후보가 아니라며 격분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이청용이 4년 전 다쳤던 오른쪽 정강이에 태클을 당해 한 경기 만에 대회를 마감했다. 톰 밀러라는 얼굴도 제대로 모르는 영국 축구선수의 이름이 다시 떠올랐다.

두번째 경기 쿠웨이트전은 더 했다. 믿고 기다리겠다고 했으니 욕도 할 수 없는데 90분 간 '졸전'을 보여주는 슈틸리케호. 주체할 수 없는 공격본능이 늘 양날의 검처럼 따라다녔던 수비수 차두리가 남태희와 1-0 결승골을 합작한 것이 유일한 위안이었던 것조차 반전. 1-0. 1-0. 반전이 계속되자 놀랍게도 중독성이 더해졌다.

(▶영상 : 차두리-남태희 늪축구 합작골)

# 키워드 둘 : 군데렐라

조별리그 세번째 상대는 대회 개최국이자 우승후보인 호주였다. 무서웠다. 급기야 '수틀리게'를 제목에 사용한 기사가 등장했다. 현지에 파견된 기자들이나, 한국에 있는 팬들이나, 사실 속이 뒤틀리기는 마찬가지였다. 숨막히는 경기력으로 꾸역꾸역 이기면서도 칭찬 한 번 받지 못하던 대표팀. 슈틸리케호를 아무도 기대하지 않았던 조 1위로 이끈 건 A매치 5경기만에 두번째 골을 기록한 상주 상무 소속의 공격수 이정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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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협은 아시안컵 개막 직전 치른 사우디와의 평가전이 A매치 데뷔전이었고, 그 경기에서 골을 넣었다. 슈틸리케 감독에게 아시안컵 전까지 주어진 시간은 단 4개월. 지난해 10월, 11월에 치른 네 번의 A매치에서는 이정협을 테스트 해보지도 못했다. 이정협은 12월 시즌을 마친 K리그 선수들만 소집해 제주도에서 진행한 훈련서 확인하고 보름 만에 발탁한 선수였다. 이런 선수를 '군데델라'라 부르지 않으면 무어라 부른단 말인가. 군대에서는 축구를 해야 한다.

(▶영상 : 군데렐라 이정협의 탄생)

# 키워드 셋 : 차두리 폭풍질주

개최국 호주마저 1-0으로 꺾고 조 1위로 8강에 오르자 인터넷 상에는 수 많은 패러디가 등장했다. 팬들은 슈틸리케호의 늪축구에 열광하며 "1-0으로 우승까지!"라는 구호를 만들어 냈다. 디지털 기호로 1과 0이 사용되는 것에 착안 "한국이 IT 강국이라 디지털 축구를 한다"는 농담까지 나왔다.

2002 월드컵 당시 독일대표팀 선수들이 한국에 입국하자마자 "여기가 차붐의 나라입니까?"라고 물었던 것을 패러디해 (슈틸리케 감독을 포함) 한국 축구를 일컬어 "여기가 1-0의 나라입니까?"라는 '웃픈' 대화도 생겨났다. 그 사이 매 경기 풀타임을 뛰는 주장 기성용은 갓성용, 전경기 무실점 방어 중인 골키퍼 김진현은 갓진현이 되어 있었다.

그 늪축구에 종지부를 찍은 것은 놀랍게도 34살 차두리였다. 이번 아시안컵을 끝으로 국가대표를 은퇴하는 차두리는 한국 축구사에 한 획을 그은 2002 신화 주역 중 한 명이다. 브라질월드컵에 함께 하지 못하면서 국가대표 자리에는 미련을 버렸지만 슈틸리케 감독은 아시안컵까지 그의 은퇴를 말렸다. 차붐의 아들이면서, 월드컵 해설자였다가, 55년 만의 아시안컵 우승을 꿈꾸고 있는 차두리의 인생은 결코 흔치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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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두리는 이 날 8강 우즈벡전에서 잊지 못할 폭풍질주들을 시전했다. 공격, 수비 가리지 않고 그라운드에 들어가자마자 특유의 차미네이터가 되어 상대를 '떨궈' 냈는데 경기 후 인터뷰가 담담했다. "나는 후반에 교체 투입됐기 때문에 힘이 남아 있었고, 상대 선수들은 지쳐 보였다. 그래서 돌파했다."

120분 연장혈투를 치른 우즈벡전 경기 종료직전. 1-0 늪축구의 승리가 확정적이었는데도 차두리는 70미터 가까이 폭풍질주 했다. 그리고 대표팀에서 10경기 이상 골을 넣지 못해 힘들어 하던 손흥민에게 정확한 패스로 공을 넘겨줬다. 한국 축구의 역사가 2002년에서 2015년으로 넘어가는 순간이었다.

(▶영상 : 차두리 폭풍질주)

[사진=SBS 중계화면 캡쳐]

(SBS통합온라인뉴스센터 이은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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