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파일] '시'로 엿보는 어린이 마음, 알고 보면 우리 모두의 마음

시집 '복숭아 한 번 실컷 먹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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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00 초등학교를 나와서
국제중학교를 나와서
민사고를 나와서
하버드대를 갈 거다.
그래 그래서 나는
내가 하고 싶은
정말 하고 싶은
미용사가 될 거다.

한 동안 화제가 됐던 글입니다. 어디선가 한 번쯤 들어보신 분도 계실테고, 처음 보는 분도 계실 겁니다. 전 몇 달 전 이런 글이 있다는 얘기를 듣고 ‘어른들이 지어낸 말이 아닐까’ 생각했는데, 아니었습니다. 이 글은 부산 부전초등학교 1학년 박채연 어린이가 쓴 ‘여덟 살의 꿈’이라는 시입니다.

이 어린이의 꿈은 ‘미용사’입니다. 그것도 그냥 저냥 꿈이 아니라 ‘내가 하고 싶은, 정말 하고 싶은 미용사’입니다. 하지만 어른들이 바라는 ‘국제중학교’와 ‘민사고’와 ‘하버드’를 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초등학교 1학년생이 말입니다. 사람의 알맹이보다 ‘스펙’을 먼저 보는 사회가 어린이들 마음에 이런 돌을 올려놨습니다. 이 어린이뿐 아니라, 요즘 다들 그렇지요.

이 시는 ‘복숭아 한 번 실컷 먹고 싶다’라는 시집(보리 출판사)에 실려 있습니다. ‘이오덕 동요제’에 전국 각지의 어린이들이 보내온 시 중 일부를 골라 담은 시집입니다. ( 지난 2003년 세상을 뜬 이오덕 선생님은, 초등학교에서 42년동안 아이들을 가르친 교사입니다. 어린이들이 자신의 생활을 솔직하게 글로 표현하도록 가르친 분으로, 그 뜻을 이어가기 위해 2013년부터 ‘이오덕 동요제’가 마련됐습니다.)  이 책에는 아이들의 생각이 담긴 시 150편 정도가 실려 있습니다. 읽다 보면, 아이들이 무엇에 행복해하고, 무얼 걱정하고, 무엇 때문에 스트레스 받는지 저절로 알게 됩니다. 몇 편 같이 읽어볼까요.

할머니, 할아버지

부산 책과 아이들 2학년 김도연

할머니 할아버지는

우리가 집 가면

점만 하게 될 때까지

우리를 본다.

-

아빠의 실눈

삼척 서부초 4학년 고한승

아버지가 텔레비전을 본다

거실 바닥에 누워

피곤해서 꼽박꼽박 존다.

살살 눈을 감는다. 내가

잘 거면 그만 텔레비전 끄고 주무시라니까

실눈을 뜨며

안 잔다고 한다.

리모콘을 손에 쥐고 존다.

커어 커어 푸우우 코를 골며 존다.

텔레비전 끄고 자요 하면

또 실눈을 뜨고 안 잔다 한다.

내 방에 가면 또 코를 커어 커어 곤다.

아빠는 아침 여덟 시에 가서 밤 열 시에 온다.

일요일만 빼고 다 일한다.

-

할무이

부산 양천초 1학년 장민준

잘 때 맨날

할무이가 책을 읽어준다.

내가 크면

내 아들 아니면

딸한테

맨날

읽어줄거다.

어때요? 저는 놀랐습니다. 할머니 할아버지가 손주들을 떠나 보내며 ‘점’만 해질 때까지 배웅하시는 걸 알고 있어서, ‘안 잔다고 하면서’도 사실은 꾸벅꾸벅 조는 아빠가 주 6일, 힘들게 일한다는 걸 알고 있어서, 할머니가 읽어주시는 책을 들으며, 먼 훗날 자신의 아이들을 생각해서, 그리고 그 생각들을 이렇게 놀라운 시로 표현했다는 게 놀라웠습니다.  시집에는 또 마냥 흐뭇하게만 볼 수 없는 안타까운 고민들도 있습니다.

눈물

서울 신북초 1학년 이윤결

오늘 시험을 봤는데 엄마가

여섯 개나 틀렸다고 나중에 커서

뭐가 될 거냐고 한숨을 쉬었다.

그래서 나는 눈물이 나왔다.

나는 커서 뭐가 될까?

나는 커서 뭐가 될까?

세 번이나 틀린 문제를 다시 풀었다.

지겨웠다.

시험은 정말 지겨워.

이렇게 시험도 지겹고, 숙제도 싫고, 친구가 없는 것도, 친구의 험담을 해버린 것도 속상하고, 다양한 내용이 개성 있는 시어로 표현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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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파

지금은 마침 방학입니다. 이 시집은 부모와 자녀가 함께 읽어도 좋겠고, 저처럼 학부모가 아닌 어른이 읽어도 좋습니다. 이오덕 시인은 “어린이는 모두 시인입니다. 어린이 누구나 시인이 될 수 있는 것은, 슬픔도 눈물도 모르고 돌같이 굳어버린 마음을 가진 어른들과 달리, 어린이는 참으로 곱고 부드러운 마음, 사람이 본래 가지고 있던 마음을 가졌기 때문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우리 모두는 한 때 어린이였고, 지금은 비록 무뎌지고 때묻었지만, 이들처럼 맑고 순수했던 어린이 마음이 지금도 어딘가에 숨어 있어서, 우리가 꺼내주기를 기다리고 있을지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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