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파일] 난민 두루미를 제 고향으로…'안변 프로젝트'에 거는 기대

두루미를 남북한-동아시아 평화의 전령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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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제공 = 진익태(철원두루미학교))

  강원도 철원 평야가 황금빛으로 물들었다. 벼 포기마다 통통한 이삭 다발이 무게를 못 이겨 고개를 숙였다. 농기계 콤바인이 논바닥을 훑어가며 볏단을 베어들이고 볏짚에서 낟알을 떨어 원통형 자루에 담는다. 콤바인 지나간 자리를 가만 들여다보면 짚단과 함께 흩어진 낟알이 제법 수두룩하다. 전체 수확량의 2~3%는 될 거라고 농부들은 말한다. 멀리서 기러기 무리가 고개 빼고 기다리다 콤바인이 멀어지면 몰려와 논바닥을 쫀다. 오리와 빼닮은 갈색 기러기 떼 뒤로는 껑충한 다리에 잿빛 깃털, 눈 주위는 붉고 목 아래로 길게 절반쯤 흰 색인 재두루미가 서너 마리 보인다. 떨어진 낟알을 놓고 기러기와 다툴 참이다. 겨울철새들에게 농부가 떨어뜨린 낙곡은 생존의 수단이다. 날이 좀 더 차가와지면 재두루미보다 몸집이 약간 더 크고, 정수리는 빨간 빛에 온 몸은 하얀 깃털로 덮인 두루미가 떼 지어 날아올 것이다. 철원은 국내 최대, 국제적으로도 손꼽히는 겨울 철새 도래지로 조류학자, 탐조객, 사진 동호인들이 즐겨 찾는 명소로 자리를 굳혔다.

  두루미라는 이름의 새는 지구상에 15종이 있다. 한자 이름은 학(鶴)이다. 아시아에는 8종이 산다. 우리나라를 비롯해 러시아 동부, 몽골, 중국, 일본에서는 두루미, 재두루미, 흑두루미가 주류다. 한반도를 중심으로 북쪽은 4~9월의 번식지, 남쪽은 10~3월의 월동지다. 번식지와 서식지는 물론, 두 지역을 오갈 때 쉬어가는 중간 기착지의 여건이 나빠져 두루미는 수가 갈수록 줄어들고 있다. 특히 정수리가 붉다고 단정학(丹頂鶴)이라고 부르는 두루미는 지구상에 겨우 3,000마리 정도밖에 남아있지 않다는 게 정설이다. 이 가운데 절반은 일본 홋카이도에 연중 텃새처럼 눌러앉아 산다. 철새 습성을 간직한 나머지 1,500마리 가운데 500마리쯤이 중국 동부 해안 지역에서 겨울을 나고 나머지 1,000마리가 한반도를 찾는다. 재두루미, 흑두루미와 함께 국제자연보전연맹이 멸종 위기 종으로 분류했으니, 이만저만 귀한 겨울손님이 아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천연기념물’로 지정해 보호막을 한 겹 더 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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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 땅의 두루미는 철원을 비롯해 서쪽의 연천 임진강변, 파주, 인천 강화도 남단에서 겨울을 난다. DMZ와 민통선 지역으로 사람 발길이 뜸하고, 습지가 비교적 많이 남은 곳으로 통틀어 보면 마치 가느다란 띠 모양이다. ‘한반도의 두루미 벨트’라고 이름을 붙일 만하다. 과거엔 우리나라 전역에 고루 퍼져 살았지만 전쟁, 인구 증가, 도시 팽창, 경제 개발로 두루미가 목숨 부지할 곳이 쭈그러들었다. 서식지가 파편이 됐다고 조류 생태학자들은 걱정한다. 철원에서는 지난 1999년 400마리에서 이후 해마다 크게 늘어 지금은 1,000마리에 이르렀다. 낙곡이 많고 야생조류 보호 차원에서 배고픈 새들에게 낟알 모이주기에 힘쓴 덕분..이라고들 알고 있었다. 알고 보니 주된 원인이 따로 있었다. 1990년대 중반 북한이 경제난과 흉년이 겹쳐 굶어죽는 사람이 속출하고, 이른바 ‘고난의 행군’ 시기에 사람들이 들판에서 낙곡에 풀뿌리까지 훑어먹는 상황이 이어졌기 때문이다. 북한 땅 두루미들도 굶주림을 견디다 못해 휴전선을 넘어 남쪽 철원 평야로 모여들기 시작했으니, 바로 ‘탈북 난민 두루미’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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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실태가 밝혀진 것은 미국 위스콘신 주에 자리한 국제두루재단(ICF;International Crane Foundation)의 공동설립자 조지 아치볼드(George Archibald) 박사와 국내외 전문가들의 꾸준한 공동 조사와 연구 덕분이다. 철원에서 북쪽으로 70km 거리의 북한 강원도 안변은 ‘고난의 행군’ 이전엔 겨울을 나는 두루미가 240 마리나 됐다고 한다. 남쪽도 규제완화로 민통 지역이 줄어들고 개발 바람에 두루미 서식 환경이 갈수록 나빠지고 있다. 대안이 시급했다. ICF와 국제 야생조류 보호 민간 연대기구인 버드라이프인터내셔널이 내린 결론은 ‘탈북 난민 두루미’들이 원래 월동지에 머물 여건을 되살리는 것이었다. 안변 주민들이 자연을 지키며 농사짓고 살 수 있도록 유기농 기반을 보급하는 것이 근원적인 해결책이라는 결론이 나왔다. 가축을 키워 퇴비를 증산하고 민둥산 다락 밭에 과일 나무를 심었다. 버드나무를 따로 심어 땔감을 마련했다. 겨울 들판에 사람이 들어가지 않도록 비워두고, 중국에서 두루미 1쌍을 데려와 우리에서 키우기 시작했다. 안변 하늘을 지나가는 친구들을 불러들이기 위해서다. 이름 하여 ‘안변 프로젝트’엔 국적으로 치면 미국, 캐나다, 중국, 러시아, 일본과 독일, 북한, 그리고 남한의 소수 전문가들이 참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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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6년부터 시작한 안변 프로젝트의 성과는 3년이 지난 2009년부터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다. 이 해 11월 12일에 38마리가 안변 벌에 내려앉아 이틀간 머물렀고, 2011년엔 72마리가 11일 동안, 5마리는 14일을 지내다 남으로 갔다. 2012년엔 다시 줄어서 18마리, 지난해 2013년엔 반대로 다시 크게 늘어 64마리가 며칠씩 머물며 기력을 차린 뒤 철원으로 향했다. 주민들이 유기농을 실천하고, 미꾸라지와 우렁이도 키워 두루미가 좋아하는 동물성 모이를 마련하며 애쓴 덕분이다. 최근의 성과가 자세히 알려지기는 이번이 처음으로, 지난 6일 생물다양성협약 당사국 총회가 열린 강원도 평창에서 동북아 두루미 서식지 보전을 주제로 한 워크숍에 참석한 버드라이프 인터내셔널의 심바 챈 주임연구원이 구체적인 수치를 발표했다. 원래는 조총련계 재일동포인 정종렬 전 도쿄 조선대 교수가 발표할 예정이었으나 국제행사임에도 입국 허가를 받지 못 했다. 한반도와 동아시아 자연생태 보전을 위한 비 정치적인 활동조차 눈치를 살펴야 하는 게 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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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한은 안변 프로젝트에 적극적이다. 안변을 두루미 보호구역으로 지정했고, ICF를 중심으로 들어오는 지원을 다른 곳에 돌리지 않고 원래 목적에 그대로 쓸 수 있도록 보장하고 있다고 아치볼드 박사는 1년 전 방한해서 밝힌 바 있다. 주로 조류 보호 국제 민간단체들과 외국의 개인 독지가들 후원으로 근근이 사업을 이어왔지만 성과가 눈에 보이기 시작하는 지금이 중요하다고 평창 워크숍에 참석한 국내외 전문가들은 입을 모은다. 두루미의 움직임과 생태 환경  정밀 조사 규모를 늘리고 안변의 유기농 기반 다지기에 더 힘을 쏟아야 하기 때문이다. 프로젝트에 참여해 온 외국 인사와 단체들은 우리 정부가 열린 마음으로 길을 넓혀주기를 고대한다. 두루미가 탈북 대열을 벗어나 원래 제 살던 곳에서 살아가도록 도와준다면, 남북한 사이 긴장도 늦출 수 있고 지구촌 생물다양성을 지키는 효과도 올리게 된다. 한반도와 동북아 지역에서 두루미를 건강한 생태계의 상징, 평화와 우호 협력의 전령으로 삼자고, 우리가 나서면 어떤가? 생물다양성협약 제12차 당사국 총회 개최국으로 대한민국이 이쯤도 못할 바는 아닐 것이니...(*)

<2014.10.8. 박수택 논설위원 ecopark58@naver.com> 

(사진 제공 = ICF(국제두루미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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