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처 입은 사람의 고통은 아픈 기억보다 상처를 인지시켜주는 주변인과의 관계에서 빚어진다. '한공주'(감독 이수진)는 인물의 고통과 평화의 날을 목도하는 영화다.
영화는 한 소녀에게 일어난 비극적 사건이 아닌 그 후의 시간을 조용히 따라간다. 이를 통해 시간이 흐르면 자연스레 삶은 지속되지만, 고통은 개인의 의지와 별개로 쉽게 소멸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준다. 타인과 함께 살기에 조화로운 사회가 때론 악몽의 전시장이 되는 순간도 있음을 영화는 담담하게 때론 날카롭게 짚어낸다.
열일곱 살의 평범한 여고생이었던 공주(천우희)는 예기치 못한 사건을 겪은 후 친구도 가족도 모두 잃는다. 쫓겨나듯 전학을 가게 된 공주는 새로운 친구들을 만나고, 위탁 가정에서 따뜻한 보살핌도 받는다.
일상으로 돌아온 공주는 상처를 회복한 듯 보이지만, 죄책감으로 인한 환영을 보기도 한다. 그럴때마다 공주에게 위안을 주는 것은 노래와 수영이다. 이를 통해 생채기를 회복하고 세상 밖으로 나갈 힘을 얻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과거의 굴레와 세상의 차가운 시선은 공주의 발목을 잡는다.
영화의 오프닝에서 공주는 자신을 추궁하는 사람들에게 "전 아무것도 잘못한 게 없는데요"라고 말한다. 관객은 소녀의 또렷한 눈빛과 주저함 없는 말투에서 순수성을 의심하지 못할 것이다. 도대체 이 소녀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라는 거대한 물음표를 가지게 될 뿐이다.
영화는 소녀의 내면을 영상화 시켜놓은 것처럼 과거와 현재를 오가고, 사건의 앞, 뒤를 섞어 퍼즐같은 구조를 보여준다. 또 소녀 감성을 한껏 살린 감성적인 분위기를 띄지만, 이야기의 중심엔 큰 미스터리를 심어놓아 계속해서 호기심을 자극한다.
그러나 '한공주'는 소녀의 비밀을 쉽게 수면 위로 드러내지 않는다. 대신 과거의 상처에 쉽게 짓눌리지 않는 소녀가 의지적으로 삶을 이어나가고, 주변인과 관계를 맺으며 고통으로부터 해방되고자 하는 노력의 시간을 담는데 가장 충실하다.
영화는 소녀의 일상, 친구들과의 우정, 자아실현에 대한 의지 등을 그린다. 무거운 바윗덩이를 들어 올리는 것은 중반 이후부터다. 모든 것이 제 자리로 돌아왔다고 여길 때쯤 그 상처는 드러난다.
공주가 당한 사건은 뉴스나 신문 지상을 떠들썩하게 장식했겠지만, 이후 삶에서 찾아오는 비극은 누구도 주목하지 않았다. 그러나 피해자의 진짜 고통은 그곳에서부터 다시 시작한다. '한공주'는 그 당연한 사실을 놓치지 않았다.
영화는 성 관련 범죄에 있어 피해자 보호가 유명무실한 법의 허점을 꼬집기도 한다. 피해자가 도망을 다녀야 하고, 가해자의 부모가 뻔뻔하게 피해자를 괴롭히는 상황은 차마 눈뜨고 지켜보기 어려운 충격적인 현실이다. 더욱이 이 영화가 실제 사건을 거울 삼아 쓴 이야기라는 것을 고려하면 우리 사회가 이렇게 무기력했나는 분노와 반성을 불러일으킨다.
장면 대부분을 핸드헬드 기법으로 촬영한 것이 인상적이다. 소녀의 섬세한 감정선을 따라가는 데 있어 흔들리는 카메라는 더없이 효과적이었다. 이름 때문이 아니라 섬세한 연출 때문이라도 여자 감독이라고 오해할 만하다. 그만큼 이수진 감독은 여리디 여린 소녀의 감성을 섬세하게 살려냈다. 그러나 몇몇 장면에서는 독할 정도로 사실적인 연출을 보여주기도 한다.
영화의 오프닝과 더불어 엔딩의 여운도 크다. 판타지적인 요소가 돋보이는 마지막 장면을 보며 이후 공주의 삶은 비극일까 희극일까를 생각해보게 된다. 그 물음의 답은 통속적이지만 관객의 마음 안에 있을 것이다.
배우 천우희의 발견은 이 영화가 제공하는 최고의 선물이다. '마더', '써니' 등으로 주목받았던 천우희는 '한공주'를 만나 비로소 만개한 느낌이다. 순수와 고통의 양면을 놀랍도록 섬세하게 연기해냈다.
지난해 만들어진 '한공주'는 제18회 부산국제영화제 CGV무비꼴라쥬상과 시민평론가상, 제13회 마라케시 국제영화제와 제43회 로테르담 국제영화제에서 대상격인 금별상과 타이거상을, 제16회 도빌 아시아 영화제에서 심사위원상, 국제비평가상, 관객상 3관왕, 프리부르국제영화제 대상까지 총 8개의 트로피를 거머쥐었다.
해외영화제 수상이 작품성을 담보하는 것은 아니지만, '한공주'에 쏟아진 찬사만큼은 정직한 것이라 자부한다. 청소년 관람불가, 상영시간 112분, 4월 17일 개봉.
(SBS 통합온라인뉴스센터 김지혜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