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야세르 아라파트 전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수반이 독살됐을 가능성이 제기됐습니다. 아라파트 수반은 2004년 11월 갑작스런 병으로 프랑스 파리 근교의 군 병원에 입원한 뒤 병세가 악화돼 한 달 만에 숨졌습니다. 당시 사인이 명확지 않아 의혹이 일었지만 부인인 수하 여사의 요청에 따라 부검은 하지 않았습니다. 프랑스 의사들은 사망 원인으로 심장마비나 혈전 문제로 숨졌을 것으로 추정했습니다.
이후 독살 의혹이 꾸준히 제기됐고, 2012년 알 자지라 방송이 아라파트의 옷에서 방사성 물질이 검출됐다는 보도 이후 수하 여사가 스위스 과학자들에게 사인을 밝혀줄 것을 요청했습니다. 스위스 과학자들은 유해에서 폴로늄-210을 검출했는 데, 이 물질은 자연 상태에서는 거의 나오지 않는다고 설명했습니다. 입원 당시 아라파트가 보였던 증세는 폴로늄을 흡입한 상태와 비슷했다고도 덧붙였습니다.
폴로늄-210은 신체 내부에 조금만 들어가도 혈관으로 침투해 혈구에 충격을 주고 간과 신장 등 주요 기관을 손상시킨 뒤 심장을 공격한다고 합니다. 단 50나노그램(10억분의 1 그램)만 복용해도 생명이 위태로울 수 있다고 합니다. 이 물질은 피부를 직접 통과하지 못해 복용하거나 흡입해야 신체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만일 아라파트가 독살됐다면 누가 그런 짓을 했을까요? 살인자를 가릴 때 가장 우선시 하는 것이 누가 이득을 봤느냐입니다. 원한도 작용하겠지만 아라파트 같은 인물에게는 부차적인 문제가 되겠지요. 당연히 이스라엘이 1번 후보자가 될 것입니다. 실제로 이스라엘은 핵 개발을 한다는 의혹을 받고 있기 때문에 방사성 물질을 획득하기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 또 하나의 가능성은 팔레스타인 내부의 짓일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팔레스타인인들이 지도자를 암살할 때 독살이라는 방법을 애용했다는 전통을 지적하는 시각입니다. 이밖에도 아라파트는 워낙 적이 많았던 사람이라 암살 용의자는 차고도 넘칩니다.
그런데 우연의 일치이겠지만 폴로늄-210을 이용한 암살이 꼭 2년 뒤 또 한 차례 있었습니다. 2006년 11월 영국 런던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전직 KGB 요원으로 영국으로 망명해 반 푸틴 활동을 하던 알렉산더 리트비넨코가 암살된 것입니다. 리트비넨코는 런던의 한 호텔 식당에서 옛 동료들을 만나 차 한 잔 하고 헤어졌는 데 바로 병원에 입원했습니다. 3주 만에 숨졌는 데, 그가 마신 찻잔에서 폴로늄-210이 나왔습니다. 이후 영국 경찰의 수사에서 호텔과 비행기 등 용의자들의 동선에서 폴로늄-210이 검출됐다는 보도가 있었습니다. 이 사건으로 영국은 러시아와 외교 마찰 까지 빚었습니다. 영국은 용의자로 지목된 루고보이 등의 인도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이 사건도 미해결인 채 현재 진행중입니다. 당시 입원 중 촬영된 사진에 머리가 완전히 벗겨진 리트비넨코의 모습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자 이처럼 폴로늄-210은 어떤 식으로든 직접 먹거나 흡입해야 합니다. 늘 암살의 위협 속에 살았던 아라파트가 호락호락하게 당했을 까요? 암살됐다면 주변의 누군가가 손을 써야 했을 것이라는 추정이 가능합니다. 함부로 입수하기 어려운 방사성 물질을 이용했다는 점, 당시만 해도 이런 물질로 암살한다는 것을 생각하기도 어려웠다는 점, 게다가 측근 까지 개입돼야 한다는 점, 여러 가지를 고려해 볼 때 암살이라면 단순한 개인이나 작은 조직의 짓은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암살 가능성이 제기되자 이스라엘은 즉각 부인했습니다. 이스라엘은 아라파트의 사망에 어떤 방법으로도 개입하지 않았다고 주장했습니다. 같은 물질을 사용한 것으로 의심받는 러시아도 부정적 견해를 보였습니다. 러시아팀은 유품에서 폴로늄-210의 흔적을 발견하지 못했다고 밝혔습니다.
결국 이번에도 아라파트의 사인은 제대로 밝혀지지 않을 가능성이 큽니다. 물론 암살됐다 하더라도 누가 어떻게 했는 지 밝히기는 더욱 어렵습니다.
독극물 암살 사건으로 그나마 전모가 확인된 경우가 있습니다. 1978년 불가리아의 반체제인사로 영국에 망명해 있던 작가 게오르기 마르코프가 암살됐습니다. 마르코프는 거리에서 행인의 우산에 찔린 뒤 쓰러졌고, 리친이라는 독극물에 중독돼 숨졌습니다. 이 사건도 끝내 범인은 잡지 못했지만 냉전 종식 이후 불가리아 정부의 문건이 공개되면서 불가리아 정보부 소행으로 드러났습니다. 국가에 의한 암살이 드러난 거의 유일한 사례입니다.
미국 NSA의 전세계적인 도청이 문제가 되면서 정보 기관들이 또다시 세계인의 관심을 받고 있습니다. 국내에서도 국정원의 불법적인 활동이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정보 기관은 늘 움직입니다. 다만 우리 눈에 쉽게 띄이지 않을 뿐입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미국은 드론을 이용한 공격을 하고 있습니다. 대놓고 암살 작전을 실행하는 것입니다. 이에 대응해 테러 강도도 강해지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선악을 따지기는 어려워 보입니다. 지금 우리는 인간의 가치 문제는 제쳐두고 국가 이익을 최우선시하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